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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몰고 온 환향년들: 정착민 식민주의의 감성 구조 1> 본문

대안적 지방담론과 정착민 식민주의

<이단을 몰고 온 환향년들: 정착민 식민주의의 감성 구조 1>

alice11 2024. 3. 23. 15:26

 

 

 

<이단을 몰고 온 환향년들: 정착민 식민주의의 감성 구조 1>
 
 
4월에 대중서사학회에서 발표할 논문 초고
 
 
지역에 대한 대중 서사를 열심히 찾아보고 정리하고 있는데. 최근 눈여겨 본 작품들이 볼 때는 몰랐는데. 결국 환향년들(고향에 돌아온/못돌아가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국가와 여성의 관계가, 지역과 여성이라는 구도로 변화하는 흐름이 흥미로움. 특히 지방 소멸이 강조되는 타이완, 일본, 한국에 공통적인 현상....
 
 
이케이도 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야부사 소방단>
 
 
이케이도 준의 작품은 소설은 못보았으나 드라마를 꽤 많이 보았다.
한자와 나오키의 바로 그 작가.
 
 
최근 작, <육왕>, <변두리 로켓>, <민왕>, <루스벨트 게임> 등 중요 작품을 드라마로 보았다.
 
 
무대가 국가 경제, 기업, 마치코바(작은 마을 기업), 한계취락으로 바뀌면서도 공통된 문제 의식은 몰락과 위협에 맞서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한자와 나오키) 정신.
 
 
<하야부사 소방단>(스포일러 있음)
 
 
추리소설 히트작을 냈으나 후속작이 없이 세월만 보내던 작가 미마 타로(나카무라 토모야)가 아버지 사후 비워둔 고향 집을 팔라는 한 기업의 편지를 받고 귀향해서 동네에 잇달아 벌어지는 방화 살인을 해결하고 소설로도 써서 성공하는 이야기.
 
 
미마 타로는 잠시 들렀던 고향집에서 마을 민간 방위단인 소방단 사람들을 만나 소방단이 되고, 점차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지역 재생 드라마 제작을 위해 만난 타키치 아야(가와고치 하루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실은 방화 살인은 그녀를 앞세워 마을을 점령한 이단 집단의 소행이었다. 타키치 아야는 본색을 드러내고 마을을 위협하는데, 미마 타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끔 주저한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미마 타로가 타키치 아야를 마을 사람들 편으로 돌려세우고. 이단을 몰아낸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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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리메이크 된 <리틀 포레스트> 같은 지역 재생과 지역 부흥의 드라마 시대는 끝났다. 재생과 부흥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지옥(아포칼립스)
 
 
최근 일드에서도 이런 부흥 이후의 지역이 빠져버린 아포칼립스를 그리는 방향을 볼 수 있다. 물론 드라마는 교훈적이고, 영화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드라마는 미마 타로와 타키치 아야가 행복하게 고향에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드라마를 보며 이 서사가 기이한 데자뷔를 주는 사람들도 아마 적지는 않을 듯.
 
 
특히 타키치 아야가 '이단 종교 집단'에 빠지게 된 과정은, 유년기 고향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나 전전하게 된 삶, 도쿄에서도 성폭력과 파워하라에 몰려 정신적으로 내몰리게 되는 과정이 기저에 놓여있다.
 
그녀가 마을 사람들을 위협에 빠트리고, 이단을 몰고 돌아왔지만(환향년과 이단), 막상 그녀를 마을에서 내쫓은 건 마을 사람들.
 
마을을 지킨다는 이 '행복한 일'과 '소명'과 '위기의식'은 역사적으로 이 '민간 방위단'이 '이단' 혹은 '누군가'를 쫓아내고 추방한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마을에 불내는 과정과 소방단의 활약이 관동대지진의 의용대와 조선인에 대한 공포를 연상시키는 게 나만은 아닐듯. 그러나 드라마는 철저하게 이를 이단 종교 집단의 광기로 그린다.
 
그러나 그 추방과 절멸의 과정과 역사는 '위기', '방어', '소명'과 '내 땅을 지킨다'는 사랑이 되었다. 그 사랑이 학살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은 이 마을 누구에게도 설득하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추방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드라마가 의도한 게 아니라, 그 드라마를 사랑 드라마로 볼 수 없는 이들에게 타키치 아야(환향년)에게 놓여진 선택지는 착잡한 마음 없이 볼 수 없다.
 
환향년은 힘을 키워 쫓겨난 마을을 되찾거나(이단과의 결탁)
아니면 자기를 쫓아낸 사람들 편이 되어(사랑) 마을을 지킨다.
 
후자가 전형적인 정착민 식민주의와 이에 대한 동화라는 '선택지'라면, 전자는 비타협적 '이화'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이것은 드라마가 제시하는 선택지이지만, 어쩌면 정착민 식민주의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제시되는 현실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내가 마을을 지키는 동안 너희는 무엇을 했냐?"
"내가 잡은 빨갱이 머릿수가 바로 애국의 지표"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문장은 누군가를 향한 발화이며 정착민 식민주의가 마을의 주인의 경계를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적을 절멸하는데 기여한 만큼 이 땅의 주인 될 자격이 부여된다.
 
환향년 타키치 아야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있다.
 
나도 같이 적을 죽여, 마을의 일원이 되는 일
그게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결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위태로운 건,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불안한 환향년 타키치 아야의 정신 상태 때문이고,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마을을 배신할 터이다.
 
 
길고 긴 탈식민주의 저항의 역사는 그런 선택지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동화나 강요된 화해임을 알려준다.
 
길고 긴 페미니즘의 투쟁의 역사는 그런 선택지는 "동화냐 차이냐" 같은 어느 쪽도 선택일 수 없는 '선택이라는 역설'만 남겨두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반페미니즘 논자들은 이러한 역사를 마치 페미니즘이 동화를 선택하느냐, 차이를 선택하느냐를 두고 시행착오를 반복한 것처럼도 비판한다.
 
조안 스콧도 지적했듯이, 그 선택지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정착민 식민주의가 제시하는 동화냐 차이냐는 바로 그 선택지야말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 선택의 패러독스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탈식민 저항의 정치가 지향하는 방향은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국가, 시민, 사회, 제도가 제시하는 선택지를 넘어서야만 달성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역설을 보여준다는 점.
 
환향년 타키치 아야가 회개해서 '우리의 미마 타로와, 우리의 하야부사를 지키는 결말'이 찜찜하고, 결국 그년은 우리를, 우리 마을을 배신할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해도 동화도 이화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단을 끌고 들어와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환향년이 두렵고 역겨운 건, 그녀들의 존재 자체가 이 마을이 학살과 추방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역사를 환기하는 틈새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마을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려 죽을 힘을 다해 애써도, 결코 그 불안은 잠들지 않는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탄생한 것을, 아마도 우리는 겨우 '윤리'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