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양성평등이라고 환원해서 손가락질하는 건 증오선동 집단의 내러티브, 그리고 이와 타협하고 절충한 정부의 정책 기조의 산물>
<구조적 개혁 없는 본보기 정책의 파상 효과 2
: 차별주의와 타협하기를 사회적 합의로 전도한 정책들 무한한 사례 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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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주제
<페미니즘을 양성평등이라고 환원해서 손가락질하는 건 증오선동 집단의 내러티브, 그리고 이와 타협하고 절충한 정부의 정책 기조의 산물>
선거 이후 나날이 늘어가는 차별 선동
1. <한국 양성평등 교육 진흥원> 교육 자료가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 혹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공격한다는 미디어 보도(인터넷 커뮤니티 받아쓰고 선동하는 기사)
2.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피해자로 보면서 남성의 피해를 살피지 않아서 남성의 억울함을 조장했다."
3. "한국 페미니즘은 서울, 수도권, 엘리트 여성만의 운동이라 근본 한계가 있다."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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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말들은 페미니즘이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 페미니즘이 여성만의 권리를 주장한다, 남성의 권리도 보장해야 진정한 남녀 평등이 구축된다는 식의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이런 주장을 이른바 친정부 지식인들이 시차를 두고 반복하고 있는 데 주목해보자. 저런 주장은 "바보야, 문제는 남녀평등이야" 이런 기조로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여성의 평등만이 아닌, 남성의 권리도 중요하다고 진지하게 주장.
사실 이게 이번 정부가 해온 이른바 "양성평등 정책"의 기조다.
그러면 이게 페미니즘 정책인가? 아니 이건 이번 정부와 이를 지지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이 해온, 차별적인 정책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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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나 기자들도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공부도 없이 아무말이나 할 수 있다는 생각, 발언을 이어주시고 있어서, 역시 두고보고 있다. 이게 한국 지식계의 가장 전형적인 차별주의의 산물이다.
왜 그런가를 타임라인을 거슬러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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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정부들어 페미니즘 논자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제안한 정책은 기존의 <양성평등 정책>을 <성평등 정책>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이번 정부가 페미니즘 정부였다면, 지금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아니라 <성평등 교육 진흥원>이 있어야 하고 <양성평등기본법>이 아니라 <성평등기본법>이 있어야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3. 정부는 성평등이라는 말 하나도 도입하지 못했는데, 근거는 이 개념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식의 차별선동이었다.
성평등과 양성평등 용어가 마치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정확하게는 차별선동 진영)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그룹 사이의 의견 차이이므로, 정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으니, 중재자로서 사회적 합의의 부재를 고려하여야 한다면서 기존 용어인 양성평등을 채택했다.
자 역시 여기서도, 정부는 차별적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 정책과 플랜을 전혀 가동하지 않고, 마치 중재자인것처럼 물러나서, 오히려 기존의 차별적인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그 책임 역시 정부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두 집단(페미니즘과 차별선동 세력)의 이익 충돌 때문이라고 전도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이미 무수한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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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엮음, 권김현영, 루인, 류진희, 정희진, 한채윤, (도란스 기획 총서 1권) 교양인,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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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는 글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일까?>
이 책은 양성 평등 담론이 여성의 젠더 이해(gender interest)를 반영하지 못하는 관념론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반격(backlash)를 부르는 남성중심적 논리라고 주장한다. (9)
-필자들은 이 책에서 다루는 당대 한국 사회의 이슈가 기존의 양성평등 패러다임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보고, 양성평등적 사유의 궤도 안팎을 넘나들며 다른 인식론적 도구를 동원하여(예를 들어 탈식민주의), 기존의 논쟁 구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필자들은 정체성의 정치, (남성 중심의) 평등, 여성의 사회진출을 넘어 사회 정의로서 여성주의를 추구한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사유이다.(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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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2016년 기획된 것은 현 정부의 성차별 대응 정책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정희진)>을 가능하게 하는 페미니즘 정책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박근혜 정부의 정책 기조인 <양성평등 정책>을 반복하려는 방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현 정부는 그때도 지금도 양성평등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여기 어디에도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들어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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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사태는 그러니까 단 한번도 페미니즘 정책을,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제안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는 정부와 그 책임자들이,
자신들이 마치 페미니즘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는 어이없고 염치없는 상황인 것이고.
이를 정당화해주는 지식인들은 시종일관, 이 정부가 페미니즘 정책도 아닌, 박근혜 정부의 <양성평등정책>을 반복하도록, 페미니즘의 새로운 비전 자체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그 지식인들의 방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 양성평등 정책 기관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일, 해야 하는 일은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 기조를 비판하면서, 페미니즘 교육의 의미를 먼저-다시 설명해야 하는 기이한 딜레마에 처한다. 양평원의 강좌 역시 그런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즉 페미니즘 교육이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거나 앞서 말한 이른바 양성평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논의를 먼저해야, 교육이 시작될 수 있는 그런 딜레마 말이다.)
이는 이른바 차별비판 교육에 있어서 교육을 비롯한 모든 지점에서 반복되고 있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