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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몸, 개척자, 장인의 테크네

alice11 2023. 8. 9. 12:24
태풍이 오고 있는 수요일입니다.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과 공동으로 국제학술회의와 간담회, 인터뷰 등을 진행했습니다.
매일 39도에서 40를 오가는 날씨는, 진정 처음 경험해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모든 일정을 실내에서 진행하고 조심 또 조심을 했지만, 결국은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열이 39도가 넘어서 처음엔 열병인줄 알았는데. 새벽에 병원에 가서야 코로나로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조심했는데 코로나를 일본에서 앓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네요.
코로나 회복을 위해 집에 머무느라, 덕분에 미뤄두었던 드라마와 영화를 몰아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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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휴식에서 돌아온 보고와 오늘 서평회 안내를 겸해서 간단한 드라마 감상평을 올려봅니다.
오늘 이야기드릴 영화는 <어웨이크>(2020)입니다. 한국에는 2022년 개봉되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일본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작품이 흥행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만든건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멀티플렉스가 있는 한국과 극장을 거의 찾기 어려운 일본에서 영화와 문화 산업 자체의 역학을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웨이크>(2020)에 대한 반응은 논의하기가 어렵고 영화에서 AI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흥미롭고, 한국과 비교할 부분이 많아서 조금 메모를 남겨둡니다. 
 
<어웨이크>는 AI를 활용한 장기 소프트웨어의 이름입니다. 영화는 실제로 2015년 이뤄졌던 장기 電王戰(전왕전) 파이널 제 5국 아쿠츠 치카라와 어웨이크 전에서 착안한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장기 전왕전은 2017년까지 이어졌지만, 17년을 마지막으로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영화는 전한다. 
 
한국에서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2016년 3월에 진행되었던 걸 비교해보면 그 역사적 상황을 판단하기 쉽겠다. 장기 전왕전도 이세돌 알파고 대국과 비슷한 "AI가 이기면 인간 장기 기사는 다 사라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세기적 대결" 등의 엄청난 이슈를 몰고 다녔다고 한다. 
 
한국에서 AI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전략적 스페터클이 바로 이세돌 알파고 대국이기도 했다. 이 대국이 만든 스페타클이 여전히 한국을 사로잡고 있다고도 보인다. 
 
 
 
 
 
 <어웨이크>에서 AI는 장기 프로 기사를 꿈꾸었던 프로그램 개발자 에이이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AI가 인간의 행위성이나 인간 신체의 물질성과 분리된 '순수한 독립적인 테크놀로지'로 탈신체화되어 온 방식과 대조적이다. 
 
 
에이이치는 라이벌 리쿠에게 패배해서 프로기사의 길을 접게 되지만 AI를 활용한 장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다시 리쿠와 숙명적 대결을 하게 된다. 여기서 "AI"는 "강해지고 싶다"는 에이이치와 리쿠 등 장기 기사들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는 테크네이다. 
 
 
영화는 장기 영화이면서 동시에 AI 개발에 관한 이야기이다. 리쿠는 고전적인 장기 기사의 길을, 에이이치는 AI 장기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길을 걸어가는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AI 프로그램 개발은, 유년기부터 장기밖에 모르던 장기 천재 에이이치의 집념의 천재성의 연장에 있다. 아버지의 영향과 천재성에 기반한 독학으로 장기 천재가 되었듯이, 에이이치는 선배의 도움과 천재적인 독학으로 AI 장기 소프트웨어 개발에 성공한다. 
 
고전적 장인 기술자(장기 기사)와 AI 프로그램 개발자 사이에는 단절과 갭이 없이 천재성, 몰두, 독학, 개발, 개척 정신으로 테크네를 생성하고 전수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영화 <어웨이크>는 그래서 AI 에 대한 열광도 공포도 없이 기존의 장인 서사와 대학 동아리방, 벤처 개발실, 장기회관, 독학자의 골방 속에 AI를 출현시킨다. 대학 동아리방에서 개발에 몰두하는 에이이치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는 전형적이다.
 
 
 
 
 
 
 
 
 
 
한국에서 AI는 교육, 정책, 미디어 모두를 점령했으나, 이러한 형태의 신체성, 일상성, 역사성과 삶과의 밀착성 자체가 없다. 한국에서 AI는 어디선가 만들어져서 우리가 빨리 따라잡아야만 할 대상이고 모든 곳에 AI의 스펙타클만이 넘쳐날 뿐 그곳 어디에도 사용자나 관객이 아닌, 수행자로서의 자리가 없다. 
 
이건 과학 기술과 삶의 일상성의 관계, 서사, 역사와도 관련이 깊고, 테크네에 대한 인식, 정서, 서사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든다. 
 
<어웨이크>에서 천재 장기 기사이자 AI 프로그램 개발자 역할을 맡은 요시자와 료는 <어웨이크> 바로 전에 유명한 아침 드라마 <나츠 소라>에서 천재 화가 역할을 맡았다. 화가라기보다 정확하게는 '개척자로서 화가'라 하겠다. 
 
 
 
 
드라마 <나츠 소라>는 <아마짱> 이후 새로운 흥행과 트렌드를 만들고 있는 대표작품이다. 이 드라마도 참으로 할 말이 많은 드라마다. 전쟁 고아이자 부랑아인 나츠 형제들의 일대기이자, 정부에 의해 홋카이도에 이주해서 '개척단 1세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물론 드라마 어디에서도 선주민인 아이누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요시자와 료는 이 드라마에서 정말 아무 것도 없이 맨 주먹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 개척자로 살아가는 청년 텐요의 짧은 삶을 연기했다. 텐요가 신체의 모든 힘을 소진해서 죽게 되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텐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여성 주인공 나츠가 일본 최초의 여성 애니메이터로 설정되어서 큰 화제가 되었지만, 텐요가 죽고 홋카이도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엄청난 항의가 폭발했다고도 한다. 텐요가 자기가 맨 손으로 일군 밭에서 죽음을 맞는 장면은 너무나 압권이었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예술가, 예능인(개그맨), 언더그라운드 연극인 등이 어려 형태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이들의 역사를 서사화하는 작품도 상당히 많아서 흥미롭다. 이런 서사 전통 자체가 없는 한국 문화 산업과도 비교할 점이 많다. 
 
논의할 여러 지점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들이 일종의 '개척자'로서 자기만의 테크네를 개발해온 장인으로서 다뤄지고 해석되는 독특한 전통이 이런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개척자, 테크네를 개발하는 장인으로서 예술가, 언더그라운드 연극인 등이 장기 기사, 요리인, 장인과 과학자 등 모든 분야로 확대되고 그 경계가 예술과 과학으로 나눠지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또한 이런 개척자 서사와 이들을 개척자로 해석하는 전통이 내셔널 파이어니어(National Pioneer)로 이들을 모두 수렴해버릴 가능성 또한 항시적으로 공존한다. 
 
개척자이자, 장인, 독학자이자 테크네 개발자로서의 신체의 연장인 AI가 <어웨이크>에서 천재적 남성 개척자의 몸과 분리되지 않는 것 또한 이런 전통과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