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alicewonderland

그런 지도 본문

연결신체이론/연결성

그런 지도

alice11 2021. 3. 29. 18:29

그런 지도도 만들어봐야지.

부산에 와서 처음 세미나를 할 때는 사람들이 내 연구실로 모이는 방식이었다. 세미나에서 연구모임 a, 아프콤이 되면서, 세미나를 학교에서 하지 않고, 부산의 여러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진행했다.

전혀 모르는 민언련 사무실에서도 꽤 세미나를 했고, 지금은 사라지거나 작은 회사가 된 대안인문학 공간들을 거의 다 찾아다녔다.

그리고는 중앙동.

꽤 오래 중앙동을 좋아했고 거기서 사람을 만나고 공부를 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는 게 큰 보람이었다. 중앙동 곳곳에 기억, 터, 이미지의 환을 펼쳐나아간 <환을 켜다>는 인문학 구조조정, 전시행정으로 일관하는 문화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아프콤이 난파하던 시절 그리고 페미니즘 동료들과 만나면서, 서면 주디스 앞 광장과 길바닥이 또다른 공간이 되었다.

중앙동에 이르렀던 발걸음은 Cultural Mapping Busan이라는 새로운 일자리와 연구, 교육, 재생산 그리고 동네를 결합한 아이디어의 방향을 만든 동력이었다.

이렇게 돌고돌다가

하단에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라거나, 사하구에 항상 따라붙는 <문화불모지> 같은 사하-서구의 특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방향은 부산지역의 혐오발화 연구를 하면서, 부산 내부의 지역에 따른 계급적 차이가 심각하며 부산 특유의 문제의 원천이라는 고민과도 맞닿게 되었다.

사하는 지역화폐 운동의 역사도 깊고, 상담소 네트워크도 조밀하다. 연구소가 하나는 소각되고 하나는 아직 없던 시절 아직 오지 않은 젠더어펙트 연구소를 꿈꾸며 시작했던 <젠더어펙트 스쿨>은 사하 지역 상담소 네트워크와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아가다가 <부산 수산가공선진화 단지>를 만났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부산에 준 1호 선물>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단지가 거의 비어있고 오거돈 전 시장은 <부산 대개조>를 외쳤다.

수산가공업이나 부산의 산업단지에 대해서 사실 전공과는 한참 먼 영역인데, 전혀 다른 길을 거쳐 이 지점에, 전혀 다른 시각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문득 되돌아보니, 그 발걸음 곳곳에서 교수님들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나와는 서있는 자리도, 걸음이 향하는 곳도 다른 건 당연한거고 내 길이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는 내 길을 갈 뿐.

꽤 오래 나름 조사하면서, 수산가공선진화 단지의 현재가 부산에서 지방정부, 중앙정부, 정권 개편의 역학이 만들어낸 부산의 모습의 전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로 기울어가는 부산 경제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중앙정부는 사실 대안도 없고, 선거때마다 만든 대안은 지속되지도 못한 채 방치되었다.

수산가공선진화 단지에서 핵심은 <선진화>였고, 거대한 부지를 산업단지로 재구성해서 업체들을 다 모아서 뭔가 그럴듯한 <혁신>을 가시화하려는 기획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지금도 하루에 몇억씩 오른다는 부산은 <동부산>이고, <서부산>은 낙후된 공단, 십년 넘게 하다말다를 반복하는 도로 공사로 말 그대로 난장판, 공사판이다. <서부산> 개발은 선거마다 나오는 공약이지만, 택지개발과 강제철거로 이어지는 과정은 주민들의 강한 반대를 불러왔다. 박근혜가 만든 감천마을은 지금도 주민들의 비판 여론이 높고 지역주민 의견을 묵살한 도시재생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의 삶의 문제는 그저 민원이 되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수산가공선진화 단지는 업체들도 다 들어오지 않고 도대체 선진화는 어떻게 되는건가 일말의 기대를 품었으나, 공단만 크게 만들어놓고는 결국 몇년이 지나서 <수산가공업은 선진화가 안된다>는 오히려 산업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정권이 바뀌고는 여기는 지난 정부 다른 정당 사업이라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어차피 1년짜리 시장, 정책 대결은 나이브한 소리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자들의 말을 듣고 그냥 넘기기가 어렵다.

한국 어디나 그렇겠으나, 지방의 곳곳마다 무책임한 정치권이 삽질하다 파헤친채 내팽개쳐버린 현장이 하나둘이 아니다.

무슨 대단한 지식인의 역할을 고상하게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이런 판국에 적어도 학교라는, 정규직이라는 십년, 이십년 안정된 기반에서 무언가 기획을 하고 조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 대학 교수가 아무리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게 더이상 부끄러운 일도 아닌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나?

선거에 대해 무슨 점쟁이도 아닌데 예언이나 하고 있고, 자신들이 망쳐놓은 '민심'을 돌아볼 염치도 없으면서, 새삼 "대중의 욕망"이 어쩌구하며, 이제 책임을 질 희생양을 "대중"으로 돌리고 있다.

선거에 휘둘리지 않고, 선거로 인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이곳의 삶의 문제를 같이 살피고 미래를 만드는 게 그래도 교육이라는 걸 하는 사람들의 한줌의 도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