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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모리배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제국의 브로커들과 모리배 정동> 본문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 >>,한승동 옮김, 길, 2020
젠더어펙트 연구회에서는 지금 <<제국의 브로커들>>을 읽고 있습니다. 아래는 2024년 8월 14일 권명아 발제문 중 일부입니다.
제 5장 조선의 산업화
359쪽.
정착민 지도자들은 그들 정부의 동맹자로 처신했으며 그들과 유사한 실용주의적 행태를 보였던 조선 부르주아 엘리트들의 동반자였다. 지역의 상업회의소나 전국적인 산업운동을 통해 함께 일할 때, 조선의 자본가들은 일반적으로 일본인의 지도를 따랐다. 카터 에커트가 지적했듯이 다수의 조선인 사업가들, 특히 도쿄에 유학하고 "언어와 태도 심지어 일본인들의 성취 목표들까지"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아마도 식민주의자들 속에 있을 때가 자신의 동족들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다른 식민지 세계에서 관찰했듯이 계급은 종종 인종이나 민족보다 더 강력한 만남의 이념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정착민 지도자들이 조선의 엘리트들과 거듭된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발견했듯이 반식민민족주의 시대에 계급은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발제자의 비평
<모리배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제국의 브로커들과 모리배 정동>
권명아
우치다 준의 논의는 조선 내의 일본인 정착민들을 행위자로 도입함으로써 식민 국가 중심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연구를 더욱 복잡한 행위자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또 민족-인종 중심의 논의에서 민족과 인종의 복잡한 관계성, 또 자본 축적에서 식민 자본과 민족 자본으로만 구획되지 않는 자본과 축적의 행위자성, 이해관계의 복잡성을 해석에 도입한다.
행위자성이 복잡화된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해석 역시 매우 흥미롭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치다 준도 강조하듯이 일본인 정착민 부르주아들의 자본 축적을 위한 여러 행위들은 그것이 ‘조선을 위해서’라는 여러 수사를 동원해도 결국 일본인 정착민 부르주아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한 행위라는 것이 너무 뻔할 정도로 드러나 있었고, 당대 조선 공론장에서도 반복적으로 비판받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 정착민 부르주아들의 행위성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하고 거기로 귀결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오롯한 이익 추구 행위가 때로는 조선의 온건한 민족 부르주아지의 ‘조선민족 본위’에 담긴 방향성과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행위성, 즉 자본 축적과 오롯한 이해관계만을 위한 행위들이 우연적으로 특정한 정치정 행위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사례는 아니다. 물론 이러한 지점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서 복잡성을 도입한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치다 준은 특히 한국의 민족 자본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성론 사이의 여러 논쟁에 개입하는 한 방식으로 정착민 식민주의를 도입한다고 할 수 있다. 해서 조선의 일본인 정착민들과 그들의 협력자인 조선인들의 행위자성에서 계급과 민족의 얽힘의 복잡성, 우연성, 임의성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는 계급의 한계를 넘기는 어려웠다는 게 분석이 도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연구도 그 연구 대상이 놓여있는 연구사적 맥락에서 자유롭기 어렵기에 우치다 준의 논의 역시 앞서 논한 민족 자본, 식민지 산업화, 민족주의와 관련한 선행 연구의 틈새를 섬세하게 헤집고 비집고 들어간다. 이게 이 연구의 큰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하다. 식민 권력과 식민주의, 제국주의를 둘러싼 행위자성의 복잡화를 시도한 이 연구에서 계급과 민족 사이의 복잡성은 계속 강조되지만 막상 주요한 논의 대상은 부르주아 남성 집단이다.(이는 일본인 정착민과 조선인 협력자를 묶는 큰 동료적 관계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 연구에서 젠더는 기존 연구가 그러하듯이 부록으로 수록되어서 책의 말미를 장식한다. 제국의 브로커들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시기는 1920년대인데 그것은 기존의 식민지 조선의 산업화가 주로 1930년대, 전시동원을 위한 맥락에서 시작되었다는 논의를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대의 역사상 속에서 계급과 민족의 복잡한 뒤얽힘 속에서 젠더는 부재하고 그림자로도 작동하지 않는데, 막상 1930년대 교화기구와 관련한 논의에서 잠시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 부재하던 ‘여성’이라는 ‘기호’를 1930년대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건 전시동원체제의 동원 정책의 젠더화된 지표들 때문이다. 총후부인, 현모양처라는 익숙하고 낯익고 뻔한 당대의 지표말고는 우치다 준의 식민 권력의 복잡성에 대한 논의에서 젠더는 어떤 역사적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논의가 식민 지배의 역사적 과정과 국면과 맥락을 사상한 채, 그저 ‘위안부 문제’로 다뤄지는 방식 또한 바로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의 결과이기도 하다. 위안부 동원이 마치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젠더 정치의 파국적 등장처럼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 말이다. 젠더 개념이 잠시 등장하는 7장에서조차 관련한 선행 연구가 영어권 연구인 시어도어 유준의 연구가 전부인 것도 그래서 참으로 징후적이다. 이와 비교해서 앞서의 민족과 계급에 대한 논의에는 아주 세세한 선행 연구조차도 각주에서 그 결과 맥락, 자신의 연구와의 관련을 적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도 징후적이다.
하여간 이런 전제 하에서 우치다 준이 논하는 제국의 브로커들의 특정한 ‘비정치적 정치 행위성’ 혹은 정치에 ‘비정치적인 것과 준 정치적인 것을 도입하는 방식’과 모든 것을 자기 집단의 이해관계로 환원하여 오롯이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동원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은 해방 후 담론적 형태를 얻게 된 “모리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모리배”는 이른바 해방기 1945~1948년 사이 급격하게 부상한 특정한 존재 형태인데, 특히 이들은 주권, 정치적인 것과 이에 반하는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었고, 많은 부분 이들의 이해추구 행위가 ‘적산’ 즉 일본인 정착민들이 남기고 간 자산을 둘러싼 행위자성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즉 해방기 공론장에서는 많은 부분 ‘적산’을 차지하려는 행위자성이 일제 잔재라는 의식/무의식이 지배적이었는데 이 잔재는 바로 일본인 정착민의 자산 축적 행위 그 자체가 ‘모리배’ 행위였다는 인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모리배’를 단지 일본의 식민 국가가 사라진 후 등장한 ‘무국가적 상태’의 혼란의 산물로 보는 해석은 역사적 연속성보다 단절을 강조하는 방식에 가깝다고도 보인다.
모리배 정동의 가장 큰 특징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담론과 재현에서 규정된 방식이기도 하다. 모리배 행위는 ‘반민족적인 것’이라고 언표되었으나 그 근저에 이르는 것은 주권 상실에 대한 수치와 주권 회복을 향한 열망이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는 정치적인 것의 부재가 이른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용어로 규정된 것이기도 했다. 역사 수정주의가 이를 ‘자학사관’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정동 정치라 하겠다.
즉 주권의 부재와 상실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당당하게 받아들이라는 요청이기도 한데 이는 정착민 식민자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언어와 태도 심지어 일본인들의 성취 목표들까지"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바로 그 신체화된 상태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없이는 해석되기 어렵다. 이는 의식이 아니라 특정한 정동인데 “이들은 아마도 식민주의자들 속에 있을 때가 자신의 동족들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치다 준도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인 정착민 부르주아와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은 자신들이 항상 ‘민족적/지역적’ 이익을 위해서(조선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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