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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 일기/지방대 교수의 하루

"먹고 사는 게 전쟁이예요!"

alice11 2023. 3. 7. 13:16
"먹고 사는 게 전쟁이예요!"
주말 학교는 적막하다. 그래서 주말에 학교에 나와 있기를 좋아한다. 적막한 학교에서, 기이하지만 비로소 이곳에 대한 애착이 샘솟는다.
그건 아마 사람 없는, 비시즌의 평일, 해운대에서
비로소 해운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발견하는 일과 유사한 것 같다.
경험으로 미뤄볼 때 하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17년 정도를 지낸 터니까.
정신승리인가 어찌 되었든 이곳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
하단에 정을 붙이게 된 매개 중 으뜸은 동네 단골 가게들이다.
그 가게들도 계속 사라지고 있지만.
오늘 동네 산책을 하다보니 <너랑 나랑>이 없어졌다.
동아대 승학 캠퍼스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던 분식집이었다.
몇달 전인가 갔을 때 사장님이 서울로 검사받으러 가신다는 말씀을 얼핏 들었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비슷한 형태의 분식집이 그 자리를 이어간다.
정말 오래 다니던 중국집 <향림>도 사장님 건강 때문에 문을 닫은 지도 오래.
하단의 명물이었던 <툴라>는 요즘은 운주사 지점이 잘되어서 주로 그곳에 계신다.
<범전 어묵>의 국수, 김밥, 비빔밥, 오뎅은 꽤 긴 시간 나의 주식이었고, 가게가 잘 되니까 어느 날 집주인이 어마어마한 집세 인상을 요구해서, 정말 하루 아침에 이사를 가시게 되었다.
매일 가다시피 했지만, 가끔 빠지기도 했던 터.
가게를 간 날이 마지막 날이라 주인 내외 분이 정말 슬퍼하시면서 상황을 전해주셨다. 어디로 옮기실 건지 여쭈었지만, 이번에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이제 가게는 그만할까 하신다고 했다.
2007년 동아대에 취직했을 때
이른바 <사수 교수님>께서 데려가주셨던 보리밥집.
싸고 맛있고 반찬도 많이 주셔서 점심 시간에는 자리가 없었다.
코로나 때 한창 못 갔는데
오늘 오랜만에 들렀다.
텅빈 가게에서 사장님이
"이제 더이상 좋아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체념조로 말씀하셨다.
"먹고 사는 게 전쟁이예요."라던 사장님 말씀이 귀에 선하다.
그래도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테이블에 손님이 들어와서
나가는 길 인사해주시는 사장님 목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간 듯했다.
7000원에 보리밥 비빔밥에 된장찌개, 고등어 조림, 물김치, 겉절이 김치를 주시는 데 이래서 뭐가 남나 모르겠다.
사장님이 신평에서 가게 하셨던 때부터 아셨다는 손님과, 그 손님을 '여기가 맛있다'고 데려오신 손님. (그러니까 여기 오셔서 사장님이 신평서 가게 하실 때 아시던 분이라는 걸 발견...옛날 이야기 듣는 재미가 있다.)
이 가게가 이전에는 육교가 있어서 잘 안보였다고 하시던데.
육교는 17년 전에 없어졌나?
그런 것 같다.
저녁에는 역시 오랜만에 추어탕집 사장님께 인사 드릴 겸 가야겠다.
오래 계시던 이모님도 편찮으셔서 안 나오신지 좀 되었는데.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단골인 투맨커피에서 커피, 레몬청을 잔뜩 사고.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카푸치노를 마시며
동네 단골 가게들이
잘 버텨주시길.
그래서 나도 하단에 정 붙이고
즐거운 주말을 계속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