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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 Abdel-Fadil, AFFECTIVE WITNESSING OF THE HIJAB : A Self-Inflicted Trauma/Charlie Yi Zhang, SPECULATIVE MATTERING: Affect and the Stone that Becomes Valuable in deep Time 본문

젠더어펙트연구회세미나

Mona Abdel-Fadil, AFFECTIVE WITNESSING OF THE HIJAB : A Self-Inflicted Trauma/Charlie Yi Zhang, SPECULATIVE MATTERING: Affect and the Stone that Becomes Valuable in deep Time

alice11 2024. 1. 26. 17:29
2023년 1월 24일 젠더어펙트 연구회 세미나 후기
유인혁 번역
Mona Abdel-Fadil, AFFECTIVE WITNESSING OF THE HIJAB : A Self-Inflicted Trauma
모나 압델 파딜의 <히잡에 대한 정동적 목격: 자해적 트라우마>

 

권명아 번역

Charlie Yi Zhang, SPECULATIVE MATTERING: Affect and the Stone that Becomes Valuable in deep Time
찰리 이 장, <어림잡아야하는 문제(화): 시간의 심연 속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되어가는 돌과 어펙트>
이렇게 두 편의 논문을 번역 강독했습니다.
1. SPECULATIVE MATTERING

 

먼저 SPECULATIVE MATTERING은 캐런 바라드와 해러웨이 개념을 통해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 개념이지만 번역하기가 어려움.
SPECULATIVE를 사변적이라고도 번역하지만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이 글에서는 SPECULATIVE는 "불확실한, 투기적인, 어림잡은"의 의미로 사용됨. 즉 '옥석'을 둘러싼 정동 경제와 그 투기적 성격을 설명하는 개념임. 
 
아주 재미있고 '명민한' 글이었는데. 다들 <<세계 끝의 버섯>>을 연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라고 평함. 
 
젠더어펙트 연구에서 '글쓰기'가 새로운 방법론이 된다고 라라 알리를 비롯 많은 연구자들이 논하는 데 그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글쓰기를 잘 보여주는 연구이기도.
 
또한 speculative를 가늠하는, 기존의 확정적이고 완결적 지식 생산과는 다른 지식 생성 방법으로 라라 알리는 기존 연구를 정리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2. 
 
정동적 목격과 자해적 고통(유인혁 번역)
 
현대 서유럽에서, 히잡은 더 이상 머나먼 신비한 사막의  '이슬람 국가'와 여성 억압에 대한 사회적 상상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서구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히잡은 이제 아주 가까이에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특정한 사회적 행위자들은, 단지 히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적 자극을 받는다.히잡은 정동으로 가득 채워진 끈적끈적한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스크린과 거리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키보드를 붙잡고 항의한다.
(그들은) 공공장소에 히잡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당황하고, 분노하고, 자극받는다.

 

중략

그런데 여기서 정동적 목격자들은 '머나먼 무슬림 타자'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느낀다'

그 결과, 무슬림 여성들은 '무슬림 여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히잡을 정동적으로 목격함으로써 자기촉발적이며 자해적인 트라우마를 입게되는 저 백인 구원자들을 지키기 위해 히잡을 쓰면 안 된다. 

여기서 진정한 피해자는 지금 여기에서 히잡을 목격하는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그러한 정동적 목격의 커뮤니티라 할 수 있다.

 

즉, 현재 서유럽에서 히잡에 대한 발작적 증오는 여러 단계를 지나서, 히잡을 보는 것만으로도(목격) 트라우마를 일으켜 발작적이고 자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새로운 백인 피해자(진정한 피해자)를 만들고, 바로 이 진정한 피해자를 위해서 이슬람 여성은 히잡을 써서는 안된다는 증오의 정동정치가 형성. 

 

텔레비전에 히잡을 쓴 이슬람 여성이 나오는 걸 보는 것이 멀리 떨어진 유럽과 북미의 안방의 백인 시청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그들은 그렇게 "히잡을 목격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진정한 피해자"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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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흥미롭고, 이 논의를 히잡과 관련한 식민주의, 히잡 여성의 행위자성 부정 단계 등을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이들이 이제 정동적 목격과 자해적 고통이라는 새로운 정동 정치로 변용되는 과정을 너무 잘 분석해줌. 

 

세미나 하면서 여기서 논하는 히잡에 대한 정동적 목격과 자해적 트라우마 관련해서 논해볼 수 있는 가장 유사한 사례는 일본에서 치마저고리라는 데 의견의 일치. 특히 이번에 일본에서 치마저고리에 대한 증오행동주의를 연구한 박사논문을 쓰신 김여경 선생님이 어려모로 의견을 제시해주심.

 

또 다르긴 하지만, 숏컷에 대한 발작, 특정 엠블램(손가락)에 대한 발작과 자해적 고통 호소, 트랜스젠더 목격에 대한 자해적 고통을 호소하는 방식(그래서 이런 논의를 단지 안전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해적 고통을 호소하는 새로운 정동 정치와 증오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등 다양한 토론이 이어졌다. 

 

압델 파딜은 히잡이 <엠블럼으로, 이 엠블럼에 들러붙는 끈적끈적한 정동을 촉발한다고 분석함) 즉 엠블럼으로서 히잡...그런 점에서 손가락 역시 일종의 특정 엠블럼에 들러붙는 정동 정치의 독특성으로 분석할 필요)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레오칭 책에서도 그런 언급을 발견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정대협이 할머니들 끌고 다니면서 증언하는 걸 목격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는 어떤 호소들의 역사도 이런 맥락에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호소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체로 역겹다, 진저리난다, 가증스럽다 등 복합적 정동을 호소하곤 했다. 사실 이런 호소를 하는 분들이 평생 정대협이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주하는 건 딱 1번이거나 그 이하, 레오칭도 그렇듯이.
이런 정동적 목격성(실제로 만나지 않고 원격이나 이미지나 정보를 듣는 것만으로도 목격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식의)과 증오정치의 관련성이 흥미롭다.
이게 자이니치, 여성과 관련한 증오정치의 변용 과정의 하나라고도 생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