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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실과 애도 불가능성> 본문

연결신체이론/연결성

<어떤 상실과 애도 불가능성>

alice11 2024. 9. 30. 14:51

 
요즘 본방 사수로 보고 있는 일본 드라마 <바다의 시작>이다. 아무 정보없이 일본 드라마 채널에서 시작한 걸 보고 있는데.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는 많은 걸 남긴다. 찾아보니 역시 드라마 <사일런트> 팀의 작품이다.
 
 
<사일런트>로 배우 메구로 렌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다른 드라마에서는 너무나 전형적인 남성성을 체현한 인물만 반복하던데, 다시 <바다의 시작>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서 신기했는데 역시나 <사일런트> 각본가와 연출의 힘이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데(이른바 이미지 변신) 언제나 그 드라마의 그 사람이 되는, 놀라운 배우 아리무라 카스미....이번 드라마 역시 아리무라 카스미가 맡은 "모모세 야요이" "야요이 상"은 너무나 평범한데 그저 "야요이 상"의 이야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냈다.
 
 
드라마 제목인 <우미노 하지마리>는 '우미' 극중 미즈키의 딸이자 나츠의 딸의 이름이고, 바다의 우미(둘의 사랑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낳기의 우미   [生み·産み]'이기도 하다.
 
 
아직 드라마는 한창 방송 중이라 어떤 길로 나아갈 지 모르겠다.
 
아이를 낳는 일과 키우는 일의 고단함, 불안, 책임, 돌봄의 나눔과 나눔의 불가능성 등을 너무나 세세하게 다루어서 정리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 '계몽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 계몽성은 음성 언어 중심 드라마로 농인의 세계를 다룬 <사일런트>의 의미와 한계와도 유사한 그런 의미와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만 정리하기에는 <사일런트>도 <우미노 하지마리>도 여러 울림을 남긴다.
 
 
무엇보다 <우미노 하지마리>에서 야요이 상의 삶 자체가 참으로 많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야요이와 미츠키 사이의 우연한 만남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야요이의 미츠키에 대한 기이한 상실감 혹은 자책은 무엇일까 생각거리를 남겼다.
 
 
야요이는 미츠키를 사실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으며, 이미 병으로 세상을 뜬 이후 미츠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미의 존재를 알게 되어 엄마가 된다는, 혹은 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던 야요이는 우미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 버석거리는 정동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나츠와 헤어지고 우미의 엄마가 되지 않기로 한다.
 
 
그 이유는 드라마에서 더 많은 서사를 기다리고 있으나, "내가 누리는 기쁨과 엄마가 되는 행복이 누군가의 슬픔과 누군가가 누리지 못한 것을 대신 누리는 일"이라는, 어떤 점에서는 기이한 상실감과도 관련이 깊다.
 
 
야요이상은 미즈키의 죽음이나, 나츠와의 이별이나, 싱글맘으로서의 고된 삶에 대해 어떤 책임도 혹은 어떤 연루도 되어 있지 않지만, 야요이상은 자신이 미즈키의 이 모든 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벗어날 수 없는 감각을 갖고 있다.
 
이는 책임 같은 것과도 다른 어떤 감각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나츠가 '책임의 가부장'을 체현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나츠는 모든 '무책임한 남성성'으로부터 책임의 이름으로 나아가려는 중이다. 이 무책임한 남성성은 나츠의 아버지를 대표로 하면서, 야요이의 전 연인과 무엇보다 '동의'라는 허울 뒤에 숨어 낙태와 낳기와 관련한 모든 것을 여성에게 전가한 나츠 자신을 포함한다.
 
 
한편 야요이 상은 드라마에서 '나를 선택하기로 했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선택은 선택의 불가능성을 뜻하기도 한다.
야요이상에게 미즈키는 애도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그녀의 상실감이나 슬픔, 혹은 형언할 수 없는 연루의 정동은 미즈키의 친구나 가족에게 '기분 나쁜 일'이나 '주제넘은 일'로 여겨진다.
 
이건 야요이상에게 낙태의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다. 야요이상에게 낙태의 트라우마는 생명의 존엄함이라거나 그런 논의로 환원불가능한 경험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생명의 존엄함, 모성의 건강 등등의 모든 논의가 이 환원불가능성을 어떻게 가부장적 권력으로 환원하는 지 드라마는 너무나 정교하게 보여준다. 이 환원불가능한 경험은 또한 애도불가능한 어떤 상실에서 축발되는 어떤 헤어나올 수 없는 정동이기도 했다.
 
 
물론 이 드라마는 이른바 정상 가족의 돌봄을 중심 축으로 그려내기에 낙태와 싱글맘에 대한 서사도 이런 정상 가족의 이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부분도 존재한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다소 배면화되었으나) 미즈키가 싱글맘이던 삶의 시절 우미를 돌보던 돌봄 공동체, 주로 직장 동료로 구성된 이들이, 미즈키가 죽자 혈연 가족에게 관계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드라마는 과연 돌봄 공동체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를 질문하게 하기도 한다.
 
야요이 상이 나츠와 우미로 구축된 가족이 되기를 포기하고, 우미의 친구로 남기로 한 선택은 그런 연장에 있는 것 같다. 아직은 진행중이고 언제고 정상가족 모델의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으나,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야요이 상"은 그러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싶기보다는, 어떤 상실과 애도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