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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 일기/자유인

느닷없는 자유인

alice11 2020. 10. 2. 14:02

느닷없이 나훈아 붐이 일어서 흥미롭게 보며 드는 생각을 적어봄.

 

궁금: 아니 사람들은 이 연휴에 나훈아 쇼하는 걸 도대체 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여간 본방은 하는지 몰라서 못보고, 다시보기는 아예 없어서

 

1. 다시보기 없는 KBS 본방 사수의 전략: '진부함'을 몰입도로 전환

(참 흥미롭고 영리한 계약, 다시보기 없는 단 한번의 본방을 조건으로 했다는 게 이번 나훈아 쇼의 전체적인 전략을 잘 보여줌) 유투브로 조각조각 보아서, 본방 본 자들의 열기나 몰입도를 경험하지 못한 건 아쉬움. 그 몰입도를 경험하고 분석해야 제 맛이었을터이고, 또 그런 계산 조차도 포함된 마케팅 전략이 흥미로움. 무한재생 SNS를 원천 봉쇄하고, KBS 본방 사수를 유일한 매개로 만든 전략. 세대 공략과 미디어 전략, 노출 전략, 비평과 순환에 대한 전략을 다 계산한 방식이 진부함 자체를 훌륭한 마케팅 포인트로 전환함. 

 

2. 배타고, 기차 타고 돌아온: 2020의 가요무대

가요무대 지킴이였던 김동건 아나를 부각. 가요무대로 상징되는 시대에 대한 향수와 세대를 공략. 나도 아버지 생각에 사로잡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근데 흥미로운 건 나의 sns 탐라도 그렇고 가요무대 세대가 아닌 이들도 새삼 '테스형'에 열광했다는 게 좀 재미있음. 

배와 기차를 무대에 올려놓는 스케일(혹은 그 진부함^^)은 KBS쇼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나훈아는 쇼 시작부터 KBS가 거듭날 것이라고 멘트를 해서, 이 전략 자체를 명시적으로 만듦.

이 '국영쇼'의 스펙타클이 상당히 북한의 총체극적 무대랑 닮아서 흥미로운데, 이건 '국영쇼'의 특질과 함께 '산업자본주의 국영 스페타클의 미학' 같은 게 있다는 생각. 배와 기차를 무대에 올리고, 대규모 군중들의 합창과 군무를 반복하고 남성 영웅 히어로와 여성화된 군중의 무대.

 

3. 기생오라비 목소리와 소도둑놈의 몸

나훈아는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빼고 논할 수 없는데, 당시 남진이 '서구적' 의미로(엘비스프레슬리 모방^^) 어필한 반면 나훈아는 '소도둑놈' 같은 향토 마초로 어필함. 물론 호남과 영남으로 대립적으로 자리를 잡은 양자 구도의 긴 역사 없이 이 둘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2020년 나훈아에게 이 지역주의의 흔적이 어떻게 작동하나는 느닷없는 자유인 파트에서...

아버지는 나훈아만 나오면 항상 소도둑놈이라고 싫어하셨는데, 목소리는 기생오라비 같다며 질색하시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훈아 노래에 열광하셨다. 남진이 지금도 강한 남성성의 상징으로, 전립선 광고의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면, 나훈아는 김지미와의 스캔들 등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몇년전의 성기 관련 스캐들처럼. 퍼포먼스 속의 나훈아는 극도의 남성적인 성적 어필과 거기 맞지 않는 여성적 목소리, 몸짓(이번 쇼에서도 어깨짓과 독특한 제스처들은 머나먼 국극의 시대를 연상시키기도)은 흥미롭다. 나훈아 노래 속의 주인공은 <명자>처럼 1절에서는 여성 2절에서는 남성으로 몸을 바꾸는 일이 '자연스럽다'. 이건 그가 마초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 퍼포먼스가 공연성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이동하는 게 어떤 관습이 되었던 국극, 거기 맞닿은 '딴따라 무대(가요, 뽕짝, 극장쇼)'와 관련이 깊어서인 것 같다. 

 

배호와 같은 몸부터 목소리까지 철저하게 남성적 신체성을 상연하는 퍼포먼서와 좀 다르지만, 가요의 '남성성'은 사실 간드러진 목소리, 꺽기, 애절함, 뿌리뽑힌 존재로서의 취약함 등을 정조와 신체성으로 이어내려오고, 최근의 '안동역'의 진성 역시 간드러진 목소리의 계보를 이어받는다. 그러고 보면, 기존 이른바 '전통 가요'는 퍼포먼서의 신체성이 근본적으로 혼종적이어서 남성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해뜰날의 송대관이나 '옥경이'의 태진아는 가부장적 남성성을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뽕짝 퍼포먼스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배타적으로 구획한 것 같다.(이들이 80년대와 90년대 가요 시장의 상징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그런면에서심수봉이나 주현미는 여성적 뽕짝 퍼포먼스로 할당된 것이기도 한데 심수봉은 정치적 의미가 항상 따라오고, 주현미는 인종적 소수자성이 이런 단일한 배치와 마찰을 일으켰고, 가요 시장에서 사라져야 했던 '불운의 역사'를 공통적으로 갖게 된다. 같은 시대 뽕짝 가수들이 걸어온 이력조차 성별화된 행로를 보여준다. 

 

<미스터트롯>의 젠더 경계를 뒤섞는 퍼포먼스는 그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현인, 나훈아로 이어지는 어떤 역사와 맞닿아 있고, 한편으로는 태진아 송대관 시대애서 끊겨버린 혼종적 신체성의 퍼포먼스의 역사를 현재화해서, 익숙함과 새로움을 모두 상연하는 데 성공. 미스터트롯과 진성의 부상이 연결된 건 우연이 아님. 

 

나훈아의 퍼포먼스가 남성성에 대한 향수와 열광인 건 맞지만, 그 남성 신체성과 여성 신체성을 넘나드는 퍼포먼스의 역사와 성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었음. 그리고 이게 역셜적이지만, 산업화시대에 대한 향수, 혹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여기는 어떤 기이한 자의식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임. 

 

4. 느닷없는 자유인. 

나훈아 쇼를 보고, <몰운대 일기>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 하위 폴더로 <자유인>을 만들었다. 나훈아에 대해서 쓸 말이 많아서가 아니고, 생각할 게 많은 '자유인'에 대해 계속 써보고 싶어서. 블로그를 거의 닫았고 앞으로도 얼마나 여기 에너지를 투여할지 모르겠으나, 간단한 말을 적는 메모장으로 이어가고 싶다. 

 

나훈아는 자신이 자유인이라면서, 지난 십년 전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또 언론이 자신에 대해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대해 강도 높게 자주 냉소를 보냈다. 이번 나훈아 쇼에 열광하는 이들의 감탄은 70대 가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열정과 가수로서의 탁월함에 바쳐진 것 같다.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칭하는 나훈아의 자의식은 딴따라"평생 직업은 가수 하나뿐이었다."로서 살아온 세월에 대한 프라이드와도 맥락이 닿는다. 또 전립선 광고 모델로 남성성을 뿜뿜 뽐내고, 가수협회 회장에 미스트롯의 마스터로도 활약한 남진의 인생과 아주 다른 인생 행로(협회 같은 제도 권력에서 '자유롭고', '방송 출연을 멀리해서 언론 권력에서도 '자유롭고', 광고로 남성성을 팔기에 급급한 남진과도 다른 돈에서도 '자유롭다'는 자의식 혹은 대비는 충분히 인정할만하다. 한국에서 남성 가수로서 이 정도의 '자유인'이 흔치 않기에 공연으로만 만나는 딴따라로 늙어가는 남성을 만난다는 건 매우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래서 이런 열광을 모두 마초에 대한 열광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나훈아 쇼가 다시보기 없는 본방 사수 같이 이미 계산된 여러 전략의 산물이겠으나, 관객의 열광을 모두 그 전략으로 환원할 수 없고, 퍼포먼서의 마초성과 관객의 열광을 동일시하는 것도 좀 무의미하다. 물론 '테스형'을 환호하는 '해이한 남성성의 표출(^^)'까지 참아줄 필요는 없겠다. 

 

내 탐라의 내 또래 전후의 사람들(남녀를 막론하고)이 나훈아에 열광한 건 아마도 그 딴따라의 자유로움에 대한, 자유롭게 늙어가는 딴따라에 대한 존경과 애정 혹은 선망 같은 것이라고도 보인다. 우리 윗세대들이 '내가 좀 여유만 있었어도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듯이, 내 또래 전후의 지식인들은 대개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딴따라가 되었을거'라는 그런 어떤 공통의 결핍감 혹은 근거없는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나는 그것보다 '자유인' 나훈아, 다시보기 없는 KBS 본방 나훈아 쇼가 촉발시키고 강화할 어떤 정치적 연쇄반응에 관심이 간다. 그건 내가 아마도 매일 몰운대에서 그런 '자유인'들을 만나기 때문인 것 같다. 

 

젊었을때 그대로, 그저 자신이 살던대로 살 뿐, 정부(훈장거부)나 언론 그 어디에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정부나 언론이 다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자유인, '나도 그런 자유인이다'라고 깊이 공감하고 술잔을 홀로 외로이 기울였을 그 자유인들에 대해. 마스크를 쓰지 않고 꿋꿋하게 산을 오르고, 홀로 바닷가 절벽에서 옷을 다 벗어제치고 낚시에 몰두하며, 누가 뭐라든 당당하게 맨 얼굴을 드러내는 이들. 당당하지만 외롭고, 남들이 혐오할수록 아무도 내 인생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고립감에 사로잡히며, 평생을 바친 가족과 직장 어디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웅이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정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러하기에 자신이 이 세상 모두와 싸우는 영웅이자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그저 손가락질하고 혀를 차며 제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외우는 일이야말로 이들의 자유인으로서의 자의식만 더 강화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어떤 이들에 대해. 

 

한국의 가요의 역사는 그 출발에서부터 훼손되고 취약한 남성성과도 관련이 깊다. 물레방아 도는 고향을 떠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고지고 서울로 떠나는 고향역, 늙고 무기력한 부모를 남기고 고향역을 떠날 때의 그 절박하고도 자조적인 정조, 언제나 자신이 뿌리뽑힌, 정처없는, 부박한 존재라고, 고향을 상실한 존재라고 느끼는 정서, 그 취약함이 한국 남성성의 원천이듯이 말이다. 앞서 가요가 체현하는 혹은 나훈아가 체현하는 혼성적 신체성은 한편으로는(한편에서만^^) 이런 취약한 남성성이 항상 스스로를 여성화하는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평생 가요계 중심에 있던 나훈아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좀 느닷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본인은 평생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다고도 느꼈다. 나훈아의 이 내밀한 내면이 태극기 부대의 정치화된 '감정의 스페타클'과 매듭없이 연결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나훈아 쇼의 성공은 권력의 중심에서, 성별화된 권력 체제에서 가부장성의 상징이자 실제로 자리잡아온 어떤 이들이 아주 오래 스스로를 외롭고, 정처없고, 취약한 존재로 느껴온 그 역사와 현재형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스스로를 한번도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이자 실제라고 상상해 본적도 없고, 때때로 자주 스스로를 여성과 동일시해왔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그 '자유인', 누군가에게는 느닷없는 자유인들. 한국의 남성성은 왜 '자유인'이라는 자기의식과 밀착되어 있는지, 자유에는 왜 피냄새만이 아니라, 살냄새가 나는지. 

 

굉장한 살 냄새가 나는 공연이었다.

거기서 누군가는 고향의 냄새를, 누군가는 딴따라의 체취를 또 누군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마초의 그리운 체취를 흠뻑 느낀 그런 추석이었다.

 

나는 그 살 냄새가 너무 버거워서, 심수봉을 듣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