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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하나의 세계관일까 본문

혐오발화아카이브/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사용법

파시즘은 하나의 세계관일까

alice11 2022. 3. 27. 11:52

파시즘은 하나의 세계관일까

 

연구자들은 파시즘의 주요 특징을 "정치운동에 대응하는 독자적 사상이 없는 운동"(사상없는 정치 운동)이라고도 한다. 파시즘이 전체주의, 보수주의, 애국주의의 요소를 다 갖고 있지만 이들과도 다르다고 하는 이유. 또 파시즘이 이들 무엇과도 유사해보이는 이유다. 여러 논점이 있지만 탐라의 효율성을 위해 요점만 정리하자면.

 

근대 체제에서 '정치운동'(정치적인 것이 아니라)은 특정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보수주의가 급진 개혁을 주장할 수 없고, 애국주의가 실용이나 외교를 위해 '국익'을 뒤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사상이고 역사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형식적 평등이 은폐하고 제도와 이념으로 정당화해버린 '차별'에 저항하고, 차별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사상이자 실천이다. 그러니까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은 차별에 동의할 수 없고 그럴수도 없다. 그러니까 차별에 앞장서면서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대체로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는 파시즘 정치의 특성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를 페미니즘 대중화라고 규정하는 데 동의할 수 없고 비판해왔다. 이는 파시즘을 '대중'이나 대중의 욕망, 대중의 자발성 등으로 치환해왔던 오래된 논의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파시즘을 이끌었던 지식인, 엘리트의 책임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자기정당화 도구가 되었고, 이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더나아가 오늘날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에 대한 대안적 논의의 이행의 긴 과정을 바탕으로 해서도 페미니즘 정치나 이론이 '대중화'라는 규정을 여전히 해석적 범주로 사용하는 건 아쉽다. )

 

그래서 파시즘은 자기 내적인 사상이 없는 정치 운동이고, 그 운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모순적이거나 앞뒤가 안맞는 주장, 행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이게 역사적으로는 파시즘의 특징이고 파시즘의 발생 기반이었던 자본의 전지구화의 두번째 국면=신자유주의에서 다시 독특한 새로운 형식으로 전지구적으로 발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안티테제(무솔리니)" 로서 파시즘 정치와 적대를 강화하기 위해 무엇이든 동원하는 증오정치(hatepolitics)이다. 파시즘은 당대의 현존하는 지배적 사상과 정치 운동 모두에 대한 안티테제를 내세웠고, 초기 등장할 때 이들 운동이 해방적인 것으로 잠시 감각된 이유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것(그리고 사상과 이론과 실천)이 증오정치 비판에 집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즉 파시즘에 어떤 내적으로 일관된 사상이나 세계관을 도출해서 거기 반대하는 다른 가치나 이념을 제기하는 방향이 아니라, 파시즘 자체를 '인류'의 존립을 위해서 폐기되어야 할 정치 운동으로 비판하고 대항해온 이유. ('인류'를 주체로 설정하는 방식은 이후 다양한 논의로 이행함)

 

파시즘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반파시즘을 이에 대항하는 대립적 세계관으로 정립하는 건 그런 맥락에서는 파시즘의 증오정치를 '혐오' 정도로 이해해온 한국의 혐오 사용법의 어떤 파생물이라고도 보인다. 

 

이준석은 전형적인 파시즘 정치의 현재형이기도 하다. 이 탐라에서도 파시즘은 참 고생하는 개념 중 하나인데. 

이준석을 '합리적 보수'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의 주장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제기된 제안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이런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파시즘의 증오 정치는 혐오를 표현하는 것도 조장하는 것만도 아니다. 파시즘의 증오정치는 일관된 사상도 없이, 모순되고 때로는 대립적이기조차 한 주장들로(역차별당하는 이대남을 위한 공정 채용 정책은 실은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해서 실은 이대남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정책이다. 국토균형발전을 내세우는데 지역 균형이나 지역 할당은 하지 않겠다는 주장도 전형적이고, 협치를 내세우는데 우리는 우리끼리만 할 것이고, 공정 인사를 내세우지만 우리편을 뽑는게 정치적으로는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등) 적대를 강화하고 (이게 편가르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적대를 강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적대를 강화하는 건 결국 기득권의 이해를 강화하면서, 차별을 정당화하는,그간의 자본주의적 무한경쟁과 차별적 구조를 재편하면서 더욱 강화하는 방향을 취한다.

 

그래서 증오정치는 차별의 구조에서 비롯되고, 또 그 차별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선동에 기반한 정치 운동인 것이다.

 

증오정치 비판은 그런 점에서 바로 이러한 차별과 적대의 <구조>를 비판하고 이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대안적 구조를 창출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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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사례 연구

 

일본의 식민 지배 경험을 파시즘과 관련해서 연구하는 방법론은 역사학계에서는 잠시 등장했다가 단절되었다. 홍종욱 선생님도 방기중 선생님 전집에 관련해서 해석을 한 바 있다. 

 

1930년대 후반에서 패전까지 일본의 식민통치 정책을 다룰 때 이를 파시즘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게 '대중의 자발성'이나 욕망을 다룬다는 식으로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90년대 문학연구 '대중과 파시즘'에 중점을 둔 경향성들))

 

한편으로 역사학계에서는 30년대 후반 이후 통제의 억압성과 강제성의 증대에 초점을 두면서 통제 강화와 강제성을 규명하려는 연구에 상대적으로 더 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검열에 대해서도 검열의 강압성, 획일성, 통제 강화의 일관된 방향성을 추출해서 연구하는 게 억압의 강도를 논의하는 일반적 방향성이다. 

 

나의 경우는 파시즘 연구와 젠더 정치, 정동 연구를 바탕으로, 오히려 통제 방식의 비일관성, 모순성이 통제의 폭력성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고 해석했다. 

 

통제가 일관되지 않았다는 걸, 제국이 조선에 대해 강압적이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건 역사수정주의와도 관련되지만 파시즘 정치를 '일관된 체계'로 해석하려는 방법적 '무지'의 소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