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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렉스와 해피엔딩

alice11 2020. 1. 5. 15:56

칼럼을 쓰는 긴 시간 동안 페이스북에 젠더 비평 단상을 거의 매일 올리곤 했다.

의견을 나누고, 또 나름 짧은 칼럼의 한계를 넘어서 동시대적 사안에 대한 젠더 비평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요즘은 페북에 이런 글을 거의 안쓰고 블로그도 좀 뜸하게 쓴다. 어쩌다는 아니고 나름 이유가 있지만 그건 패스.

 

힙합 문화(라고 쓰고 kpop에서의 힙합 계열)에서 비롯된 플렉스가 새로운 유행어가 되었다. 천둥벌거숭이들이 힙합으로 돈을 벌어서 명품 시계, 강남 빌딩 몇채를 자랑하는 플렉스가 귀여운 허세에서 빌딩 사기 플렉스까지 일종의 놀이처럼 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놀이는 아니고, 빌딩 모으기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예능 프로에서 일상적 대화가 된 시대의 한 모습이다. 빌딩 사는 플렉스는 '남의 나라'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플렉스는 규모가 같지 않지만, 플렉스라는 같은 말 아래 놀수는 있다고나 할까. 모두 빌딩주도 도끼도 못돼겠지만 도끼를 욕하지도 슬리피가 마냥 불쌍하지도 않고, 과거의 플렉스의 영광과 오늘의 파산 스토리로 '인기' 자본을 모을 수 있는 게 지금 시대다. 

 

힙합씬도 온갖 스토리텔링이 넘쳐나지만, '힙함과 플렉스'의 스토리 의존도는 다소 약하다.

 

새로 시작한 미스터트롯을 볼까말까 계속 고민하다가, 송가인 열풍의 무언가를 이어가는 차원에서 보았는데 다소 허를 찔린 느낌. 무엇보다 유소년부 출연진의 면면이 미스터 트롯의 미래를 가늠하게 할 듯도 하다. 

 

힙합은 '세대 문화'이자, 계승과 연대에서도 명맥한 남성적 유대와 형제애에 기반한다. 힙합씬의 형제애가 플렉스의 근간이다. 송가인이 징후적인 건 남성적 유대로 이어지는 트롯계(4대 천왕 등등에 언급되는 남성 시니어와 그 연대)에 의도하지 않은 절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판소리로 출발해서 무명가수로 전전한 송가인은 의도치 않게 트롯 가부장제의 계승 구조를 절단내었다. 송가인과 함께 미스트롯과 판소리와 지역 정서와 여성 트롯가수의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이유이다. 

미스터트롯은 기존의 트롯계의 남성 가부장제를 반복할 게 너무 뻔한 구도인데, 미스터트롯 선발을 둘러싼 과정은 두고볼 일이다.

 

다만 유소년부를 보면서 흥미로왔던 건, 트롯을 온몸으로 체현한 소년들의 삶의 맥락이랄까. 진성의 보릿고래를 부른 소년은 하동에서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고, 할아버지의 애창곡을 2020년의 십대라고는 이해가 안될 정서로 불렀다. 이렇게 10대도 되기 전에 70년도 더 산 것 같은 오랜 감수성을 몸에 익힌 소년의 등장은 아마 소년 농부에서 이미 감지되었다. 서울이나 수도권의 삶으로 소환되지 않는, 혹은 거기서 완전히 단절되어 전혀 이질적인 생애, 삶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면서 유투브와 미디어 속에서 2020년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거기 있다. 

 

이들에게 트롯은 플렉스로는 들어갈 수 없는 삶의 자리, 그외에도 너무 많은 것이 비어있는 자리(동일화할 또래집단이나, 이른바 문화적 취향 자본을 물려줄 부모, 형제, 상징적 준거집단들)에 채울 수 있었던 무언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아주 오래된 문화 향유 속에서 겨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존재와 자기를 이어주는 갸냘픈 끈. 트롯 열풍은 이런 갸냘픈 끈을 극장으로, 공공영역으로, 문화산업으로 그리고 외롭고 오래된,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연결된 실마리가 아닌 세상으로 나아가는, 혹은 성공으로 이어지는 매개가 되고 있다.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미스터 트롯의 무대를 보면서,

힙한 플렉스와도 거리가 멀고,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나를 외치는 미소년과도 거리가 먼, 그러나 여기서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보려 하는 아등바등, 맨몸의 아크로바틱의 향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려받을거라곤 '맨몸' 뿐인 존재들.

타고난 음색, 끼, 뛰어날 발성과 성량

겪은 적도 없는 보리고개를 온몸으로 체현해내는 감수성.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께, 혹은 그런 지역 공동체로부터 '자본'이 될 수 없는 '몸의 감각'만을 물려받은 이들.

'문화'나 혹은 '문화자본'과는 다른, '자연'만을 물려받은 이들. 그 '자연'(몸의 감각)과의 조우, 혹은 이것이 주는 매혹과 열광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사실 판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이 흐름이 물려받을 것이라고는 '자연' 뿐이라는 감각을 공유한 이들의 어떤 공통 감각, 혹은 공통 감각화하고 있는 와중의 한 가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감각은 지금까지는 한국의 진보나 보수 모두 공유하던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5765.html)

 

이른바 진보 정치 세력은 조국 사태 이후 그런 점에서 대중 정치의 스펙타클에서 큰 전환에 직면했다. 이른바 '노무현'으로 상징되던 물려받은 것이 없는 맨발 투혼의 대표 상징은 산산이 부서졌다.  진보나 보수 모두 한국에서는 어떤 '가난함'을 대표 상징으로 취해왔고 대중은 알면서도 거기 응답해왔다. 조국 사태는 이런 가난을 주고받는 어떤 합의된 연극의 약속 자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로서 세습 자본의 에이전시 역할에 골몰한 조국 전 장관의 삶 혹은 역할에 대해 '정치적 대중'이 원하던 답은 "뭐가 문제냐?"가 아니었다. 가난을 주고받는 합의된 극장에서 무대에 오른 정치인이 해야할 역할극은 입신출세, 투옥, 재야 시절의 어려움, 못난 부모로서의 후회와 애절함 같은 연극성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빌딩을 모으는 연예인의 플렉스를 손가락질하고 지탄하지 않을만큼 '극장'을 대하는 관객의 태도는 변했다. 한편 연예인은 일종의 노동자이고 플렉스는 입신출세의 어떤 파이널 골과도 같은 것이다. 이와 달리 재벌이나 '원래 있는 *들'의 "있는 행세"(갑질, 부와 권력의 세습)은 이 극장의 대중이 가장 인정할 수 없는 최고의 악에 해당한다. 재벌이나 있는*놈들은 극장 대중들이 단죄를 할 수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용서하지 않으려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와 정동을 촉발한다. 불매운동이나 청원 운동으로 나타나는 시도는 이처럼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너무나 큰 현실적인 권력적 낙차를 넘어서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소비자 운동이나 청원 운동은 절대적으로 권력의 낙차가 확연한 지점에서 그 낙차를 점핑하려는 이른바 스케일 점핑의 사례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거는 이런 스케일 점핑의 오래된 실현장이자 실험장이었다. 한국 유권자의 특징으로 '균형잡기'와 '견제'를 매번 시도하는 것을 꼽곤 한다. 한국 유권자는 자신들이 이 세계에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들과 '우리' 사이는 너무 멀다는 것을 너무나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치인들이 하는 가난한 척, 불행한 척에 알고 속아넘어가주는 것이다. 마치 연예인이 인기를 위해 연기를 하고 거기 울고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미디어에 대해서나 정치에 대해서나 '관객'으로서 '대중'은 자신들의 관극성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권력을 행사하는 법도 잘 알고 있다. 

성공한 연예인과 정치인은 선망하고 좋아하지만(그들은 성공한 것이다. 그 스토리 속에서 동일화가 가능해진다.) 잘난척하고 '잘난'(물려받은 게 많은) 연예인과 정치인은 순식간에 '비호감'이 된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 박근혜 때보다 더 불행하고 답답하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박탈감과 환멸이 하늘을 찌른다. "뭐가 문제냐"라는 이른바 진보 정당이나 이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이런 박탈감과 환멸에 불을 지르고 있다. 검찰 개혁을 지지하는 여론 조사가 50% 육박한다고 아마 안심을 한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집권 정당이나 보수정당이나 모두 미래 전략과 정책 기조를 '탈자연'으로 정립했다. 젠더 이슈 자체를 회피하거나 이용하려는 전략도 이런 탈자연화를 추동하는 중요 동력이 된다. 두고 볼 일이다. 

 

해피엔딩에 대해서는 나중에 추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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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적어나간 것들

 

맨몸의 아크로바틱에 대해 계속 생각중이었는데 이런 글을 보았다.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123117125780670

 

<인용 시작>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란 산산 조각난 것들의 억지 집합이라는 게 이 동안 눈에 선해졌고, 세계를 이루기 위해 맺었던 수많은 약속은 빠르게 힘을 상실하고 있으며, 그래서 말하는 게 쉬워진 만큼 말하는 게 어려워지고 있다. 이 부스러기들 사이에서 지금 내 자리, 내 자세를 잘 지키는 건 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아찔해진 기분으로 하여튼 말을 토한다.

 

그래, “아찔한”이란 말이 중요하다. 정세에 휩쓸리기만 한다면, 지적인 자살에 불과하리라. 예컨대 ‘세계는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데 그치는 냉소적/자족적 태도, 혹은 무엇이 예쁘고 안 예쁜지만 따지려는 말들. 때가 이럴수록 우리의 발이 딛고 있는 땅의 운동을 더 열심히 파고들고 부정해야할 테다. 정세에 맞춰 몸을 아찔하게 뒤틀자. 근육과 관절에 힘을 빼고 좀 더 아크로바틱한 자세를 시도해보자. 우울에 치를 떨고 분노에 이를 갈며 그 자세를 유지하자.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나 역시 엎어지곤 한다. 그러니 이 당선 소감은 스스로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앞으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약력: 1997년생. 본명 신현성. 대학원 진학 예정.

    <인용 마침>

    맨몸의 아크로바틱. 물려받은 것이라곤 맨몸 뿐인 어떤 존재들의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조국 전 장관은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담론 전략으로 SNS 셀럽이 되었고, 선거 본부와 정계 진출에 들어가는 큰 자산이 이런 SNS 담론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런 SNS 담론 전략은 정치 무대, 말 그대로 그 무대에서는 매번 부작용만 양산했다. 

    플렉스 같은 것이 SNS  감수성에 더 가깝다면 정치 무대의 어떤 합의된 연극적 수행성은 무수한 가면 놀이적 퍼포먼스를 요청한다. 단지 진정성의 종말 같은 시대 정신 때문은 아니다.

     

    또 이는 SNS  셀럽의 담론 전략이나 감수성이 '정치 무대'에 개입하거나 정치 무대를 변용시키는 데 매우 무력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정치 무대의 인사들이 SNS 담론 전략을 부차적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식 말이다. 또다른맥락에서더민주는과도하게 SNS에반응하고,여론조사에목숨을건다.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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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딩에 대한 열망과 공통감각화.

    양준일의 빅뱅은 사연있는 사람으로 쏠리는 한국이라는 극장 국가의 독특성과 사연 있는 사람을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향을 미쳐서' 시장과 자본과 흐름을 이끌어내고, '성공'을 만들어내고야마는 매우 독특한 팬덤 정치 혹은 정치화된 팬덤의 어떤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그를 쫒아내었던 과거의 한국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인생의 해피엔딩을 보고 싶다는 열망, 마치 웹툰작가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달라고 압력을 행사하듯이, 극장 국가의 팬덤 정치는 누군가의 인생에도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려고 한다. 

     

    이 '선의의 힘들'이, 2020, 극장국가 한국의 정치 드라마에 바라는 결말은 무엇일까? 해피엔딩을 바랄 주인공이 정치 무대에 없다면, 아마도 바라는 최대의 결말은 '권선징악' 중 징악. 즉 벌주기의 완성일 것도 같다. 징악만이 아닌 '권선'을 바라는 이 '선의의 힘들'의 열망을 채워줄 주인공이 아직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