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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우울, 불가항력의 무기력 본문

맞섬의 geography

재난의 우울, 불가항력의 무기력

alice11 2017. 9. 12. 06:31

생각거리와 말들이 혼돈스럽게, 또 너무 침잠해있는 문제지만, 에너지가 고갈되어 두서없이 적어보는 글.

1. <친절한 효리씨>가 낯모르는 손님들에게 보이는 서글함은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문득 그녀가 그 손님들 대부분을 고유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흥미로웠다. <젊은 부부>, <엄마 또래분> 같은 회상 신의 호명.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과 만나는게 일상인 그녀가 그들을 모두 고유명으로 기억한다면 삶은 신경증으로 가득할 것이다. 팬과 안티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이들을 악의도 신경증도 없이 일상으로 만나기 위해 살아온 생존술이랄까. 삶의 양식이랄까.

2. 사건 사고로 부산 소식이 도배된 언론과 SNS에 <부산 재난> 소식이 어디도 기입될 여지가 없는 어떤 장면들을 보며 문득 친절한 효리씨를 떠올린 건 자유연상만은 아니다.

별난 악의도 신경증도 없이 고유명을 상실한 채로만, 호명되는 어떤 이름들. 혹은 그 이름의 자리를 되새기는 건 어쩌면 무심한 세계에 신경증으로만 피드백 될 운명인 듯하다.

3. 재난의 우울, 불가항력의 무기력
작년 지진 이후, 촛불을 거치면서, 기이하게 퍼져나는 어떤 부대낌에 대해 감각하고 생각중이다.

특히 부산의 정동에 대해. 촛불의 뜨거움과 열정, 나는 때로 <다들 해방되었다는 데, 부산은 여전히 식민지>라면 농반진반 떠들어본다. 진지하면 우울하니까.

'정치 팬덤', '우리 이니' 같은 다정한 호명과 이에 대한 열정적 냉소도, 부산에서는 뭔가 아득한 거리감 같은 걸 느낀다. 부산 중에도 내 삶의 반경 때문인지 모르겠다.

관찰과 감각의 결과 중 하나는 부산은 뭔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 해방감의 들썩임을 공유하는 그런 세계에서.

오히려 변화되지 않을 것 같다는, 혹은 해방된 세계와의 먼 아득한 거리에 대한 감각이랄까.

탄핵 정국에 멈췄던 엘시티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 붉고 어두운 쌍동이 몸이 하늘을 찌르며 완성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 붉고 어두운 쌍동이 몸이 증명하듯이, 모든 것은 완강하고, 더 완강하고 말없이 완강하다.

해방과 해방에 대한 냉소로 가득한 탐라에
없는 이름, 아니 고유명을 상실한 호명의 범람 속에서.

변하지 않는 권력의 완강함은 침묵으로 존재감을 새긴다.
매일매일 고독사 뉴스와 더 고독한 장례 뉴스를 전하는 부산의 '활동가'들의 말들이

어떤 들뜸도 떠들석도 찾아볼 수 없이 가라앉고 있는 건 내 느낌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다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아니 필사적으로 해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결국 이만큼이라는.

불가항력의 무기력.
고작, 이런 변화를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가 하는
뒤늦은 인생의 후회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보며 아직도 정리를 하지 못한 말들.

영도 다리 한복판에서 입고 있던 고등학교 교복과 가방을 내던지고, 용접공이 된 권민기씨는 조선소가 폐쇄되자 일자리를 잃는다. 그는 평생 일하던 조선소 근처에서 청소 노동자가 된다. 혹자는 왜 다른 곳에 가서 조선소에 취직을 하지 않는거지? 의문을 품을 것 같다. 그런데, 살고 있는 바로 여기서 무언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다보니, 그 삶의 반경을 맴돌게 되는 것, 또 그러다보니, 바깥이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는 것.

그게 한국에서 지방에 산다는 것이고, 지방에 살수록 삶의 반경이 좁아지는 것이고, 나 역시 다르지 않는 어떤 지정학의 힘, 불가항력인 것이다.

*. 페친이 링크해서 따라간 사이트인데, 좀 신기함. 여타 신문도 그렇지만 부산일보 광고랑 이미지가 많아서 보기가 힘들었는데, 순전히 텍스트만 있는 사이트다. 부산일보가 만든건가? 아니면 다른 매체인가?


http://booble.busan.com/?p=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