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말벗’ 최순실은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받아보고, 뜯어고쳤다.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는 거의 매일 밤 최순실의 서울 논현동 사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최순실 재단’으로 불리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은 대기업에서 순식간에 수백억원을 모금했다.
서울 강남구 학동로 가구점을 겸한 한 커피숍에서 그를 처음 봤다. 후배 방준호 기자와 함께였다. 9월7일 수요일이었다.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전화번호조차 따기 쉽지 않았다. 소주 10병을 마신 뒤 얻은 번호였다. 닷새 전 김의겸 선임기자는 누군가와 한낮부터 술을 마셨다. 깨어보니 서울 한복판이었다고 한다. 시간은 새벽 4시. 소주를 나눠 마신 이는 ‘술정’ 때문인지 김 선임기자에게 번호를 일러줬다. 비밀스러운 거래를 들키지 않게 해달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만나자는 요청에 “당신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말이야 맞지만…. 간단치 않은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 명함을 보냈다. “낼 오후에 뵐 수 있도록 시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일 오후 2시, 4시 약속 있습니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처음으로 주고받은 문자였지만 시간과 장소를 특정하지 않았다. 당일 아침에야 오전에 시간 낼 수 있을 거란 연락이 왔다. 이동 시간을 계산하니 빠듯했다. 서둘러 움직였다.
‘빙산’의 크기를 가늠하며 놀라다
기자 17년차다. 취재를 제법 한다고 생각했다. 대개 기자들이 그렇듯 음모론과 ‘설’을 싫어했다. 직접 보고, 듣고, 확인된 팩트가 아니면 믿지 않는 기질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졌다.
그를 만나서 이게 깨졌다. ‘간을 보는’ 첫 만남에서, 그는 수식도 복잡한 관계망도 어려운 용어도 쓰지 않았지만, “제가 하는 얘기를 이해하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개념이 무너지실 거예요” 했다. 1시간 넘게 주변만 맴도는 얘기를 듣는다는 건 엄청난 인내심을 요한다. 대화 도중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어렵지 않습니다. 근데….” 그는 문제는 던져주지 않은 채 방정식이 풀기 어렵다는 투였다.
첫 만남은 그렇게 알맹이 없이 끝났다. ‘만났다’는 것 말고는 소득이 없었다. 만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냄새를 강하게 풍긴 채 검정색 카니발을 타고서 그야말로 휑하니 가버렸다. 다음 약속도 기약하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보다 나았다. 역시 팩트를 건네주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씩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을 나중에 인터넷 등에서 다 찾아봤다. 그런데 그 이상이다. 이 사람은 실제 더 큰 영향력을 갖고 개입을 했다. 나는 예전에 정부나 이런 데 있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나 청와대,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이제 더는 존경할 수 없게 됐다.”
9월18일 세 번째 그를 만났다. 6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대화는 깊은 밤에야 끝이 났다. 강원도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만을 얘기하겠다는 그의 ‘각주’가 있었는데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대개 보이는 것보다 진실은 훨씬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빙산의 일각’이란 상투적 표현을 써온 기자가, 빙산의 크기를 가늠하고는 놀란 격이었다.
‘오프더레코드’ 약속을 깰 수밖에 없던 까닭
김 선임기자에게 보고를 했다. “선배, 딥스로트(내부 제보자)입니다. 보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로 말하긴 그러니 내일 구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워터게이트’를 세상에 알린 밥 우드워드가 마크 펠트 미국 연방수사국(FBI) 부국장한테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보고했을까. 심정은 그나 나나 엇비슷하지 않을까.
그를 처음 만난 지 두 달이 돼가는 지금(10월28일)은 누구나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을 말한다. 그 이름 석 자로 세상이 시끄럽다. 현대사 한 페이지에 굵은 글씨로 기록될 부끄러운 이름이다. 최씨 이름 옆에 ‘국정 농단’이나 ‘게이트’가 박힐지 모른다. 역사학자의 몫일지 모르겠으나, 비선 실세 최순실을 세상에 제대로 힘있게 알린 건 <한겨레>였다.
‘최순실 게이트’가 여기까지 오는 데 네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변곡점은 신도 자연도 아닌, 사람의 연출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만큼의 진실도 드러나지 않았다.
‘딥스로트’도 그들 중 한명이다. 그는 미르재단 이성한 전 사무총장이다. 네 차례 그와 만난 16시간은 <한겨레> 10월26일치 1면에 ‘최순실, 정호성이 매일 가져온 대통령 자료로 비선 모임’이란 큰 제목의 기사로 나갔다. 정호성은 이재만·안봉근 등과 함께 ‘문고리 3인방’으로 꼽히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기도 하다.
그 아래 소제목들은 “인사도 논의했는데, 장관 만들고 안 만들고 결정. 최씨가 대통령한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구조. 개성공단 폐쇄도 논의. 정호성 ‘전혀 사실 아니다’”였다. 신문의 안쪽 면들엔 “최순실 ‘언니 옆에서 의리 지키니까 내가 이만큼 받잖아’” “미르의 말, 청와대·문체부엔 어명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함께 나갔다. 네 번째 변곡점에서 빛난 기사 중 하나였다.
김어준씨는 10월26일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파파이스>에서 방송(JTBC)에 ‘최씨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이 있다면, 활자에선 “최씨가 대통령한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구조”라는 <한겨레> 기사를 작금의 사건을 가장 잘 드러낸 보도였다고 평했다.
그런데 딥스로트의 이름을 왜 드러냈을까. 취재기자한테는 아픈 대목이다. 그의 존재가 마크 펠트처럼 극비는 아니었다. 그는 7~8월 TV조선의 몇 차례 보도에서 ‘미르재단의 이모 전 사무총장’으로 등장한다. 그의 발언도 실렸다. 이를 핑계 삼을 순 없다. 그는 ‘오프더레코드’(비보도) 조건으로 나를 만났다. 녹취도, 타이핑도 거부했다. 수기만 허용했다.
막판까지 지키려 했던 약속은 몇 가지 돌발변수와 오해로 깨졌다. 앞서 JTBC는 실명으로 그의 발언을 여러 차례 보도했고, 국회에서도 그와 접촉해 들은 얘기를 공개했다. 이 지면에 미주알고주알 밝힐 건 아니지만, 9월26일 마지막 만남 뒤 정확히 한 달 만에 <한겨레>도 이씨와 한 인터뷰를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10월26일치 지면에는 그 이유가 정제된 언어로 간단히 설명됐다. 보도할 수 없을지라도,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초심은 어이없게 무너졌다.
<한겨레>는 어떤 언론보다 그한테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그는 “내가 한 얘기는 전체의 10분의 1,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를 산화시켜,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을 조금 더 드러냈는지 모르나 10분의 9, 100분의 99는 나와 같은 서툰 기자들 때문에 땅속에 묻힐지도 모른다. 보도 전날 서로가 지닌 오해를 털어놓는 ‘마지막 통화’를 했다.
“회장님이 오셨다는 거죠?”
제3의 변곡점은 최순실씨의 독일 기행이다. 프랑크푸르트에 ‘비덱’ ‘더블루K’ 등 유령회사를 차리고 호텔과 주택을 사들이는 최씨 일행의 행적을 찾아내는 데 복덕방 주인 김아무개씨의 덕이 컸다. 일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국제전화로 한인 부동산을 뒤지던 하어영 기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마장을 구입하는데 박헌영 과장이 왔었는지요? 네? 왔다고요? 그게 4월 아닙니까? 노숭(승)일씨도 왔었죠.” 복덕방 사장님은 K스포츠에서 온 박 과장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통화를 엿듣던 기자들 모두 전율했다. “회장님도 오셨다고요.” 취재팀은 최씨가 ‘회장’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 기자가 재차 되물었다. “최순실 회장님이 오셨다는 거죠? 아, 네….”
K스포츠재단 이사회 회의록(2016년 5월13일)을 이미 입수해 보도한 취재팀은 재단의 박헌영 과장이란 인물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이사회에 “해외 전지훈련장 협의”(4월3~14일)를 위한 해외 시찰 결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왜 하필 독일로 해외 시찰을 떠났을까. 수상했다. 최씨의 딸 정유라(20·개명 전 이름 정유연)씨는 독일에서의 승마훈련을 이유로 재학 중인 이화여대에도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아왔다.
취재팀은 K스포츠가 최씨 딸의 승마 훈련을 지원할 것이란 가설을 세워놓고 취재 중이었다. 그 와중에 박헌영이란 이름이 걸려들었다. 가설이 입증되는 순간은 짜릿했다. 송호진 기자가 직접 찾아가자, 복덕방 주인의 말은 점점 후퇴했다. 다행히 팩트의 큰 골격은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살이 발라지면서 가시가 더욱 도드라졌다. K스포츠와 최순실, 독일을 잇는 고리를 드러낸 기사는 그렇게 가능했다.
<한겨레> 10월17일치 1면으로 ‘K스포츠, 최순실 딸 숙소 구해주러 독일까지 날아갔다’는 큰 제목과 “최순실, 재단 박 과장과 현지 직원 10명쯤 대동. 재단 설립된 지난 1월… 전지훈련용 숙소 물색. 통째로 구한 호텔, 딸과 지원 인력만 10여 명 거주”란 소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돌이켜봐도 최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의 촬영 장소를 한국에서 독일로 옮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보도였다.
그리고 불과 하루이틀 새 최씨 소유 독일의 페이퍼컴퍼니(비덱, 더블루K)와 그가 국내에 세운 더블루K, 그가 사실상 장악한 K스포츠재단 등의 관계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경향신문>의 역할도 컸다.
또 다른 변곡점은 이화여대다. 10월23일 저녁 미국행을 몇 달 앞둔 친구는 우기듯이 저녁 약속을 잡았다. 못 마시는 술을 몇 잔 들이켜자, 술안주 삼아 최씨 얘기를 한다. 친구는 “이대 사태가 없었으면 최씨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거야. 이대에서 불이 붙었어”라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취재하면서 그때까지도 이화여대는 변죽이라고 여겼는데, 정작 사람들은 이화여대 사태에 크게 분노했다. 최경희 총장이 사임했고, 조·중·동도 최씨 딸의 이화여대 특혜 의혹을 시작으로 최씨 관련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10월27일 교육부가 이화여대 특별감사를 발표한다.
이 제2의 변곡점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교수, 다른 한 명은 학생이다. 최순실씨 딸의 지도교수를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는 내용의 제보를 받은 기자는 해당 교수에게 주말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때문에 시끄러운 학교가 또다시 격랑에 휩싸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어렵게 설득해 날짜를 잡았지만, 만나서도 속 시원하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위세에 눌려 해야 할 말을 못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던 분이지만, 나서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최순실을 무대에 세운 <한겨레>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관계를 들려줬다. 이분이 아니었으면 최씨가 지난 봄학기 때 이화여대를 찾아가 지도교수 교체를 요구했다는 기사의 힘이 크게 떨어졌거나, 기사가 아예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10여 명의 교수를 취재해 그의 말에 살을 붙였다. <한겨레> 9월27일치 ‘딸 지도교수까지 바꾼 최순실의 힘’은 그렇게 보도됐다. 보도는 국정감사에서 큰 이슈로 번졌고, 최씨 딸을 위한 이화여대의 ‘맞춤형 학칙 개정’ 의혹으로 이어졌다. 익명으로 쓴 지도교수는 이제 실명이 거론된다. 함정혜. 그의 이름이 제대로 기록됐으면 한다. 그가 기자를 만나주지 않았으면 진실은 덮였을지 모른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한 통의 전자우편이 날라왔다. 이화여대 의류학과 학생이었다. 최씨의 딸이 지난 여름학기에서 학점 특혜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고한솔 기자와 같이 만난 학생은 당당했다. “보도 나가면 한동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라고 묻자, 그는 “상관없는데요”라며 웃고 만다. 3.2기가바이트나 되는 크기의 제보는 며칠 뒤 기사로 나가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학생들이 ‘생사여탈권’을 쥔 교수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만 삭이고 있을 때, 당당하게 나선 이 학생이 없었다면 아직도 최경희 총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 학생 덕분이었을까?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던 이화여대 학생들은 농성을 풀고서 85일 만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제2의 변곡점은 교육열 높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부분을 건드린 탓에 쉽게 불이 붙었다. 최초 제보한 학생을 10월21일 밤 <파파이스> 녹화 현장에서 봤다. 남자친구와 같이 온 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속으로 너무 다행이다 싶었다.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제1의 변곡점이자 최씨 드라마의 시발점엔 3년차 기자가 있다. <한겨레>가 거대한 장막을 걷어내기 전 ‘장막 뒤 뭔가 있다’고 보도한 건 TV조선이었다. 현 정부 들어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을 불러냈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최순실씨를 호명하기 전에 멈춰 섰다.
최순실을 무대에 세운 건 <한겨레>였다. 9월20일치 1면 ‘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최씨가 단골 마사지센터장을 재단 이사장 자리에 앉혔다는 보도는 2013년 입사한 방준호 기자가 발굴한 것이다. 최씨를 꽤나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아무개씨를 우연히 찾아내 가능했던 일이다.
이씨는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가 다닌 유아스포츠센터를 운영했던 인물이다. 최씨 단골 마사지센터의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는 몽땅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꽁꽁 숨기지도 않았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모르는 눈치였다. 수차례 통화와 만남 끝에 나올 수 있었던 첫 기사는 값비싼 희생을 요구했다. 보도한다는 사실을 미리 들은 그는 방 기자에게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사온 마카롱을 집어던졌다. 희대의 사건을 알리는 첫 신호탄은 기자와 취재원 둘 다 아프게 시작됐다. 방 기자는 이씨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디까지 번져나갈지 겁이 난다”
총 네 번의 변곡점은 매번 진실로 한 발짝씩 다가가는 계단이었다. 최순실씨의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개입으로 시작된 게이트는 이제 최씨의 국정 농단으로 번졌다. 올라야 할 계단이 아직도 남았다. 몇 계단 더 남았는지는 모른다. 김의겸 선임기자는 “최순실 문제가 어디까지 번져나갈지 겁이 난다”고 말했다.
류이근 <한겨레> 기자 ryuyige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