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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것, 잡은 손 놓지 않는 것: 퀴퍼에서 공부하기 본문
2017년 9월 23일 부산 퀴어퍼레이드 연구 노트
(블로그에도 있어요^^)
1. 헤이트스피치 리서치
혐오발화 자료를 가능한 많이 모아서 공론화하려는 게 중요한 목표였다. 자료는 많이 모았지만,
결론은 굳이 큰 의미부여를 하지 말자. "나중에" 논문으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1-1. 가족이라는 폭력의 안과밖
1-1-1. 생식기 파시즘
기독교적 담론을 표면화하지 않고, "결혼, 출산" 구호를 내걸어서, '생식문제'를 전면에 내검
이들이 사용하는 혐오발화에서 "결혼, 출산, 가족, 사랑"은 보통의 친밀성, 재생산, 정서적 유대가 아닌
완벽하게 "생식문제"이다.
결혼, 출산을 앞세운 혐오발화야말로 생식중심주의, 생식기중심주의의 극단이 우생학, 단종법, "최종해결"(수용소에서의 소각)로 이어진 파시즘의 생식기주의를 새삼 환기시킨다.
검열과 '법적 소각', '존재의 소각'을 구호로 삼아, 퍼레이드 내내 생식기 파시즘의 함성을 외치다.
"금기란 가장 욕망하는 것이며, 금기를 통해 대상을 매번, 편집증적으로 명명하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혐오발화의 주된 특징"이라는 버틀러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날, 혐오발화 주체는 '금기의 이름으로' 생식기 파시즘 담론을 부산에 가득 채웠다. "동성애발화"를 가장 많이 외친 것도 혐오발화측.
1-1-2. 유사 가족을 자임하는 주체: 검열, '보호', '사회를 보호해야한다"는 관리자들과 혐오발화
"돌아올게, 기다릴게"를 구호로 삼아, '유사 부모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왜 파시즘이 가족 국가주의를 토대로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파시즘이 사회와 국가, 세계 전체를 "유사보육기"로 만든다는 후지타 소오죠의 진술을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영화 메트릭스가 잘 보여주듯이, 파시즘의 보육기 메트릭스는 결코, 사랑에 의한 친밀한 결합이나ㅡ 사랑을 통한 가족의 구성과 돌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보육기 메트릭스는 다만, 생식과 번식을 요구할 뿐. 인간 주체는 생식을 위해 필요한 "재료이자 도구"일 뿐.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는 것은 한편 추상적 논의지만, 이런 맥락에서 사랑은 증오에 대한 저항의 한 양식이 될 수 있다.
2.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것, 잡은 손 놓지 않는 것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혐오발화 속에, 차별선동, 증오에 찬 공격 가운데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물살 속에 떠밀리고 떠밀려, 매번 익사직전까지 물을 먹고, 숨이 막히고, 꿈 속에서까지 계속되는 필사의 몸부림에 기진맥진하는 것...그런 게 아닐까.
그런 삶의 곁을 지키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할까. 아직도 어렵고, 배우고 또 생각하려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버틀러가 논한 곁에 있음(besideness)은 가까움에 따른 익숙함과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가장 먼, 적에 대해 그 낯설음의 공포를 넘어서 곁에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심판에 드는 일, 그것이 곁에 있음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잠잠해지지만, 제멋데로 불어나는 저 물살을 어떻게 가늠하기도 변화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나 몸부림을 그치고 물살에 몸을 맡길 수도없고, 물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데 죽을 때까지 몸부림을 칠 수도 없다.
그러니, 물살이 거칠어지면, 서로 익사하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 손을 꼬옥 잡고, 몸부림에 축 쳐진 다른 몸을 또 끌어안고,
그리고 바깥에 한 발을 딛고 서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달라고,
그리고 물살에 떠밀려 몸부림치며 , 떠밀려, 떠밀려 가는 이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맞잡는 일. 절대 놓치지 않으려, 꼬옥, 꼬옥, 꿈 속에서도 잡아보는 일.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일본에 있을 때 자이니치 운동가들의 배타성, "자기들끼리만 손잡는다는" 그런 비아냥을 종종 듣기도 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손잡음의 안과 바깥에 대해,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홀로 묻고 또 묻곤 했다. 손을 잡는다는 건 무엇일까? 곁에 있다는 건 무엇일까?
자기들끼리만 손잡는다고 보이는 건, 아마 물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판단과 해석은 아닐까?
자신이 물살 안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나도 손 내밀 수 있는데 말하는 건 무엇을 향한 원한일까?
그런 질문도 들었다. 그래서 구경하지 말고, 손 잡으면 되지 않나? 자신이 물살 속으로 끌려들어갈지라도?
그런 두서없는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니, 손을 내밀지 않을 거라면, 그저, 차라리 뒤돌아 가버리지, 구경하며, 훈수두는 일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주체 위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디 서있을까?
쿼퍼에 갈 때마다 하는 질문, 퀴퍼에 가서야만 할 수 있는 공부, 배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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