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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바이럴과 무관한 혼자 잡 생각....
조잡하고 타협적인 드라마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러 생각거리를 준다. 친밀성(우정, 돌봄, 사랑 등)이 약탈과 거래와 분리가 불가능한 시대, '진정한 친밀성' 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의 역사를 오늘로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같은 건 없다.
김혜자의 얼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의 얼굴'을 새겨 넣으려는 작품의 조잡한 시도의 한 켠에, 완강하게 이 얼굴이야말로 폭력을 정당화한 "양민의 표상"을 신화화 하는 게 아닌가라는 균열을 해석을 통해 제시하는 이유.
그런데 이러한 친밀성의 붕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글로벌 노스를 향해 나아가는 이른바 "글로벌 경제"와 바다에 의존해 나름의 성공을 거둔 토착 경제만이 존재한다.
토착 경제는 죽음과 '운'을 대가로, 글로벌 노스로 진출할 인프라가 없는 이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된다. 국가는 토착 경제에 대해서도 글로벌 경제에 대해서도 작동하지 않는다.
태풍, 돌변하는 바다의 추이에 맡겨진 토착 경제처럼, 글로벌 경제 역시 도박과 운에 맡겨져 있다. 토착의 삶이든, 글로벌 경제로 나아가는 삶이든, 도박과 운 말고는 어느 것에도 의지할 근거는 없다.(신자유주의 경제의 정동성speculative)
한편 정동적 경제의 국내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는 이른바 국가의 붕괴 혹은 조금 양보하면 인프라스트럭처의 붕괴나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의 역할이 시민적인 인프라스트럭처를 보금자리나 둥지로 만드는 일이라고 할 때nested civic infrastructure
친밀성의 붕괴는 시민사회, 인프라스트럭처의 붕괴를 뜻한다.
친밀성이 붕괴한 시대 친밀성의 영역에 할당된 주체들에게도 붕괴가 진행된다.
더이상 착한 엄마는 없고, 언제고 반겨주는 고향집 누이나 고향 친구는 없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은희(이정은)는 때때로 "썅년"이 되는데
또 자주 착한 언니, 누나로 되돌아온다.
자기밖에 모르는 "찐 썅년" 영옥(한지민)도 알고보면 언니를 돌보고 시설의 삶을 넘어서고자 애쓰는 진정성이 있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진짜 썅년도 못되는 이들이 바로 토착 경제, 지역의 토착의 삶을 할당받은 이들이다.
글로벌 경제의 물결 위에 올라탄 주민들은 여전히 항상적으로 썅년이 될 수 있고, 때때로 착한 척을 하고, 그렇게 힐링을 한다.
그런 힐링의 와중에 고향의 '착한 친구들'을 방문해주시고
썅년이 되는 것도 아주 가끔 밖에허용되지 않는 이들의 복장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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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전환, 수조원대 기업들의 글로벌 이익 구조와 산업 개편에 대한 논의와 그 주역으로서 남성 젠더화된 형상들에 대한 보고와
"우리 새끼들", 예술가, 기획자, 막말, 썅년되기 등에 대한 또한 여성 젠더화된 형상들의 대결 구조 속에서
학생인권 조례가 폐지된 게
그런 점에서 참으로 한국 사회의 현단계를 잘 보여준다.
국가가 인프라스트럭처의 둥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둥지화된 인프라스트럭처를 파괴하는 주체로만 등장하는......
국가의 붕괴
인프라스트럭처의 붕괴
친밀성의 붕괴
그럼에도 디지털 경제, 글로벌 경제의 주역 운운의 담론만이 무성하고, 정치경제학의 이름으로도 그저 글로벌 경제에 몰두해있는 바로 그 한국 사회의 구조.....
그러니 친밀성에 대한 국가 정책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매번,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어제 오늘의 광범위한 바이럴 속에서 실감한 일.

 

썅년되기를 붕괴한 친밀성에 대항하는 대안적 친밀성을 발명하는 정치적 실험이 아니라
힙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것으로 소모해온 역사의 데자뷔..
류호정에 대한 내기에서 여전히 교훈을 못얻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