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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을 하는 이유

울지 않는 여자

alice11 2018. 9. 16. 10:41

어제 오늘 페이스북에서 H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많아진다.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어보지만 자꾸 말과 기억이 밀려온다.


H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성폭력 상담소에서 열린 미투 집담회였으리라.


아마도, 라고 한건 그 전에도 만났을텐데 기억 속에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H는 집담회 내내 맨 앞에 앉아서, 아주 크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온 몸을 끄덕이며


내게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내게 공감을 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 이런 자리


아니 그녀들에게 미안해하고, 책임감을 말하는 대학 관계자를 아주 오래 만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최근의 어느 밤


누군가는 '요즘 20대는 항상 화가 나있다'고 말했다.


'아, 그런가'


'아, 그런가'


하고 나는 내 일로 돌아왔다.


H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은데


꿈처럼 많은 것들이 밀려왔다.


H는 집회에서 구호를 선창하고, 불법 촬영을 시도하는 패거리에게 경고를 날리곤 하는 역할을 도맡았는데


H의 목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폐와 심장 어딘가에서 찢겨져 나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인가 그렇게 오래, 크게 구호를 외치고 경고를 날려도 H는 목소리가 쉬는 법이 없다. 


그래, H는 항상 화가 나있었지......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말을 찾기가 어려워서 내가 경험한 어떤 부대낌을 비추어 말을 찾아본다. 


실은 H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끝에 꿈처럼 어떤 것들이 밀려왔다.


그게 나에 대한 것인지 H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나는 울지 않는 여자였다. 울기보다는 비판을 했지. 


누군가는 내 눈이 너무 무섭다고도 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폭력의 시간 후에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고


울음을 삼키면 대신 온 몸의 근육이 벌벌 떨리는 걸 알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회상 따위야말로 나른한 자기연민이라 생각해서


옛일을 돌아보는 걸 절대로 스스로에게 금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문득 H에 대한 생각과 함께


나는 울지 않았었구나, 생각보다 더 과격했고, 항상 싸우고 있었다는 지난 시간에 대한 말이 쏟아졌다.


그건 나를 위한 말이 아니기에


그 말을 스스로에게 용납해본다. 


어느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울음이 나기 시작해서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것이 내 몸이 내 의지로 제어될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임을 알았다.


울어도 좋았을까? 그렇게 되기 전에?


학내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하던 M은 오래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희는 왜 그렇게 화가 나있니', '지들 세상처럼 기고만장하구나'라는 말을 듣는


이 상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건 세상과 싸우고, 자기와도 싸우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투병 생활 혹은 투옥 생활과도 같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데, 싸울수록 갇혀버리는 것일까.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야겠다.


그래야 H도 M도 더이상 자기와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


같이 세상과 싸우기 위해


우리가, 여기 있어요.


당신들과 함께. 


H의 안부를 묻는 말을 대신하여.


그리고 오늘도 울음을 삼키는


이땅의 모든 페미니스트의 안부를 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