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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섬의 geography/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말과 사물

alice11 2019. 3. 31. 13:58

지옥에서 보낸 한 철

1. 말과 사물: 보이스 레코더

 

"돌아가면 보이스 레코더부터 마련해야겠군."

낯선 이름의 임시 피난지에서 새벽에 깨어 k는 생각했다. 아니 내뱉었다.

내뱉어진 말들, 조준된 말들, 그곳에서 피를 흘리는 말들은 '민주주의' 같은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같은 말에서만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시인은 행복했다, 인가. 이 말과 글들은 모두 인용으로만 가득차겠군. 젠장. 어차피 인용이 아닌 말이란 없지.

학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용 출처를 내용증명으로 보낼 것.

존재하지 않는 '원천', 영수증에서는 보이지 않는 피바다가 넘실댄다.

4, 1, 8, 19, 21, 46, 19853759

피를 흘리며 수자들이

아니 수들이 목을 딴다.

20190110

이 수로는 얼마 만큼의 피를 뽑아낼 수 있을까.

문득 k는 이 수가 오늘의 날짜가 아니라

학살을 예고하는 암호문 같다.

이곳, 여기는 몇년대인가?

k는 자신이 서있는 시간대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충동에 성급하게 빠졌고, 언제나의 버릇처럼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 시간대는 곰곰 생각하는 일이 지배적인 시대의 버릇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그런 시대의 지층을 파헤칠 수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닐까?

밀고, 동료를 팔아넘기기, '너를 지배하고 있는 건 나야'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기

이런 건 인간이 존재한 이래 모든 시간대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시공간대를 거슬러보기를 좋아했던 어떤 작가는 또 말했지.

숫자들이 피를 흘리는 것도, 다 그 켜켜이 쌓인 지층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라고, 또 그 작자, 아니 작가의 말이 k의 말 속에 겹친다. 젠장. 인용일 뿐이라고.

하지만 학살당하지 않기 위해 인용출처가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말의 인용 출처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학살당하지 않는다. 그 불가능한

불가능한 생존을 위해 보이스레코드는 과연 얼마만큼의 정보를 축적해야할까.

몇 억 기가의 말을 인용 출처로 확보하면 학살을 피할 수 있을까.

k는 또, 법 앞에서 문지기가 어쩌고 하던 어떤 시공간대의 또다른 k의 말이 떠올라 짜증을 내며, 서둘러 창을 닫고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