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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나쁜 조선인과 선한 조선인, 그리고 선한 조선인을 보호하는 '국가' 본문
<나쁜 조선인과 선한 조선인, 그리고 선한 조선인을 보호하는 '국가'>
1. 피식민자(식민지인)의 자기 반영성이란?
수업 시간에 매년 채택하는 교재 중 하나는 영화 <반도의 봄>이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572
1941년 제작된 이 영화는 '대표적인 전시 협력'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었고 최근에도 다양한 연구가 나오고 있다.
<반도의 봄>을 국민정신총동원, 국민총력동원으로 이어지는 전시 동원 체제의 '조선 영화인'에 대한 자기 반영적 텍스트
로 독해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2. 전시 동원 체제에서 <업자>와 <국가>란: 이른바 친일 영화(전시 동원 체제에서 일본 제국의 국책으로 만들어진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분열
전시 동원 체제에서 제국 일본과 총독부는 모든 것을 통폐합해서, 영화사 역시 국책에 협력하는 최소한의 업자만 남겨두
고 폐업처리되었다. 전시 동원 체제에서 업자와 국가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이런 연구자로서의 상식 정도는 논의를 하면
좋겠다.
조선 영화계는 언제나 경제적 불황 속에 '백만원 주식회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지만, 그 백만원은 조선 영화계에서는 꿈일 뿐이었다.
<반도의 봄>은 이런 상황에 처한 '조선 영화'의 분열적인 초상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이 바뀌어도 그대로 찍을 수밖에 없는 '춘향전'을 찍고 있는 조선 영화인들의 뒷모습,
실패와 허망함과 기이한 열정에도 공허함을 숨길 수 없고, '주인'이 사라진 옛 왕조의 텅빈 터(경복궁) 계단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조선영화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한탄을 보는 이에게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는 '독해'의 문제이기도 하고, 과연 어디까지가 영화의 의도인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자기반영성>이라는 개념, 자기반영성과 정동(박현선) 등을 결합한 연구가 '주체의 의도'나 '명확한 인식' 등의 연구 범주와는 다른 연구 결과를 보여주는 이유다. 이에 대해서는 연구 논문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전제 하에 오늘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3. 선한 조선인, 나쁜 조선인 업자, 그리고 국가: 전시 동원 체제의 동원 서사 혹은 황민화라는 국책 서사
영화 자체에서 갈등 구조는
자본을 손에 쥐고 있는 악덕 영화 업자(나쁜 조선인)와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지만, 매번 현실에 패배하고 '후
원자'가 없는 착한 주인공(선한 조선인)으로 나누어진다.
나쁜 조선인 영화 업자는 착한 조선인 주인공을 곤경, 실업, 질병, 음모를 통한 체포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곤경에 빠트린다.
그런데 이 착한 조선인이 나쁜 조선인이 만들어놓은 총체적 난관에서 '구원받는' 계기는 바로 '국책영화사'가 출범하는 '역사적 순간'을 통해서이다.
이런 서사 구조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 국민총력동원으로 이어지는 전시동원 체제의 전시 협력 구조에서 '업자'와 '국
가'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구축되는지 잘 보여준다. 유사한 국책 영화인 <지원병>의 서사 구조도 동일하다.
즉 이미 당시 국책의 기조는 전시 동원, 체제 협력 문제를 식민지인에게 '나쁜 조선인'과 "좋은 조선인'의 문제로 만들어서
전파하고 내면화하려는 정책적 기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지점은 무수한 연구가 이미 지적한 바이다.
'나쁜 조선인 업자'와 '선한 조선인', 선한 조선인을 나쁜 조선인 업자에게서 구원하는 '국가'라는 구도는 이미 전시 동원 체
제에서 일본 제국의 국책 기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황민화(일본인 되기)란 '좋은 조선인 되기'였다는 연구들의 논의는 바로 이런 맥락이다.
4. 보호하는 제국과 나쁜 식민지인(업자)라는 구도
'나쁜 조선인'과 '선한 조선인' 그리고 보호하는 제국이라는 구도는 여러 효과를 발휘한다.
*먼저 식민 지배와 전시 동원은 '강제적인 지배'가 아니라, '식민지의 나쁜 세력에서 오히려 선한 조선인을 보호하는 일'이
라는 전도
**그러므로 선한 조선인은 나쁜 조선인과 싸우면서 '좋은 일본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대립이 아니라, 문제는 나쁜 조선인이다.
**이런 구도를 통해서 식민지 내부의 여러 그룹을 갈갈이 분열시켜서 적대를 강화하고, 피식민자의 연대를 근원에서 절멸시키려 한 것이 황민화 정책이고, 이를 당시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한 파시즘 정치의 특성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특히 전시 동원 체제는 일본 제국 내부의 쿠데타, 혁신파의 정권 획득을 통해 파시즘 정치가 더욱 강화되어서 이런 식의 구
도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전시 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은 이런 역사적 상황의 <총체적>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5. 전시 동원 체제의 제국의 국책 서사와 헤이트 스피치
또 오늘날 이런 식의 담론 구도가 '좋은 조선인', '나쁜 조선인'을 나누는 헤이트스피치 논의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건 이와 같은 전시 동원 체제와 파시즘이 연결된 역사적 맥락과 관련이 깊다.
김복동 할머니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녀에게 해방은 일본 제국 지배에서 해방이 아니라 '업자'에게서 해방된 것이라는 글
을 보았다. 이 논리가 매번 나쁜 조선 업자와 국가를 구별하고, 동원된 주체와 국가 사이에 '나쁜 조선인 업자'를 들여오는
방식은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롭지도 않고 아주 오래된 일본 제국 문서에서 반복되는 그 어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논리를 구사하는 이가 말하는 것처럼, 당시 국책 문서에는 '선한 국가'가 업자들을 단속했다는 서류가 많다. 그
래서 국가는 '선한 조선인'을 악덕 업자로부터 보호하려 했다는 식의 논리는 연구자가 할 수 있는 <해석> 같은 것과는 거리
가 멀어도 너무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서 다시 <반도의 봄>으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가 참으로 흥미로운 건 철저한 제국의 국책영화이자, '친일' 영화인데, <선한 조선인> 주인공은 이른바 국책영화사(당시 영화 업자 되시겠다.)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병원에 입원하거나, 경찰에 불려나가거나 해서, 매번 <그 자리에> 참석을 못한다.
물론 주인공은 결말에서 <보호국>이나 <문명국>인 일본으로 영화를 배우러, 여러 국책 영화 업자를 대신해서 '출정'한다.
그런 주인공임에도 국책 영화사 업자가 만들어지고 모이고 무엇인가를 하는 행사에는 매번 <부재 중이다.>
전시 국책 선전 영화임에도, 주인공이 <국책 업자의 자리와 현장이 있다는 것>이 전시 동원 체제에서 <제국> 그 자체와 분
리되기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당시 철저한 국책 논리를 대신 수행했던 선전 영화 제작자조차도 <인식>하고 있던, 너무나 상식적인 <사실>이기도 하다는 걸 흥미롭게 보여준다.
선전 영화를 만들면서도, 차마 주인공을 <국책 영화 업자>의 자리에 세우는 것은 무의식적으로라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쁜 조선인 업자> 논의가 <지리상의 발견>이라도 되나?
보호하는 제국과 선한 조선인 사이에 <나쁜 조선인 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뭐 대단한 <지리상의 발견>도 <학문적
발견>도 아니다. 나쁜 조선인 업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전시 동원이 강제가 아니고, 식민 지배가 일본 제국이 아닌 나뿐
조선인 업자에 의한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비약 따위가 성립하는 것도 연구자의 기본 상식선을 벗어난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호하는 제국과 선한 조선인 사이에 <나쁜 조선인 업자>를 대리로 내세워서 문제를 전도
시키는 것은 아주아주 오래된 제국의 국책 서류철에서 흔하게 보던 바로 그 논리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이런 오래된 제국의 국책 논리는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역사수정주의> 아니던다.
이런 논리에 대해 연구로 답할 이유가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이유이다. 물론 이런 논리와 맞서 연구로 싸우는 분들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헤이트 스피치 연구가 역사 연구이기도 한 이유인데, 동시에 헤이트 스피치에 일일이 <응답>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도록
하는 실천전 대안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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