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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문단 내 성폭력, 문학3 좌담회 녹취록 본문
문학3에서 했던 #문단 내 성폭력 좌담회 녹취록이 나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녹취 피드백을 안했는데도 거의 자연스럽게 녹취록이 나왔다. 녹취한 분은 정말 고생했겠다.
저때만 해도 참고문헌없음이 이런 사태를 맞을 줄 몰랐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8a9VtY0QJndGbh-Dn0vaBw9jbiiWm7jGXYjqBnTyT44/edit?usp=sharing
2부
김미정(사회) 저는 문학3 같이 만들고 있는 김미정이라고 합니다. 2부 사회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 공간을 정확하게 5시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요. 이후 행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빨리 진행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조금 전의 1부의 열기를 이어 받아서 많은 이야기들이 더 오고 갔으면 좋겠고 문제의식들이 더 공유되었으면 좋겠고 하는 그 마음에 제가 말을 조금 빠르게 하겠고 박수는 생략을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박수를 너무 치고 싶으시더라도 그냥 참고 한꺼번에 모두 다 끝난 이후에 다같이 박수를 치는 것으로.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혹시 그렇더라도 제 진행이 너무 정신이 없거나 그러면 그냥 말씀을 하세요. 괜찮습니다. 일단 여기 선생님들 3분이 계신데요. 권명아 선생님이시고, 소개를 이따가 하실 거예요. 시 쓰는 하재연 선생님, 평론하시는 심진경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세 분이 10분 정도씩 간략하게. 하재연 선생님이 먼저 좀 발언을 해 주시고 권명아 선생님, 그리고 심진경 선생님이 이어서 발언을 해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재연 선생님이 짤막하게 한 말씀 덧붙인 이후에 조금 전에 1부처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멘트 들으면서 정리 하는 것으로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재연 선생님께서 먼저 발언을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재연 안녕하세요? 시를 쓰고 있기도 하고 문학을 공부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1부 순서 지나고 나서 제가 좀 많이 기진맥진한 느낌이 있어요. 좌담을 잘 못해서. 받은 몇 가지 질문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해시태그 운동 문단 내 성폭력의 의의 관련한 경험이 본인에게 남긴 질문이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우선 여기에 대해서 제가 좀 짧게 써 온 것을 읽는 것으로 시작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만한 건데 아주 짧은 글이라서 따로 인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옥희의 언어
최근에, 겨울옷에 생긴 보푸라기들을 제거하다 말고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옥희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제가 떠올린 옥희는 식민지 조선의 작가 이상의 누이동생입니다. 이상은 1936년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인과 북쪽 대륙으로 떠난 누이동생에게 쓰는 편지 「동생 옥희 보아라」를 중앙에 게재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며 이 편지를 인용한 적도 있고, 오빠 이상에 대한 그의 회고를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 이상의 사상과 생애, 작품과의 연관 관계 등에 대해서만 집중해 보느라 그랬는지, ‘옥희’씨가 집을 나가게 된 사정 같은 것이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아직은 이 사회 기구가 남자 표준이다. 즐거울 때 같이 즐기기에 여자는 좋다. 그러나 고생살이에 여자는 자칫하면 남자를 결박하는 포승 노릇을 하기 쉬우니라. 그래서 어느만큼 자리가 잡히도록은 K 혼자 내버려두라고 재삼 내가 다시 충고하였더니 너도 OK의 빛을 보이고 할 수 없이 승낙하였다.”(김주현 주해, 이상 문학 전집 3, 소명출판, 2005, 233면)
결혼식 같은 것은 언제 해도 좋으니 애인과 함께 가겠다는 누이동생을 말리며 이상이 했던 말입니다. 예전에 읽으면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구절입니다. 그리고 또 이상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내, 금홍이, 임이, 연이…….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동안 내가 그들의 모습과 사정과 내면을 이상의 언어로써만 상상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빠로서, 남편으로서, 남성작가로서, 기둥서방으로서 그들을 바라보던 이상의 시선을 경유해서만 그들의 욕망을 짐작해 왔기 때문입니다.
2016년의 가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일어난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말하기 그리고 이후의 싸움과 연대를 목격하며, 문학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저는 예전과는 같아질 수 없어졌습니다. 이상의 언어들 사이, 그의 언어로 묘사된 형상들 사이 남아있지 못한 언어들에 대해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금홍이도, 옥희도, 작가가 아니었기에 그들의 모습은 이상과 박태원의 편지나 소설 속에 조각들로서만 엿보입니다. 그 조각은 삶의 일부를 구성하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스캔들의 형상에 가깝습니다. 스캔들의 주인공으로서는 어떤 누구도 주체의 목소리를 갖지 못합니다.
식민지의 작가로서, 여성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자 했던 여러 여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언어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옥희씨의 언어에 대해서는 더 잘 알지 못합니다. 이상의 시 「가정」을 분석해 발표했을 때, 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왔던 한 선생님이 이 시에 나타나는 가부장 의식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그 의미에 대해 어렴풋하게는 이해했지만, 식민지의 가난한 지식인 작가의 불안과 실존이라는 주제에 비해 그 질문이 부차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는 이 시의 구절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동시에, “날이면 날마다 그 먼 길을 문 안으로”, “와서 그날의 식량거리를 타 갔다”(위의 책, 235면)는 옥희를, 문패에는 없는 옥희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소문 안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주체이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계속 있어 왔지만, 우리가 잘 귀 기울이지 못했기에 다시 비명과 호소와 고백과 같은 들끓는 형식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검열하고, 삭제하고, 발췌하여 스캔들의 언어로 만드는 시선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러한 시선을 통해서는, 지금 이곳에 실재하는 삶에 대해서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삶 건너편에 존재할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스웨터의 보풀을 떼어내는 것처럼, 어떤 잡음들을 제거하고 나면 이 세계가 매끄러운 새 옷과 같은 세계로 되돌아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세계의 보풀과 같은 것들로 문학의 언어가 이루어져 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제가 생각해 온 문학과 누군가의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고 싶습니다. 변동림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김향안씨, 한때 이상의 유고를 간직하고 보존하여 온전히 전하지 못한 책임을 들어 당신을 마음속으로 비난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우선 이것으로 첫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을 하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김미정 저희가 세 분 선생님들에게 몇 가지 질문들. 같이 이야기 나눌 것들에 대한 말씀을 간단하게 메일로 드렸었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답변을 해주세요라는 자리라기보다는 각각 선생님들께서 그 질문을 접하고 하시고 싶은 말씀들을 하는 자리로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재연 선생님이 조금 전의 정신없던 저의 인트로를 대신해서 나의 읽기 쓰기가 누구의 것이었을까 나의 것이었을까? 누구의 말하기였을까? 등등에 대한 1부에서 진행되어 왔던 이야기들을 이어 받는 이야기들을 해 주신 것 같아서 이것이 인트로라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리고 권명아 선생님께서 자유롭게 10분 정도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권명아 안녕하세요? 저는 권명아라고 합니다. 너무 여러 가지가 걸려 있어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풀면 좋을지 시간은 짧고 고민이 되는데요. 앞에서 여성 평론가가 더 많아져야 한다.. 저 등단한지 몇 년 됐는지 기억도 안 나는 한 30년쯤 된 것 같은데.. 뻥 아니고요. 제가 여성문학회라는 것을 맡게 되었는데 제가 학회 같은 걸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정말 정말 못 하겠다 했는데 제가 왜 학회를 맡게 됐냐면요. 그 학회에 학과의 정규직 교수인 사람이 저 한 명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진짜 학회가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맡게 된 거죠.
뭐냐면 사실 그간 여러 군데에서 페미니즘이 작년부터 원년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한국에 긴 페미니즘의 역사, 페미니즘 비평의 역사가 있었죠. 제가 어디 갈 때마다 저는 생존자다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비유가 아니고 저 말고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 사실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더 많은 여성 평론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는데, 그게 단지 바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사실 그동안 있었던 비평가들도 우리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거잖아요. 왜 그럼 그동안 페미니즘은 기억되지 못했을까 왜 살아남지 못했을까, 그게 정말 복잡하고 착잡한 이야기이고. 앞에 이야기를 들으니 ‘연대’, ‘우리’ 이런 이야기가 사실 많고, 공론장에서도 많이 되는데.. 여기에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도 현실 감각이 너무 다르잖아요. 이 멀디 먼 감각의 낙차를 건너서 과연 우리가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게 제일 고민이 되는 거고 게다가 어떻게 보면 저는 희귀하게 생존한 사람이라 너무 많은 역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꼰대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래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 할까 굉장히 고민스러웠어요. 제가 30년 동안 한 고생담을 나누어야 하는 건가. 사실 앞부분이 경험담을 나누는 형식이었다고 이해는 되는데.
사실 질문지를 받았을 때 제가 거기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왜 이런 질문지를 주셨을까? 설마 이런 이야기만 하실 건 아니겠지? 사실 제가 양경언 선생님이랑.. 이전에 이 주제에 대한 또 다른 현장에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 때는 제가 주최측이고 사회자였기 때문에 길게 말씀은 안 드렸지만 그 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뭐냐면 성폭력에 대해서, 특히 해시태그 운동이 무슨 내 무슨 내 이런 분야를 중심으로 나오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전의, 개인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진술하는 걸 넘어서 이 제도, 이 장의 권력관계를 들여다보고 비판해 달라 라고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개인적 경험의 진술과는 굉장히 다른 형태이고, 권력관계와 제도적 장을 문제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성폭력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는데 문학은 무엇인가 문단은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이렇게 받아 안는 것은 성폭력의 문제제기를 무화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받아 안느냐. 성폭력 문제제기를 했는데 문학이 무엇이냐, 문단의 범위가 어디이냐 이런 걸로 대답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제가 그렇게 질문을 드렸고 문제제기를 했는데 질문지가 그런 게 왔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이 되었어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야 될 필요도 있는 부분이 있겠고 앞에 많은 분들께서 거기에 대해서 문제제기 해 주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또 드는 고민이 뭐냐면 같은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도 생각 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다양하게 생각하는 게 페미니즘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기도 하지만 안 그런 부분도 있다는 고민이 요즘에 더 많이 들거든요. 예를 들면 요즘 많이 나오는 페미니즘의 이슈나 운동을 통해서 나의 글쓰기 감각 문학에 대한 신화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가져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왜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가지고 그런 질문을 해야 하나. 그것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요즘 그런 논의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게 고민이고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응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도.. 제가 부산에 있기도 하고 온라인에서 이 과정을 너무나 미친 듯이 찾아보고 매일매일 업데이트를 하는데 오프라인으로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쉐도우핀즈 분들 만나 뵈어서 너무 반갑고. 그런 의미에서 오프라인으로 듣는 이 기회가 굉장히 소중하고 또 다른 맥락들이 오고 가는 단계일 텐데 좀 그런 지점들이 아쉽다고 할까. 아니면 뭐라고 생각해야 하나? 예를 들어서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한국에 여러 가지 페미니즘 관련 이슈 중 굉장히 예민한 것들 중 하나가, 예를 들어 성노동에 관한 이슈가 있죠. 한국에서는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이 지배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성노동 이슈를 제기하기 위해서 일본군 전시 성노예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사례로 가져오는 것은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페미니즘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런 페미니즘도 있고 저런 페미니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되게 고민이 되는 거죠. 제가 너무 과격해서 그런가? 그런 고민도 되지만 사실 그런 오랜.. 최근 1,2년 동안 그런 고민이 훨씬 더 많이 되었어요.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이런 논의를 볼 때 사실 한편으로는 절망적이기도 했어요. 새로이 도래한 이 페미니즘이 어떻게 가고 있는 건가? 하여튼 그거는 거기까지.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30년이 넘게 오랜 세월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있었고 특히 성폭력에 대한 운동은 오랜 시절 진행이 되었는데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또다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동어반복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걸 고민해야 할까?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제 몫이 아닐까. 왜 문학을 고민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마 제가 서 있는 자리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논의가 되어야지만 다음 단계로.
아 해시태그 그거 아직도 해? 판결 안 나왔나? 이런 식의 논의를 반복하지 않고, 또 하나하나의 생존자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이런 자리에 모여서 잡지에 실어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은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그럼 왜 문단인가? 그런데 문단만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 성폭력에 관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위계에 의한 성차별적인 권력 남용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성폭력의 문제와 함께 권력의 남용과 결합된 성폭력을 문제화하고 이것을 제도적으로 공론화하고 그리고 방지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
아까 생존자 분께서도 문화 예술계 내 노조가 있는, 예를 들면 편집 관련해서는 출판노조에서 대처하고 노동의 문제로 대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위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냥 성폭력이 아니라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할 때에는 문화 예술계에서의 권력 남용이라는 게 어떻게 되고 있냐. 그리고 그 권력 남용이 성차에 따라서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냐. 그리고 만약 이 자리에서 질문 한다면 그것을 권력 남용으로 보기 위해서 문화 예술계에서 권력 남용의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그 권력 남용을 예방하기 위한 논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사실 그 질문이 되어야지만 이후에 논의들이 생산적으로 진행이 될 수 있어요. 트위터나 이런 데서 개별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분들이, 사실은 문단이라는 틀 안에서도 지원을 받을 수가 있구나. 이것이 위계라는 걸 내가 증명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문단 내의 위계에 의한 권력 남용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구나. 내가 안 해도 이 사람들이 해 줄 수 있구나. 라는 장이 되어야지만 이후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이 자리가 그런 자리가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습니다. 시간도 많지 않은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까 자꾸 성폭력 문제제기에 대해서 노답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거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싸워 왔는데요, 사례가 있다는 거죠. 저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대학 비정규직들이 투쟁해온 역사가 되게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한 5,6년 전만 해도 대학에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강사분들이 소송을 할 수 없었어요. 소송하면 이 동네에서 쫓겨나고 그냥 발 못 붙이는 거예요. 지금은 소송을 해야 겠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소송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 전에는 대학 안에서 위계에 의해서 마구 부려 먹거나 폭력이 행사되어도 그것을 법적으로 자유롭게 언제든 소송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안 만들어 졌던 거죠. 그런데 사실은 문화 예술계 내 성폭력도 마찬가지로 법이 있다고 누구나 고소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언제든 보복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마구, 편하게 고소할 수 있는 그런 고소의 상시화, 문제제기의 상시화, 민원의 상시화. 법으로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려면 이른 바 제도 안에 어느 정도 비평가로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뭘 해야 할까. 그런 논의들이 되어야 하지 않나?
예를 들면 피해자를 약하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대하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이 피해자는 약해요. 개인이기 때문에. 이게 뭐냐면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지 않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이거 단지 재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이 되지 않는 한, 사실 현실의 하나하나의 피해자는 약해요. 그건 우리가 이미지로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현실의 피해자를 약한 존재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뭘 해야 해? 제도적으로 어떤 뒷받침을 만들어야 하는가. 문단에서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고소를 당하고 있는데 뭘 해야 할 것인가? 그건 재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너무 시간 많이 지났죠? 메모를 너무 많이 해 놔서 어디부터 말씀드릴지 모르겠는데 일단 여기까지 말씀 드릴게요.
김미정 정말 많은 문제제기를 압축적으로 전달해주셨어요. 그런데 정말 중요하고 1부에서의 이야기들과 연결이 될 향후 나가야 될 방향들..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5가지 정도로 정리를 했는데 이것을 제가 다시 여러분들께 전달을 해 드리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시간이 의식이 되는데.. 계신 분들 이외에도 여기 플로어 분들의 이야기들과 대화들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이어서 심진경 선생님께서.. 반드시 마지막에 배치해 달라고 하셨기 때문에 저도 기대가 됩니다.
심진경 두 분 선생님은 막 뭘 이렇게 써 오시고 준비를 많이 해 오셨는데 사실 저는 입만 갖고 왔거든요. 그래서 사실 앞 부분에 두 분의 얘기를 듣는 동안 머리를 굴려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보려고 마지막으로 요청을 한 건데.. 저도 문학 평론을 했고, 16,7년 한 것 같아요. 문학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지금까지 어찌 저찌 하고는 있는데.. 처음에 선생님 말씀하신 이상의 옥희 얘기를 들으면서 여러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저도 이상의 시나 소설을 좀 읽었으니까. 보면 이상은 한국 문학사에서 언제나 독보적으로 평가 받는 좋은 작가죠. 여러 좋은 문학 작품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라인업이 좀 다를 거 아니에요? 각각의 선별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문학사 기술에서 어떤 작가는 선택과 배제가 되는 와중에서도 언제나 선택받는 작가 중 한 명이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이상의 작품의 한 구절이 떠올랐는데 이상이 마지막에 쓴 ‘종생기’라는 작품인데, 거기에서도 보면 찌질한 남자가 나오잖아요. 정희라는 여자와 서로 누가 먼저 자기의 위장술이나 변신술을 드러내지 않고.. 위장과 변신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내기를 하는데 결국에는 정희에게는 못 당하겠다면서 이 남자가 더 이상 내놓을 패가 없으니 이 여자 앞에서 술 마시고 개판을 치는.. 토 하고 주정 부리는 걸로 마지막 카드를 했는데 정희가 쌩까고 딴 남자한테 가는 거거든요. 그 내용을 감싸는 것은.. 일종의 찌질함이 문학적 포즈로 계속 이야기가 되고 있어요.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저는 sns를 하지 않아서 직접적으로 따라가며 보지는 못하고 기사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전개 상황을 들었는데. 특히 박모 시인의 행동들, 자기 죽을 것 같다, 그러면서 여자들을 내려오게 한 다음에 모텔비부터 술 값 전혀 지불하지 않고 막판에 자신의 찌질함을 보여주면서 굉장히 불쌍한 포즈를 취하면서 성폭행을 한 거잖아요. 그런 남자들의 찌질함이 시적으로는 문학성이나 서정성으로 표현되는데 이상을 이야기했듯이 한국 문학사를 보면 문학 작품 안에서 보여지는 찌질함, 그리고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자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적인 내용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문학적인 포즈로 표현하는 게 지금까지 한국 문학사 안에서 굉장히 하나의 중요한 문학성의 판단 기준으로 계속해서 반복되어 온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문학사를 공부하는 분들은 많이 접하셨겠지만 많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기를 소외시키는 사회 현실에 혼자 분노하고 소외감에 치를 떨고 그러는 남자들이 그것을 대체로 어떻게 극복하냐면 여성과의 만남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거죠.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 같은 소설도 그렇고. 결국에는 3명의 여자를 거치고 나서 이러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글쓰기를 선택하며 끝나잖아요. 그러한 방식의 노만 메일러의 ‘아메리카의 꿈’ 같은 경우도 자기 부인을 죽이고 나서 도망 다니는 남잔데 그 남자의 찌질함도 일종의 아메리카, 미국 문학적 남성의 발견이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찌질함이 예술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왔다는 거죠. 그것이 단순히 찌질한 게 아니라 나는 찌질하다는 것을 자기 비하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문학적인 것으로 평가해 왔고 지금까지 문학작품에서 새로운 주체로서 자신을 선언하는 많은 남성 인물들이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를 표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현실에서 박모 시인이 보여줬던 찌질함이 문학 작품과 결합이 되면 대단한 서정성이나 문학성의 포즈로 평가를 받아 온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문단 내 성폭력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없고, 그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는 언제나 자기 경험을 경유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런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 현실에서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된 남성 작가들이 보여주는 모습- 결국 찌질남들이 문학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어떻게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대상화되고 타자화되었는가가-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한국문학의 히스토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좋은 문학 작품의 기준이라고 판단해 왔던 것, 당연한 규범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된 거고. 한국 문학 안에서 정전으로 확정된 작품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정전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에 문제제기를 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김미정 이것이 문학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술적인 것이다 라고 해 온 그 문학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의 회로에 대한 정리의 말씀. 또는 그 이후에 조금 더 같이 고민해야 할 굉장히 구체적인 사안인 것 같아요. 문제가 무엇이다 라고 공유한 이후에 뭔가를 구축해야 할 때,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아요. 하재연 선생님께서 다시 이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 주시고 다시 여기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하재연 주신 질문 속에서 문단 내 성폭력의 정의와 범위 이런 질문들도 있었어요. 제가 페미라이터 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이런 수많은 질문을 모으는 과정을 거쳤고, 작가들이 같이 답변을 모았는데, 힘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44페이지에 달하는 답을 작성을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성폭력의 범위와 정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왜 질문 하는가 라는 질문부터 봉착한 거죠. 그것은 무엇을 배제하고 선을 긋는다기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문단을 둘러싼, 문학이라는 시스템을 둘러싼 권력관계와 배치들을 더 보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들을 실정화 시키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구요. 그 답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성폭력의 범주의 테두리에 대한 답도 있었지만, 사실은 해시태그의 문을 두드린 피해자들이 문단 내 성폭력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이고, 그것이 현재의 규정이 아니라 미래의 규정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라는 답변이 인상에 남았어요. 말하기의 주체성, 언어의 주체성을 피해 생존자들이 가져 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로 말하지 않겠다, 혹은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과 이후에 말하기와 듣기와 쓰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아까 왜 이 상황에서 문학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지.. 이런 선언의 언어들이 문학일 수 있겠는가 비판적인 질문을 하셨는데. 문학이라는 게 본질이 있다기보다는 시대적으로 문학을 둘러싼 관습, 매체, 독자, 소비의 양태들, 향유의 장이 달라지는 것인데, 무엇보다 지금 이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그 장에 대한 질문을 가장 역동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럼에도 성폭력의 문제에서 우리가 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생각을 해 보자면 역시 이것은 언어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가지 매체들을 가지고 있지만 언어가 이 오염된 세계의 폭력성을 가장 잘 재현하고 있고, 그 오염과 폭력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오염된 언어를 다시 우리가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문학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오염된 도구를 가지고 다시 그 오염에 맞서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페미라이터 활동을 하면서도 어떻게 대항해야 할 것인가, 이 오염된 언어들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논의하면서도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가 가해자의 탈권력화 이야기였어요. 탈중심화, 탈권력화는 그들의 권력, 언어, 힘을 해체시키는 것이죠. 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조에는 그들의 권력과 언어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굉장히 강하게 작용하기 있기 때문이죠. 왜 이것이 위계냐고 물어보는 상황이 발생하는데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 출판계에서도 노동의 위치건, 여러 시스템의 위치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권력과 상징권력까지 탈 권력화 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독서와 쓰기와 비평의 방향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런데 실제 권력을 해체시키는 일이 지난하잖아요? 그렇다면 우선은, 물론 동시적이어야 하겠지만, 독자로서 비평하는 자로서 쓰는 자로서 상징 권력들, 언어 권력들을 어떻게 해체시킬 것인가. 저는 쓰는 자로서 읽는 자로서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치열한 질문에 부딪쳐 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권명아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해시태그 운동이 문학적인가 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아까 성폭력은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왜 문단에서 페미니즘 적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성폭력과 관련해 페미니즘이 그 동안 역사에서 쌓아온 중요한 명제가 있는데,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그 어떤 다른 게 아니라는 거죠. 그 전제. 성폭력이 왜 성폭력이냐면 성차별화 된 권력의 위계에서 나오는 권력 남용으로써의 성폭력이기 때문이에요. 성폭력을 문학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받아 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고, 이 해시태그 운동에서 가장 먼저 받아 안아야 할 질문은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그러니까 문단 내 성폭력에서 문단의 범위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것은 성폭력은 성폭력이라는 가장 기본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을 회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김미정 실은 1부에서도 잠시 언급이 됐지만 패널분들에게는 미리 준비된 질문을 공유했고, 2부 패널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플로어에 계신 분들은 어떤 질문이 오고 간 지에 대해서 맥락상으로만 분위기 파악을 하신 것 같아서 아주 간략하게 어떤 질문이었는지 소개 해 볼게요. 우선 문단 내 성폭력의 범위와 정의, 해시태그 운동이 촉발된 이후에 각종 문예지와 언론의 반응에 대한 평가, 성폭력 생존자들의 증언 이후에 여성주의적 원리로 문학 출판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폭로나 선언 같은 언어가 문학일 수 있나? 문학이라면 어떤 면이 아니라면 어떤 면이 아닌가? 독자 입장에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작품을 읽어야 하나? 작품 속에서 윤리는 어떻게 강구되어야 하나? 예술작품에서 정치성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이런 질문들이 공유가 되었고 그것에 기반하여 말씀들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권명아 선생님이 처음에 말씀하시고 지금 덧붙여 주신 것은 지금의 촉발된 문제제기가 소모되거나 소비되지 말아야 한다는 우려와 문제제기. 그리고 처음 발언에서 말씀하셨을 때 쌓아온 역사와 사례가 있는데 그것과 현재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소중하게 들렸어요. 하재연 선생님은 실제로 페미라이터 활동을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겪고 계신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부분도 더 이야기가 되면 좋겠고. 심진경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아주 명쾌하게 1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문학성과 문학과 예술. 단지 장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유통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실마리를 주신 것 같아요. 혹시 덧붙이실 이야기들이 있으신가요? 플로어에서 이야기를 해 주셔도 좋고, 세 분 선생님께 질문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플로어1 안녕하세요? 저는 국문학과 재학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저는 문학과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목격하고 들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문단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문단이라는 게 무엇인가가 저의 첫 번째 질문이었고, 거기에서 파생된 게 명확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에요. 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문인이 등단을 했을 때 명확하게 가입되는 기구가 없습니다. 한국작가회의라는 조직이 존재하지만 정회원이 의무가 아니라 자율적인 가입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 외에도 문인들이 보통 고등학교나 대학교 여러 강의에서 말을 할 때 가끔 나는 문단에서 이 정도 위치에 있다 이 정도 힘이 있다는 발언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 경우에 제가 웃겼던 건 그 문단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한 명의 시인이자 소설가인데 그 사람이 힘이 있다는 건 누가 증명해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학습자로서, 그런 분들은 교수자로서. 그 분이 저에게는 문단 자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분이 저 같은 학습자에게 문학이란 이런 것이고 이렇게 해야 한다, 문단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발언했을 때 저에게 문단은 그 한 명의 작가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 것 같아요. 이 점에서 앞으로 문단에 들어가고 싶은 학생들 모두가 이 질문을 함께 나누고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내부에서도 형성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미정 혹시 여기에 대해서 좀 덧붙여서 이야기 하실 분이 있나요?
오빛나리 안녕하세요? 오빛나리인데요. 저도 말씀하신 바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덧붙이는 건데 우선 저는 성폭력은 성폭력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굉장히 동의를 해요. 동의를 하고 공감하고 그렇게 다뤄줘야만 하죠. 제가 탈선 대표이기도 하고, 문단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한 사람으로서 몇 마디 덧붙이고 싶은데요. 예고라던가 이런 상황이 특수했어요. 내가 문단에서 이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이 문인들 사이에서도 우스운 말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왜냐면 우리가 만나는 문인은 그 사람밖에 없거든요. 제가 1부에서도 말했지만 합의되지 않은 기호로만 둥둥 떠다녔고, 우리가 성숙하지 않았고 고등학교이니 삶과 밀접한 곳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강사의 그 말이 실제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게 허세였구나 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거지 그 당시에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문학과 섹슈얼리티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배워 왔어요. 문학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해서 성폭력과 성의 경계가 모호해 진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제기를 할 만한 기구가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성폭력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동의한 적 없는 기호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무엇이 거짓말이고 무엇이 가짠데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힘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으로 인해서 성폭력을 은폐하려는 게 아니라 그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되새김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특히나 그런 것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제가 연대 활동을 하면서도 계속 걱정되는 것이 그런 거예요. 이 순간에도 예고에 가고 싶어 하는 중학생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예고에 문창과가 전국에 2개 밖에 없는데, 그 예고에 문창과가 있고 나는 글을 너무 쓰고 싶고 꿈이 있고 그런 이유로 예고에 가고 싶어 해요. 성이나 문학이나 이런 것들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예술은 어때야 할까, 문창과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고민이 많이 들었거든요. 그 작업을 동시에 같이 해 나가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 맥락이 있기 때문에 계속 말하면서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작가를 지면을 얻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런데 중, 고등학생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뭔가 예술적인 행동을 하는 무언가. 예술가들은 지식인이고 문학인들은 예언가고. 실제로 제가 그렇게 배웠거든요. 놀랍죠? 저는 진짜 몰랐어요. 그런 거 알려주지 않잖아요. 사회화되지 않아요. 내가 사회화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그 문인이었어요. 그 문인이 나에게 문학이자 예술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중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기구가 무엇이 있을까? 그 중에 그런 허망한 기호를 해체하는 작업이 있다고 생각을 한 거죠. 기성 문인들의 자리도 물론 중요하지만 습작생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고 예술 입시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들하고도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김미정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문단이라는 말을 둘러싼 딜레마를 확인한 것 같기도 해요. 굉장히 공소한 기호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는데.. 한편으로 공소한 기호가 신화가 되어서 개개인에게 내재화 되고. 이런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령 문단이 단일기구가 존재하는 곳이었다면? 이런 가정까지 하게 되고. 조금 전에 또 교육, 출판, 잡지. 여러 제도들의 공조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권명아 문단에는 작가들인 경우가 많지만 문화 예술계 해시태그 중 많은 다른 분야는 교수인 경우가 많죠. 학교 교육과 문화 예술 제도와 여타 출판, 미술 분야의 레지던시 기획, 전시 이런 것들이 다 얽히고 설켜서. 오빛나리 선생님께서 내가 그런 걸 모르니 이 사람이 문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요. 제가 문단권력을 비판해온 사람이라 악역을 하고 이야기를 하자면, 인적 배치. 누군가를 선발하거나 할 때 합리성이 거의 없고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죠. 권력을 가진 사람의 개인의 판단이에요. 등단조차도 취향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고, 제도가 인격화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제도의 합리성, 검증 절차를 만들지 않고 한 인간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구조를 대표하는 방식으로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전부 좌우되는 거예요. 너무나 익숙한 거죠. 그래서 자기가 마치 문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등단제도를 비롯하여 문단 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가 되어 있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제도에 대한 실감. 제가 부산에 처음 내려가서 대학원생들을 만났을 때,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취직을 해서 부산에 갔는데 논문을 쓰려면 학문의 장에 자기 글을 개입하는 감각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했을 때, 학문의 장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많이 소외되고 어쩌고 있다고 하지만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학문 장이라는 게 이렇게 어디에 가서 찾는 게 아니라 감각이 있는 거죠. 그런데 권력으로부터 멀리 있을수록 감각이 없는 거예요. 문단이라는 게 없지 않나요? 이런 이야기 하잖아요. 있어요. 권력으로부터 멀수록 그 권력과 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거죠. 권력 자체가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에 접근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문단의 실체가 모호한 게 아니라 제도는 분명히 있어요. 문단이 없다, 문단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김미정 문단. 문단. 어렵네요.
심진경 제가 예고의 상황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어요. 강사로서 그 시인을 선택해서 학생들과 접촉하게 한 학교의 관리, 감독 문제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학교가 그 시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을 관리, 감독할 책임을 강사에게 줬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성폭행했기 때문에 학교가 고발을 해야지 학생이 개별적으로 강사를 고발하는 건... 1부에서도 나왔지만 성폭력과 관련된 문제는 칼을 들고 위협을 느끼고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의 상황에서만 성폭력으로 인정이 되거나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고발하기 보다는 학교가 그런 역할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나 1차적으로는 문단과도 상관없는 문제고 그 학교 안에서 벌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는 그렇게 접근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2000년대에 대문자, 소문자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등단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대문자 문학으로서의 권위를 해체하고 소문자 문학들, 1인용 문학들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지금에 와서는 문학이 더욱더 해체 해체 되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요. 여전히 한국에서 문학은 토템화 되어 있고 신화화 되어 있기도 하고, 그런 게 너무 강력한 것 같아요. 문학이 우상 숭배화 되고. 저도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1학년 학생들을 만나면 너무나 문학에 대한 순진무구함이 있는 거예요. 어떤 학생은 저한테 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만 쓰고 죽겠대요. 아 그러시든지.(웃음) 그런데 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건 없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가 생각하는.. 19세기 영국의 브론테 자매니 이런 작품이 지금도 엄청나게 번역이 되어서 종수가 100종이 넘어요. 제인 에어 같은 작품만 하더라도. 그런데 제인 에어가, 폭풍의 언덕이 그렇게까지 좋은 작품이냐? 사춘기적 감수성이 풍만할 때 읽으면 좋은데 나중에 읽으면 음? 너무나 유치하고, 근친상간적이고, 자폐적인.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단 하나의 문학 작품은 사실 없는 거거든요. 이론적으로, 관념적으로는 대문자 문학을 해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남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문학의 권위가 일종의 남근적 토템처럼 있어요. 예를 들어 고은 선생 같은 경우. 이야기하면 안 되나? 살아있는 신화잖아요. 동상만 안 세워졌지. 그런 식으로 계속 언론에서도 반복해서 얘기하고 정작 그러면서 고은 선생 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별로 없어요. 꼴랑 어디서 들은 만인보. 그래봐야 만 명의 사람에 대한 스토리인데 그런가보다죠. 좋은 문학작품이라는 기준과 아닌 기준이 있는데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갈등하고 균열이 일어나고 그래야 하는데 어떤 단일한 목소리로. 한국 문학의 대표 주자. 토템. 이런 식으로 떠받드는 우상숭배가 여전히 있는 게 아닌가. 그런 것들이 이제 문학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문학에 대한 이상한 관념을, 우상숭배와 왠지 순결해야 할 것 같고 오! 문학 이렇게 기도를 드려야 할 거 같은 잘못된 관념들을 꾸준히 쌓아 오는 게 아닌가. 이런 것들을 해체하는 거는 권명아 선생님을 비롯해서 우리 같은 사람이 해 왔다고 했지만 안 된 거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는 걸 보면 되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좀 더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명아 심진경 선생님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저는 끝내 정색하고 앞에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라는 말에 대해 조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최근 연예 프로그램에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 복귀한 연예인이 있잖아요. 그런데 마치 군대에서 돌아온 남동생처럼 고생하고 왔다하며 깜짝쇼도 해 주고 밥도 먹이고 하더라고요. 성폭력이 아니고 개고생하고 왔다라는 식? 여성에게는 무고, 또는 예민함,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아 라고 하죠.. 최근에 진보 정당 안에서도 성폭력 문제 제기했을 대 쟤는 좀 이상하더라. 저렇게 해서 우리 당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다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성폭력은 성폭력인데 그것을 항상 다른 식으로, 군대 갔다 온 것처럼 개고생 한 거고, 무고죄고, 예민한 거고 이런 식으로.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을 때 이것을 나의 질문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폭력은 성폭력이고 권력과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지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일으킨 것도 아니고 저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가 문학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성폭력은 성폭력.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아야 한다. 발생하는 권력 구조로써의 문단은 계속 고민해야 한다.
김미정 시간을 10분 정도 더 벌어서 5시 10분까지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재연 선생님도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여러분들이 표시를 하신 것 같아서.
플로어2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고 있습니다. 권명아 선생님 이야기 들으면서 문제를 스트레잇하고 중요하게 지적을 해 주셔서 감사한데 그 문제에 대한 제 어려움을 말씀 드리면요. 저도 페미라이터 활동을 하고 있고 저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소설 쓰는 분들과는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노조가 중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들 사이에서 노조가 생길 수 없는 이유가 뭔가 생각하면, 우선 소설은 잘 모르겠다고 괄호를 쳐 놓기는 했는데요, 저는 시를 쓰면서 돈을 벌지 못하거든요. 이게 글 쓰는 행위가 노동 행위와 연결이 안 되는 상황인 거죠.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생겨나려면 내가 하는 일이 노동이어야만 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가를 받는 제도 안에서 조합이 생기고, 그 안에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과 같은 것들도 생길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문단이라는 게 실체가 없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투명하다고 생각해요. 시스템으로 정확하게 정해지지도 않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동, 창비, 문지, 민음사 머릿속으로 분명히 떠오르는 건 있지만 연합체가 있나? 고민하게 되고. 노동과 연결되지 못하는 문학 종사자 안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고민이 많이 됐고 앞으로도 생각을 이어가야 할 것 같고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전부터 고민이 많이 됐던 것이기도 한데요.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영화, 미술, 문학계 다 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만나려는 노력도 있으니까.. 이 노력과는 조금 다른, 커다란 출판사들이 나서서 기구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고.. 출판사들끼리 연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논의라도 시작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재연 저도 그 생각이 들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던 건데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 이후 여성주의적 원리로 문학 출판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여성주의 원리로 가기 전에 근대 자본주의 원리로라도 문학 출판계가 구성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동의 이야기죠. 왜 자꾸 문학에 신화가 생기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 학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개인이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가 있어요. 이 신화가 왜 자꾸 재생산이 되냐면 노동으로 보상이 안 되고 문학을 자꾸 보상되지 않는 상징권력으로 치환을 시키는 거예요. 쓰기라는 것을 시장에 다 맡길 수는 없지겠지만, 자율성을 오해하면서 권력화를 만드는 이상한 곡해의 회로들이 생겨나고 있거든요. 저는 편집위원들도 편집자가 하든 비평가가 하든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 시스템이면 좋겠고 제가 시 원고를 보내면서 원고료를 이야기를 안 해요. 어떨 때는 원고료가 안 써져서 청탁서가 오기도 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노동이라는 저 먼 여성주의로 가기 전에 근대 산업사회 원리라도 통용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부분들이 합리성으로 가는 되게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부분에서 제일 좋은 것은 작가 조합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조합에서 때로는 제명할 수 있고, 권리와 의무를 같이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노동의 첫걸음도 못 가고 원고료가 얼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조합을 만들 수 있겠어요. 이런 논의들이 한국사회의 후진성과 얽혀 있는데 많은 분야에서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신화 해체를 같이 해 나가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자율성이라는 기호를 더 섬세하게 많이 다뤄야 할 것 같다. 노동과 문학을 분리시키며 얼마나 이상한 권력을 낳았는지를 봐야 하고 실제로 학대와 유착될 수밖에 없는 게, 도제 시스템으로만 보상을 받으면서 그것으로만 미래를 꿈꿀 수밖에 없는.. 쓰는 이들의 미래가 불안정한 이 상황 자체를 학계에서 같이 해결하지 않으면 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물론 지금 학계에 남성들이 너무 많죠. 가장 좋은 거는 출판사에서 편집위원 (남녀) 동수부터 실현해야 해요. 어떤 남성들은 3~4군데의 위원을 겸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성만이 뛰어나서가 아니거든요. 새로운 매체들이 생겨나고 있잖아요. 새로운 매체와 지면들이 나눠 가지는 탈권력화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실험들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출판사에 독자로서 비평가로서 작가로서 끊임없이 요구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김미정 문단을 둘러싼 문제뿐만 아니라 재생산 시스템으로써 교육 문제, 학교와 관련한 문제도 중요하다는 재미있는 말씀이었는데. 원고료 등.. 같이 합의하고 설득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의.. 굉장히 슬프네요. 그런 부분이요.
권명아 예술인들도 노조 만들 수 있고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있는데 문학 분야는 특히 거의 가입이 안 되어 있죠. 문학이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닌가? 출판사는 출판 노조가 있기 때문에 작가들과는 다른 문제일 것 같고요. 신해욱 선생님이 여성예술인연합에서 문체부에 제안한 걸 다 봤거든요. 거기에서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보장하라는 게 기본 골자예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이런 것들이 하나도 되고 있지 않은데 굉장히 추상적으로 예술가들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방향으로 이 제안들이 되어 있어서.. 지금이야 말로 계약형태나 부당한 착취를 문제제기 하는 노동과 계약과 고용에 대해서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데요. 문학3에서는 편집위원 기획위원 월급 주시나요?(네!) 정당하게 보수를 받고 있나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노동의 여성화인거죠. 왜 성폭력이 많이 나타나냐면 이렇게 불안정하고 착취가 많은 곳일수록 여성들이 많이 가게 되는 이런 구조. 문학계가 특히 그렇죠. 위의 관리자는 거의 다 남성인 거죠.
김미정 아쉬운데 시간이 13분 가량 남았어요. 지금 발언하신 것 이외의 어떤 이야기?
플로어3 안녕하세요? 저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10월에 처음으로 트위터에 올린 xx라고 합니다. 여기에 계신 선생님들과 페미라이터 활동하시는 시인 분들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분산시키고 해체시킬 수 있나? 가해자들을 어떻게 하면 처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 할 수 있고 직접 행동할 수 있는데, 그것도 저는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정도의 힘을 갖고 계신데 이 순간에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당한 게 성폭력인지 조차도, 내가 당한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그 언어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붙이는 게 성폭력의 본질을 흐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당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다 이런 걸 더 잘 알려줄 수 있는 검색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시를 취미로 배웠고 미술을 하는 사람이고 제가 문단 내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에게 시를 가르쳐준 사람이 성폭행을 했을 때 그건 단지 성폭행일 뿐이지 문단 내 성폭력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나는 문단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 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성폭행과 다르게 분명히 문단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에는 특별한 지점과 특징이 있어요. 예를 들면 시를 합평할 때 성적인 내용을 들면서 그 시에 의미 부여를 한다든가 그걸 잘 못 알아들을 때도 있고 이게 성희롱인가 싶을 때도 있는데.. 수많은 케이스들이 더 이야기가 되면 좋겠고 그 앞에 그냥 성희롱 성폭행이 아니라 꼭 문단 내라는 말이 붙고 카테고리가 생겨서 시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같다고 읽혀질 때 그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미정 플로어 선생님들은 말을 아껴 두셨다가 이따 조금 시간을 드릴게요.
플로어4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 단체가 여기에서도 시작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출판사에서 힘을 모아 달라고 하지만 노동 운동을 시작하면서 사장님 허락받고 시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로 아카이빙 하는 계정 가지고 계신 분 계세요? 아니면 그런 식의 아카이빙을 할 수 있는 계정이라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발언을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페미라고 불리던 90년대 활동하던 분들도 트위터 같은 공간들로 들어오셔서 본인들이 했던 것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언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를 키우지 않으면 좋겠어요.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쓰고 이야기를 한 이유가 어떤 구조의 희생자이고 약자이기 때문에 이런 범행의 대상이 된 것인데 그 구조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고민을 늘어놓는 게 나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거 이상의 실질적인 효과나 대안이 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당장도 아카이빙을 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당장 신학기에 또 새로운 희생자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인데 기존의 권력을 해체한다든지 이렇게까지 큰 고민을 하는 거는 그냥 문제를 크게 띄우는 것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문단 내 성폭행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서 공격적인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유사한 사건을 해결하려다 좌절했다면 그런 경험조차도 다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 비정규직 강사들이 유사한 권력 구조 속에서 혼자 피해자로 있다가 점점 소송도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런 관련 경험들을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지 구체적인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발언 좋았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이거에서 끝나면 그거야말로 자기만족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미정 페미라이터 쪽에서 아카이빙 작업과 트위터 계정...
하재연 네. 해시태그 00내 성폭력 아카이빙 작업은 각 분야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어요. 인력이나 여러 문제로, 또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학생들의 신변 보호 때문에 원활하지 않죠. 그러나 아카이빙을 많이 했고, 아카이빙 작업이 없었을 때와는 달리 조금씩이라도 성과들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페미라이터 내에서도 2017년에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했고, 따로 공식 계정 말고 기록과 듣기 또 이후의 작업으로 이어가기 위한 계정이 있어요. 지금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이전에 한꺼번에 많이 터져 나왔고 지금 보복성 고소로 주춤하거나 많은 피해를 입고 계신 상황이고 해서, 사실은 이 말하기와 듣기 기록하기와 쓰기가 굉장히 오래 가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페미라이터 한다고 해도.. 잘 모르시잖아요. 여기에 오신 이렇게 관심이 깊은 분들도 잘 몰라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김미정 한 분 정도 말씀을.. 아주 짧게.
플로어5 아카이빙 이야기를 해 주셔서요. 저는 봄알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 관련해서 아카이빙 트위터 이런 게 잘 안 올라오는 건 고소 관련해서 많이 지우고 해서 인 것 같아요. 저희가 다음 주 쯤 새로운 프로젝트를 펀딩을 하는데요. 책 제목은 ‘참고문헌 없음’ 이고요. 이번에 문예지들에 문단 내 성폭력에 관한 글들이 많이 실렸잖아요. 그 글들을 재수록하면서 또 새로운 글들을 모아서 문단 내 성폭력에 관련한 피해자, 당사자, 지지자에 대한 글을 발간하려고 하고 있고요. 그 책은 수익금을 피해자들의 고소비용, 의료비에 지원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미정 이 부분들에 대해서는 이 자리가 파한 이후에 소개 해 주셔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플로어6 안녕하세요? 저는 페미니스트 독립 문예지 소녀문학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권명아님께서 성폭력은 성폭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생각하고요. 다른 게 아니라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분명히 단순화 시켜서 문제 해결에 기여를 해야겠지만 복잡화해야 할 때는 서슴없이 복잡화시켜야 담론에 깊이를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을 이것저것 하고 있는 중인데 복잡화된 담론을 생산하는 분들이 실질적으로 사건 해결에 기여를 많이 하기도 했거든요. 복잡하게 볼 때는 복잡하게, 단순하게 볼 때는 단순하게 봐야 하지만 그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단순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우리여야 한다. 우리가 그 말을, 언어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미정 아까 손 드셨던 분? 없으신 가요? 지금 못 다한 이야기들, 개별적으로 의견을 더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자리 파하고도 귀가하시면서 진행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들 이야기 죄송한데 1분 정도씩만 부탁을 드려도?
권명아 성폭력은 성폭력이다에 대해서 코멘트를 주셔서 어떤 의미인지 이해는 하고요. 복잡화된 담론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사실 문단 내성폭력에서 가해자들의 사후 고소고발이나 이것은 성폭력이 아니다 라고 치환하는 작업이 많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은 성폭력이다 라는 것을 인정해 내기 위해서 문단이라는 혹은 문학권력이라는 장에서 어떤 것을 해야 되는가 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하재연 제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의 충격과 함께 작년 가을 이후의 사건이 제가 문학을 하고 여성으로서 한국에 산다는 정체성에 굉장히 큰 충격과 전환을 준 사건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세월호 사건과 이어지는 것이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것들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많은 움직임도 있었고. 그런데 자꾸 잊거든요. 잊게 만드는 거대한 시스템도 있는데. 되게 많은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 안에 우리가 잘 지켜보고 또 같이 말한다면 또 해결을 구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한테는 문학과 함께 삶을 구성해 내는 연대의 경험이 되게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연대의 경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진경 예를 들면 가라타니 고진 같은 사람이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 더 이상 문학이 지적 도덕적 책무를 지지 앟아도 되었다 라고. 문학의 임무가 다 끝났기 때문에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이런 식의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나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책무를 지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현장이. 고양예고 졸업생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성폭행에 대해서 고발하는 내용을 쓰고 선언하신 적이 있는데 그런 걸 보면서 거꾸로 문학의 이름으로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이런 것들이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담론의 주체로서 여기 모인 분들이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하루, 이틀, 일년, 이년 동안이 아니라 아카이빙이 계속 쌓이고 쌓이면서 질적인 변화나 축적되는 과정에서 형질 변화를 일으키다 보면 또 새로운 문학의 이름으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나름 희망적인.
김미정 지금 오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1부와 2부가 개별적으로 진행이 되었어야 되지 않나. 이 엄청난 이야기들이 이 짧은 시간에 이야기 될 것이 아니었구나. 아쉬움과 이후의 과제에 대해서 매우 생각하게 됩니다. 굉장히 광범위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오고 갔다고 여기셨다고 할지라도 이후의 과제에 대해서 각자 가지고 가는 부분이 있을 라고 믿고요. 오늘 충분히 이야기 나누지 못한... 오히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던져 졌다고 생각하는데. 문학3에서 운영하는 문학웹이 있어요. 웹상에서 여러분들께서 후기들 또는 못 다한 질문과 이야기들 나누어 주시면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향후 문학3에서 고민하고 기획하는 것들에 오늘의 이야기들, 여러분의 목소리가 반영될 것 같아요. 웹에서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오늘 이 행사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 같이 격려와 용기 주는 박수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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