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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 혹은 여자떼에 대한 공포: 페미니즘과 '공론장'논의 비판 본문
여기서도 너는 네 신분을 밝히라,
여기 시장 한복판에서
외치라 그것, 쉬볼렛을, 저 밖으로
낯선 고향에 대고
2월, 노 파사란
파울 첼란, <쉬볼렛>
아래 요약은 다음 글을 토대로 간단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 페미니즘이 계몽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왔고 특히나 '몰지각한 대중'을 자꾸 발명하는 계몽주의 문법을 페미니즘이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비판해왔습니다. 이게 페미니즘이라는 테두리로 꼭 환원될 필요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이론과 실천, 정치에 대한 사상의 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근 몇년간 해시태그와 네트워크 조직으로 드러난 여/성들의 힘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지녔고, 단지 이를 동의하고 아니고로 논의될 사안이 아닙니다.저는 메갈 사태부터 줄곧 메갈을 지지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비판과 개입의 방식", 즉 메갈을 사유하는 방식과 이론틀을 페미니즘 내에서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현재 논의되는 해시태그와 네트워크 페미니즘을 논하는 방식이 "속도"나 "마샬 맥루한" 같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건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해서 논의의 몇 부분을 비판해도 계속 왜 그런 비판이 나오는지 전달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유의 궤적을 전해봅니다. 물론 이 글은 이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 글이 필요한 어려 형태의 페미니스트들이 사유를 이어나가는 데 다소간 도움 되는 논의 단초와 개념, 사유틀과 이론을 제공하는 차원이 더 강합니다.
저는 오랜 연구를 통해 논문과 단행본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해왔습니다. 그중 최근 사안과 관련한 두 논문의 개요만 전해드립니다.
권명아 <비교 역사적 연구를 통해 본 정동 연구의 사회정치적 의제: ‘여자 떼’ 공포와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의 힘>, 여성문학연구, 2016년 12월 이하 <여자떼>
권명아, <정동의 과잉됨과 시민성의 공간>, 서강인문논총, 37호, 2013년 이하 <과잉됨>
저는 최근 페미니즘과 새로운 주체의 부상,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주체의 부상에 대한 반페미니즘적 공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분석했습니다. <여자떼>
"물론 최근 새로운 여성 집단 주체의 대두가 인터넷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세대 문제이다. 또 이러한 인터넷 커뮤니티가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세대 간의 인정투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 간의 차별화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여성 집단 주체의 등장에서 차이와 반복의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도 역사적 관점이 필요하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대두한 새로운 여성 집단 주체를 이성과 성찰이 결여된 ‘근본주의적 폭도’, ‘패륜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이성, 성찰, 대화와 의사소통으로 상징되는 ‘공론장’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반여성주의적 담론의 부상은 새로운 여성 집단 주체의 부상과 반페미니즘 공격이 세대 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역사적 반복 혹은 역사적 구조화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할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의사소통적이라고 정체화하는 공론장 주체는 근대성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항상 ‘불가해한 타자’의 등장과 거기 동반되는 정동적 힘을 ‘과잉’과 ‘위협’으로 배제함으로써 스스로의 ‘이성적’ 지위를 정당화해왔다. 또한, 이런 절독 운동의 주체들이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이론의 지위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
<여자떼>
즉, 자신을 공론장의 이성적 주체로, 불가해한 타자를 몰지각한 떼거지로 구별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제어할 수 없는 정념에 사로잡힌, 불가해한 파괴력의 소지자로 간주해온 역사와 담론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다시 <여자떼>의 논의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즉 메갈리아나 여타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이른바 공론장의 담론 구조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거나 편입을 거부한 채 항상 그 외부나 수면 아래에 잠복(잠수)해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잠수’를 커뮤니티 유지의 원리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이른바 공론장이라는 담론 공간 ‘위로’ 부상하자마자 이들이 ‘위협적 힘’이나, ‘야만적 근본주의’, 반문명적 패륜 집단으로 공론장에 적대적인 의미로 규정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여성의 집단적 힘의 부상을 인종화 과정을 통해 공론장에서 배제한 것은 한국의 근대사를 통해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사에서 ‘풍기문란’이라는 규정이 작동한 방식이 전형적이다. 풍기문란 집단에 대한 규정은 근대적 시민 주체(선량한 시민)와 반문명적이어서 계몽과 ‘처벌’이 필요한 풍기문란 집단이라는 정체성 정치를 통해 만들어졌다. 근대적 시민 주체의 개념과 이상, 제도와 가치는 ‘풍기문란 집단’이라는 반 근대적, 반문명적인 정체성 집단을 생산함으로써 구축되고 재생산된다. 즉 풍기문란 집단은 야만, 금수(짐승), 떼거리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한 반문명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타자로서 매번 인종화 된다. 근대적 주체와 ‘문명화된’ 공론장은 이렇게 ‘야만적 떼거리’를 계몽하고 문명화시키는 장이기도 했다. 물론 풍기문란 집단으로 구별되는 속성은 여성뿐 아니라, 하위 집단 남성,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무한히 증폭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근대 공론장(지식, 문학, 표상 체제를 아우르는)에 이러한 인종화 된 타자가 진입하는 것은 ‘홍수’, ‘문란’, ‘퇴폐’, ‘망국’, ‘폭도’와 같은 과잉의 표상을 통해서였다. 이 과잉이야말로 정동의 힘에 대한 근대적 표상의 전형적 방식이다. 즉 과잉된 힘의 분출에 대한 표상 체계는 역설적으로 그 사회에서 항상 ‘잠수’(잠재성!) 상태에 있어야만 했던, 공론장 주체라는 표상과 대표성에서 배제되었던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의 힘이 솟아오르는 사건적 순간으로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정동적 힘의 분출’을 과잉과 문란, 공론장의 타락으로 일방적으로 환원하는 논의를 페미니즘 내에서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성차별적일 뿐 아니라, 인종주의적 혐오발화로 가득 찬 논의를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친화적이고 이른바 계급, 노동 중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을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는 논의를 통해서 이 문제를 고민해보자.
근대 미디어, 책과 신문을 읽는 주체는 이성적이고, 떼거지는 비이성적 폭도가 된다는 식의 논의는 페미니즘, 서발턴 연구가 가장 경계하는 계몽주의의 '사상'입니다.
<여자떼>
이른바 근대적 공론장이란 근대 인쇄 매체의 발전에 따라 신문, 잡지, 단행본을 읽으면서 상호 성찰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구축한 독자 주체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었다고 논의된다. 그러나 페미니즘 연구와 서발턴 연구,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에 대한 연구가 다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근대 공론장에 소수자의 자리는 없었고, 오히려 소수자를 공론장에서 배제하면서 공론장의 ‘시민권’과 독서 주체는 생산되고 헤게모니적 지배를 계속해왔다는 점이다. 정동 이론은 이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la foule)과 공중(le public)에 대한 논의는 정동 이론에서 새로운 미디어와 네트워크 기반 주체가 근대적 공중과 어떤 차이와 가능성을 지니는지를 논의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원천을 제공하기도 한다.
공중은 “인쇄물 특히 신문을 읽는 행위로부터 성립한 새로운 사회집단”이며 데카르트나 르봉과 같은 19세기 학자들은 이런 공중을 자율적 개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가치를 두는 근대 주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반면 군중은 ‘군중심리’에 대한 르봉의 논의가 보여주듯이 “근대 도시 공간에서 우발적으로 육체적인 접촉을 하게 되면서 감정적인 동조나 충동적 행동을 하는”,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탈 행동을 하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가브리엘 타르드는 르봉의 입장과 달리 군중보다 공중이 자신의 판단과 정신의 자유에 의해 판단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군중과 비교해서 더욱 등질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여성의 정치적 행위가 매번 소비자 운동으로 환원되고 매도되는 문제에 대해.
<여자떼>
특히 문화 영역에서 여성들이 문화의 보호자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관객’, ‘소비자’, ‘독자’로서의 수동적인 지위만을 부여받는다. 문화 생산물에 대한 여성혐오 비판의 중요 동력 중 하나는 여성과 문화 생산장 사이의 관계가 앞서 살펴본 독자 주체와 공론장 사이의 관계와는 너무나 다른 종속적 지위라는 점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문화 생산에 대해 수동적인 지위를 벗어나 능동적인 상호 교섭을 시도하는 여성들의 정치적 실천은 매번, 기껏해야 소비자 권리 운동으로 환원되고 매도된다.
★☆★☆
권명아, <정동의 과잉됨과 시민성의 공간>, 서강인문논총, 이하 <과잉됨>
SNS와 '이성적 공론장', 속도와 성찰은 그 의미나 내적 함의가 아니라, 일종의 <통과 암호>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쉬볼렛>(파울 첼란)
즉 속도와 비이성적 힘이라는 논의는 내용보다 통치성, 즉 <여기로 건너올 수 없음>을 알리는 <노파사란>의 통과 암호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 문제는 바로 이런 사상적, 이론적 성찰과 토론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거의 대화가 불가능한 이론적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SNS의 속도를 염려하는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의 담론과 이어쓰기 속에서 저는 <몰지각한 대중>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대는 악다구니치는 버러지들로 위에서 포착한 근대 엘리트 지식인의 퍼스펙티브와 공간에 대한 젠더 분할을 반복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정동은 언제나 ‘아직 아닌 것’의 형태로 조우된다. 이는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정동의 과잉됨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나, 각성된 지식인, 계몽된 엘리트라는 이미 구성된 주체성과는 다른 혹은 이에 미달된 ‘아직 아닌’ 존재들의 형상으로 표상되는 데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 ‘아직 아닌’ 존재들은 미달되는 동시에 넘쳐나며, 결여된 존재들임에도 제어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부상한다. 하여 정동의 과잉됨은 넘쳐나는 것들, 부적절한 것들, 과잉된 것들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석냥가피를 늘어 노은 듯이 불불한 흙차(土車)의 괴도 우를 거리고 차를 밀고 가는 소리 돌삼태기를 걸머지고 거리며 올으락나리락하는 <요보>들의 그림자……이러한 광경이 서로 어울려서 복작대일 이요 소리인지 형용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업다. 는 듯한 더운 김이 입을 확확 막는 속에서 모든 것이 다만 물거릴 이다. 한울 밋지 치처올러간 듯한 신궁 압희 축대 우에서나 남대문 문루 우에서 나려다보면 헐일 업는 개아미색기들이 달달 복는 가마솟 바닥에서 아물아물하는 것 가틀 것이다. 그러나 이 개아미 색기들은 질서도 훈련도 업시 오즉 피곤만이 그들의 볏헤 익은 얼굴의 느즈러저 잇슬 다름이다. (중략)
이 사람들은 나흘 전에 문허졌다는 룡산 인도교의 조상을 가는 손님들이다. 그러나 허리가 부러진 텰교를 붓들고 통곡이나 할 듯한 얼굴빗을 가진 사람은 한아도 보이지 안는다. 수해에 시달린 사람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는 사람도 업섯다. 사람이 몰린다닛가 나선 것이다. 십여 일 동안을 가치어 잇다가 별로 볼일은 업고 게딱지 가튼 집 안은 무덥고 하야 라 다린 새옷이나 쳐 입고 바람 쏘일 겸 행귀나 하야 보겟다고 나선 것이다. 서울사람들에게는 한여름내 유일한 노리터-소풍터로 생각하는 한강텰교조차 업서젓다는 것은 수만흔 동포가 고초를 격는다는 가엽슨 생각보다 아쉬운 일일지 몰을 것이다. 과연 그네들은 그만치나 텬하태평이요 팔ㅅ자 조흔 인생들이다. 그러나 그만큼 불상하고 가엽슨 백성도 업슬 것이다.(중략)
「갈 놈들 텰교가 문허지지 안코 제 에미아비가 숨을 모나!…… 놈년들이 긋듯 몰려 섯슬 되어서 저 텰교지 못 떠나가 버려라!」
이러한 소리도 사람의 물결 속에서 들린다. 그 사람들은 나가는 사람를 거슬려서 남대문을 향하고 허둥허둥 들어오는 것이엇다. 다른 사람들은 힐힐 돌려다만 본다. 그 두 사람은 진흙구렁이에서 져나온 듯이 외목고의와 광당포적삼을 누러케 흙물에서 쥐여서 입은 모양이 서빙고 근처에서 겨오 기어드는 수해리재민인 듯십헛다. 눈알이 벌거케 상긔가 되고 입에서 쏘다지는 악담은 금방 죽엄과 단판 씨름을 하고 나선 사람의 모진 악과 호긔가 득다갓한 듯이 보이엇다.
「이왕이면 오늘저녁 한 번 더 퍼부엇스면 조켓네. 그야말로 저 인도교지 마자 문허지게.」
「이 사람아 인도교가 무엇 달라든가?」
「인도교가 무엇 달라는 게 아니라 이왕 이러케 된 에야 아조 신룡산지 두려 질 일 아닌가……」
「신룡산이 두려지면 종로지 물이 들세」
「종로지라두 들 테건 들라지! 언제 두구 볼 세상이든가!」
혹은 모시 두루막이에 고무신도고 혹은 흰 양복에 흰 구두도 신은 한패에 젊은 축이 지나가며 이러한 수작을 주고밧는다. 그들은 남이 잘못되라고만 악담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긔네 자신지를 저주하는 사람들이다.
위의 인용문은 염상섭의 장편 사랑과 죄의 첫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염상섭의 놀라운 묘사력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염상섭은 홍수 직후의 서울 한복판을 마치 공중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듯이 포착한다. 그리고 이 카메라의 시선은 남대문에서 시작해서 서울 한복판을 이동하며 ‘촬영’해나간다. 독자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중에서 포착된 홍수 직후의 서울 전경을 보다가, 남산의 아래에서 위로 훑어 나가는 카메라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게 된다. 이런 식의 포착은 여러 효과를 만드는데, 먼저 공중에서 촬영하는 것 같은 시선은 홍수 직후의 서울을 ‘조감’할 수 있게 한다. 홍수 직후의 서울은 넘쳐 나는 강물이 말 그대로 휩쓸고 지나간 흉물스런 몰골이다. 한강 인도교도 무너지고, 남산 한귀퉁이도 산사태가 나서 허물어져 내려가고 신작로는 흉물스럽게 파헤쳐져 있다. 이러한 형상이 한편으로는 식민지 경성의 슬픈 운명을 환기시킨다. 일제 시기 작품들에서 홍수가 조선의 식민성과 ‘후진성’을 복합적으로 환기시키는 표상으로 종종 등장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광수의 무정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나는바 홍수는 조선의 식민지로서의 슬픈 운명의 표상이며, 동시에 식민지의 ‘슬픈 백성’(이광수가 즐겨 사용하는)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염상섭이 사랑과 죄에서 폐허 혹은 쓰레기 더미 같은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동시에 ‘요보’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도 이런 맥락의 연장에 있다.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던 카메라의 시선은 ‘요보’들의 그림자를 내려다보거나, 그 뒤를 쫒아간다.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이 요보들은 “개미 새끼들”처럼 보이기에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에는 “모든 것이 다만 꾸물거릴 뿐이다.” 여기서 강물이 범람하여 ‘정상적인’ 도시의 모습이 파괴된 경성 시내의 상태는 “개미 새끼들”로 표상되는 ‘요보들’의 상태와 동일하다. 이 둘은 모두 정상적인 사회나 시민성, 문명적인 상태를 이탈해 있다. 하여 때로 그것은 폐허나 황폐화(사회에서 자연 상태로의 회귀)의 형태를 취하고 또는 ‘비인간의 형상’(인간에서 개미로의 역진화)으로 나타난다.
넘쳐흘러나는 홍수의 힘(과잉/범람)은 도시(일상 공간)를 황폐화시킨다. 또는 역으로 황폐화된 공간 속에서 일상적 공간에서는 만나기 힘든 어떤 힘의 과잉과 조우하게 된다. 사랑과 죄의 카메라의 눈이 폐허인 경성의 모습 속에서 이 과잉된 힘의 발산을 조우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을 때 “저쪽 철교까지 몽땅 떠내려가버려라”라거나 “종로까지 다 홍수가 져라!”라며 “악에 바친 소리”를 하는 수해 이재민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염상섭은 이들을 포착하면서 “그들은 남이 잘못되라고만 악담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네 자신까지를 저주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과 홍수, 그리고 ‘요보들’ 사이의 위치의 차이를 잠시 확인해보자. 사랑과 죄의 작가의 시점은 바로 카메라의 시선, 즉 홍수와 개미 때 같은 요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다. 이 시선은 앞서 악어에서 악어가 도시에서 포착되던 시점과 동일하다. 실은 역으로 말해 이러한 포착자의 시선을 통해서 ‘악어’와 ‘개미때’는 탄생한다. 카메라의 시선만이 문명화와 폐허 사이의 진화와 역진화의 과정을 조망할 수 있으며, 홍수와 악어와 개미 때는 이 역진화의 공포와 위력을 환기시키는 대상이다.
즉 홍수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반드시 다스려야만 하는 자연 상태이며, 일제 시기 홍수로 인한 피해는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조선의 식민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홍수 방지 대책을 효율적으로 세우는 것은 조선의 식민지적 상태를 개선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홍수는 조선의 식민성, 반문명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홍수를 다스리는 일은 식민지의 지식인들에게 계급과 입장의 차이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랑과 죄의 묘사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여기서 홍수의 상징성은 정확하게 ‘요보들’ 혹은 “천하태평이요 팔자 좋은 인생들” 혹은 “그만큼 불상하고 가엾은 백성들”의 표상과 동일화된다. 이런 점에서 홍수의 표상이 일제 시기 조선의 식민성의 상징으로 자주 반복되어 호출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식민 통치에 따른 조선의 문명화되지 못한 상태와 직결된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자연 상태와 ‘민중’, 그리고 이들의 넘쳐나는 힘과 범람하는 과잉의 에너지를 제어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근대적 인식의 패러다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지식인에게 있어 홍수가 백성을 ‘슬프게’하는 것으로 반드시 ‘제어’되어야 하듯이, ‘민중’의 과잉된 정념 역시 ‘좋은 덕성’에 의해 제어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중략)
데리다는 파울 첼란의 「쉬볼렛」을 분석하면서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 자와 건너 갈 수 없는 자, 그리고 그 가능성의 표지로서 언어가 작동하는 기제를 논한 바 있다. 구약 성경에서 에브라임 사람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길르앗 주민들이 에브라임 지역의 요르단 강 나루터를 점령했을 때,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고 강을 건너려는 자들을 색출해내기 위해서 썼다는 암호가 쉬볼렛이다. 에브라임 사람은 이 단어를 ‘시볼렛’이라고 발음했는데, 이를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만 살려 통과시켰다고 한다. 도미야마 이치로가 이 모티프를 일본에서의 오키나와인과 조선인의 경우에 적용시켜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여기서 언어의 적절함(properness)은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자격과 상응하며, 적절하지 못한 언어 표현은 그 자체로 생명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된다. 언어의 적절성의 경계는, 강을 둘러싼 점유권의 경계와도 관련되며, 이는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혹은 누가 주민(population)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둘러싼 권력의 작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자는 ‘적절함의 표지’를 갖춘 자이며, 강을 건넌 자만이 언어를 소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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