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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와 사냥 2:노키즈존과 '특수시설', 인종화된 차별과 '사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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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와 사냥 2:노키즈존과 '특수시설', 인종화된 차별과 '사냥'

alice11 2017. 9. 1. 13:26

봉쇄와 사냥 2: 노키즈 존과 '특수 시설', 인종화된 차별과 '사냥'


동아대 학보사 서면 인터뷰, 질문은 기자가 보낸 질문. 서면 인터뷰를 했지만, 이 중에 기사에는 2줄 정도만 나간다고 하네요^^

기자분의 동의를 얻어서 서면 인터뷰 내용을 공유합니다. 



1. 최근 노키즈존(No Kids Zone)이 늘고 있습니다. 기자가 노키즈존에 직접 찾아가 노키즈존으로 가게를 운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다들 한결같이 어린이들과 관련된 사고로 인해서 노키즈존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뛰어다니거나 심한 장난을 치는 어린이를 저지하지 않는 일부 부모 때문에 노키즈존이 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한, 사회화가 덜 된 아이와 사회화가 된 어른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청년층(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개념 정리: 혐오발화와 차별적 표현

먼저 개념을 정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파시즘의 증오정치의 연장에서 나온 개념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의 번역어로 저는 혐오발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맘충과 같은 언어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혐오발화이면서, 이런 표현을 지칭하는 개념은 일본의 사례를 따라서 차별적 표현이라고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질문지에 혐오표현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어서 그것을 저는 답변에서 혐오발화나 차별적 표현으로 받아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키즈 존: '특수시설'과 일반 시민의 공간을 분리해온 차별의 역사

노키즈존은 사회적 약자를 이른바 일상 공간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분리 수용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의 차별 의식의 산물입니다. 물론 노키즈 존 설치는 최근 더 심각해진 여성혐오(misogyny), 특히 맘충이라고 딱지 붙여진,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어린이들의 사고를 우려한다는 이유로 아예 노키즈 존을 만드는 발상은, ‘일반 시민 거주 구역에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간(장애 시설 등)이 들어올 수 없다는 공간과 집단에 대한 차별 인식과 이어져있습니다. 시민의 주거와 생활공간은 이른바 정상성, 건강하고, 일정한 경제적 안정성을 지닌, 성인 가족이 점유하는 배타적 공간으로 여기고, 여기에서 어긋나거나, 이 공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집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한국 사회의 오래된 차별 의식의 소산이지요. 노키즈존 설치는 맘충 혐오로 상징되는 여성 혐오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이질적 집단을 일반 시민 공간에서 분리하고 배제해온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적 사회 구조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차별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른바 정상적인 한국 시민의 거주와 일상 공간에 이질적인 이주민이 진입하기 어렵고, 진입할 경우 엄청난 저항과 배타적 공격을 받게 되지요. 노키즈존은 한국인 내부의 이질적 집단으로서 여성-아동,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 대한 인종화 된 분리주의의 소산입니다.


인종화

인종화라는 개념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자면, 인종화란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과 인종차별주의의 방식이 다른 집단에게 전용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맘충 같은 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맘충이라는 일반 인간과는 다른 종으로 구별해서 분류하고 딱지 붙이고, 단지 이렇게 인간이 아닌 종으로 구별해서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배제와 절멸의 효과를 만듭니다. 영어권에서 니그로라는 표현이 차별표현이자 혐오발화로 규제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니그로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종학살을 예고하고,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맘충이라고 부르면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차별 집단으로 표적화해서 분리하고 배제하고 절멸하려는 위협은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경각심이 없이 방치한 상태에서 한국 사회는 이미 맘충 혐오라는 인종화된 공포가 만연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요.

여기서 인종화된 차별이 특정 집단을 맘충과 같은 식으로 딱지붙이고, 손가락질하고, ‘일반 인간/시민사회에서 분리하도록 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방식에서 이미 일반 시민/인간과 맘충은 문명화된 사회적 존재와 미개하고 보호하거나 분리해야할 벌레같은 존재로 위계화됩니다. 이런 위계화를 통해서 문명화의 상태에 따라 특정 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시민인 남성 성인/준시민인 여성 성인/시민이 아닌 미성년 남성/시민이 아닌 미성년 여성/청소년에 미달하는 아동/인간 이전의 유아 등의 위계화는 이런 문명화의 정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따라서 성인, 청소년, 아동의 위계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이 위계를 계속 유지하는 한 앞서 논한 인종화된 차별 구조와 논리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차별에 반대하는 권리에 대한 주장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차별에 반대하는 권리의 출발이, 나이, 성별, 신체적 상태, 인종, 출신 지역, 성적 지향성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 표현이 만연합니다. 예를 들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친구에게 장애인 같다고 하거나 병신 같다고 하는 경우도 누군가에겐 혐오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혐오 표현들을 사용하면서도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 혐오 표현에 대해 조금은 쉽게, 와닿을 수 있도록 정의를 내려주실 수 있나요?

 

배려가 아닌 공통성, 파시즘이 유태인 인권 침해가 아닌 인류에 반하는 죄로 명시화된 이유

누군가에겐 혐오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가 아니라, 명백하게 모두가 혐오발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장애를 비하하는 차별표현이 일반인은 별 생각 없이 사용하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혐오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를 비하하는 것은 차별이고 그 표현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차별을 공공연하게 진술하면서 널리 퍼트리는 차별 선동 행위이기에 그 자체가 폭력적인 것입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유태인의 인권을 침해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반하는 죄라고 명시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지요. 즉 성차별적 차별표현을 사용해서 안되는 이유가 여성이나 성소수자에게 차별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즉 이들 집단을 위해서’ ‘배려해서차별 표현을 쓰면 안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표현 자체가 인류의 기본 윤리에 반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차별하지 않는 일을 장애인을 보호하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페미니즘을 여성을 배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잘못된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차별 중 심각한 문제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자의적인 신체 접촉이 있습니다. 즉 길에서 모르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비장애인이 진심으로 선의로 장애인을 돕겠다면서 몸을 만지는 일이 빈번한 것이지요. 비장애인이라면 이렇게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몸을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지요.


혐오발화 발신자는 무지한가? 권력 수행의 효과를 선택하는가?

또 문제는 혐오발화의 폭력성을 잘 몰라서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혐오발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연구 결과는 혐오발화 사용자들은 그 말의 폭력성을 몰라서 사용하는 경우보다, 암암리에 알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흑형”, “깜시”, “짱개라는 표현이 정말 비백인과 중국계 사람들을 모욕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사용하는 것일까요? 누군가는 흑형이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왜 백형이라는 말은 없는 것이죠? 즉 흑형은 비백인을 차별하면서 자신은 백인은 아니지만, ‘흑인도 아닌 위치에서 흑인성을 차별하는 우월한 위치에 서서 발화하는 것입니다. 백인에 대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없기에 백형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남성에 대한 차별 표현은 거의 없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차별 표현 일변도인 것도 바로 이런 권력적 위계의 소산입니다. 비장애인에 대한 차별 표현은 거의 없지만 장애인에 대해서는 차별 표현밖에 없는 것도 이런 권력적 위계의 소산이지요. 그리고 바로 비백인, 정상 신체 기준과 다른 몸을 가진 이들, 비이성애자, 비남성을 향한 차별 표현과 혐오발화를 하면서 발화자는 이런 권력적 위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발화를 하기로 선택하는 순간 바로 이런 권력을 실행하고, 이런 권력적 위계에 의해 작동하는 폭력의 실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무지하다는 알리바이입니다.

 

3. 혐오 표현은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유튜버 갓건배의 살인협박 사건이 그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는 최근 더욱 심각해진 여성 혐오 발언들이 이러한 결과를 낳지 않았나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종화는 학살의 예고: 인종화와 사냥의 단계

제가 여러 글에서도 논한 바 있는데요. 혐오발화(hate speech)에 대한 비판과 규제는 파시즘의 증오정치(hate politics)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작업입니다. 나치가 유태인을 소각하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쳤는지를 보면 이 문제가 어떤 차원에 걸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치는 먼저 아리아인종의 우월성에 대비되는 유태인의 열등함을 과학이나 사실로 널리 퍼트렸고, 유태인의 열등함과 악덕에 대한 담론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유태인인지 아닌지를 판명하기 위해 먼저 유태인적 특성과 속성을 규정해서 이에 맞추어 사람들을 분류했지요. 조부모 중 1명이 유태인이면 유태인으로 봐야하는가 아닌가 등 상세한 규정까지 두어서 유태인을 분류했습니다. 즉 반유태주의에서 유태인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자명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인종이 된 메갈이나 한국에서 오랜 혐오발화의 원천이 된 홍어’(호남 비하)라는 분류가 자명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유태인적 속성을 만들어서 유태인을 분류하기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특정 속성과 분류에 맞는 집단을 찾아내서 표적을 만들고 손가락질합니다. 좌표를 찍고 조리돌림하는 것이지요. 좌표를 찍고 조리 돌림하기 쉽게 초기에는 유태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노란별을 달게 했지요. 낙인찍기입니다. 낙인이 찍히면 일상 공간에서 살기가 힘들고, 유태인 거주 공간으로 좌표가 찍히면 방화와 린치에 항상적으로 노출됩니다. 노란별을 달고는 일반 시민과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수가 없지요. 나치는 유태인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일반 시민과 분리된 게토에서 살도록 강제이주 시킵니다. 게토에는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으니, 굳이 일반 시민 공간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게토 역시 일반 시민의 공간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결국 일반 시민과 유태인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수용소로 분리하고, 결국 최종해결책으로 영구 소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은 단순한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속성에 따라서 분류하고, 어떤 속성을 일반 시민의 덕성으로, 다른 속성은 일반 시민의 덕성을 위협하는 더럽고 불순하고,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나누는 과정이 학살의 모든 단계를 예비합니다. 속성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고, 낙인찍고, 손가락질하고, 다른 사람들도 손가락질 할 것을 부추기고, 집단으로 사냥하고, 게토에 분리시키고, 수용소에 가두고, 그리고 영구히 절멸해버리는 것. 이것이 증오정치의 단계이고 우리가 헤이트 스피치, 즉 혐오발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입니다. 누군가를 맘충이라고, ‘메갈’, ‘흑형’, ‘짱개라고 부르고 낙인찍고 조롱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집단 학살의 기계는 돌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최근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을 혐오라는 막연한 차원보다는 이러한 증오정치의 학살 단계라는 차원에서 정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