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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안경환은 홍준표와 같은가?: 여성정치와 소수자 정치는 과연 누구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 본문
이미 법무부장관 후보를 사퇴했기에, 일단 간단한 논의를 올립니다. 발빠른 개입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지요.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이 '여성' 기호를 내세워 안경환을 여성혐오자로 몰아간 것은 오히려 반페미니즘이라 할 것이다.
미국이 이슬람 '청소'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 인권을 내세운 것과 다르지 않다.
페미니즘의 문제제기가 이런 여성 정치를 전유하는 파시즘과 스스로 거리를 두기 위해 너무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는
"안경환이나 홍준표나 마찬가지다"라는 식의 논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성혐오의 광범위함과 한국에서 남성 엘리트 생산 과정에서 여성혐오를 나눠갖는 공통성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유의미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한남'은 모두 '한남일 뿐'이라는 최근 페미니즘 내의 여성 근본주의를 강조하는 입장과 차별성이 없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즉 페미니즘 내에서도 여성혐오나 한국 남성성의 문제, 성차를 가로지르는 계급, 인종, 지역, 연령, 사상과 정치적 지향성 등에 대해 논란과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다.
안경환과 홍준표가 한국 역사와 교육 제도, 지식(학지)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나누어 가졌다는 것과 이들이 동일한 수준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동성애는 하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금지가 아니고 엄벌해야 한다”(홍준표, 4월 27일자 인터뷰, 해럴드경제)는 정치적 지향성을 지닌 사람과
"지난 수십 년 동안 게이남성들은 전통적 남성상을 희석시켰고 여성운동의 동지가 되기도 했다."(안경환, <남자란 무엇인가>)는 담론을 펴는 사람을 같은 수준으로 동일화해서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는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좀더 어려운 것 같다. 최근 페미니즘 내부의 갈등에서도 나타나듯이, 페미니즘은 점점 더 근본주의화하거나 스스로 '전위적'임을 경쟁하면서, '함께 나아감', '고전적 의미의 연대성의 부정'과 새로운 함께 함에 대한 논의와 비전을 아직은 찾지 못한 단계이다.
'연대'를 전략적인 일시적 제휴 정도로 간주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전략적 제휴가 가능하기 위해서도, 서로간의 최소한의 존중, 혹은 인정이 필요하다.
내 정치적 수준에 맞는 사람과만 함께 나아갈 것이 아니라면
무차별적으로 대상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과연 어떤 상호 존중의 장과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안경환은 보수적 리버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 대해서 잘 모른다. 또 장관 후보로서의 자질이나 여러 정치 공학에 대해서는 좀더 '전문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다만 나는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연구와 실천 작업의 이력으로 그의 저서를 주로 전문적 저서를 중심으로 읽어온 경험이 있다.
'외설 재판'에 있어
장정일 재판에 대한 강금실의 태도와 스스로 남긴 저술과
마광수 재판에 대한 안경환의 태도와 해석을 비교해볼 때
법적 학지 내에서도 안경환은
문학이나, 사상의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는 것에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이면서도, 법을 통한 국가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는 법학자 내부에서도 보수적인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의 저서는 오래 전부터
매매춘(성매매와 성노동 개념을 포괄하면서), '외설 혹은 음란 재판', 차별 철폐 등에 대해
자연법 혹은 자연과 본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의를 검토하고,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대결과 이 대결의 역사가 보여주는 함의를 논의해왔다.
아래 인용하는 안경환의 글에 대해서도 성소수자의 차이나는 정체성 표지에 무지하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현재 소수자 정치가 그런 식의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또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이전 포스팅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어쩌면 그건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지향점의 다름일 수 있다고 보인다. 즉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함의 지평을 만들면서 나아갈 것인가, 선명하고, 자기 동일성을 강하게 표방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의 여성정치나 소수자 정치가 안경환 정도의 '보수적'이지만 차별에 반대하는입장은 연대의 대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정치적 지향의 차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차별반대법" 제정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안경환이야말로 그런 넓은 지지의 역사이자 근간이 아닐까?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적절함의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그러니, 후보자 사퇴에 이르는 과정의 과열된 힘들이, "안경환과 홍준표 둘 다 마찬가지다"라는 논의를 반복하고 재생산하고 전달하는 일을 멈추기를 바란다.
길지만 안경환의 <남자란 무엇인가>의 일부를 인용하고 적어둔다. 읽지 않고 포스팅을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동성 간의 결혼이 헌법에 합치된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로 인해 결혼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이제 많은 미국인들은 '동성결혼same sex marriage'이라는 어색한 표현 대신에 평등결혼 marriage equality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선호하게 되었다. 동성 간의 결혼에는 과거처럼 남녀간의 위계의 전통이 깔려있지 않다.(146)
2016년 5월 25일, 서울 서부지방법원은 예상대로 김조광수, 김승환의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세계적으로 동성혼의 합법화 추세가 현저하고, 시대의 변화가 가족 형태와 혼인제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동성혼이 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하면 부양, 재산분할, 유족 연금, 의료보험, 상속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법의 역할이 소수자라 할지라도 그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그러나 판결문은 '별도의 입법 조치가 없는 한 현행법의 해석으로는 동성간의 혼인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법을 해석, 적용할 뿐 전면에 나서 사회변화를 주도할 수 없다는 '사법 자제론'의 전형이다.
그나마 '무릇'을 내세운 대법원의 확신과는 달리 하급법원은 현재의 제도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 의미가 있다. 법은 노인의 고집이 아니라 젊은이의 감각이라고나 할까. (147~148)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성애는 인류의 삶의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였다. 모든 역사적 기록을 봐도 그렇다. 그 엄연한 현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는 시대와 여건에 따라 다를 것이다.(중략)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동성애가 결코 낯설지 않다. 고려 왕조의 경우 제 16대 목종과 제 31대 공민왕의 동성애 행각은 공식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중략)
2012년 제 19대 총선을 앞두고 급조된 기독교 정당은 '종북 좌파 척결'을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런데 4년 후인 2016년 제 20대 총선에서는 '동성애 반대' 구호에 올인했다. 이들이 혐오 대상으로 표기한 동성애에는 양성애자와 성전환자도 포함한다. 즉 이성애를 제외한 LGBT 전체를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은 성경 구절을 정신적 무기로 삼는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빈도수에서나 표현의 적나라함에서 동성애자보다 여성이 더욱 혐오의 표적이다. 그러나 여성 혐오를 선거구호로 내건 기독 정당은 없다.
영구적 기독교 정당의 설립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은 막강한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가진 대형 교회의 목사, 장로, 그리고 신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위기'를 내세워 내부 결속을 강화한다.
이들이 척결대상으로 지목하는 '종북좌파'와 '동성애자'의 실체는
사상과 윤리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즉 자유민주사회의 적이 아니라 신봉자들이다.(150~151)
"히틀러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유대인만은 아니었다. 집시, 장애인, 정신질환자, 동성애자 등등으로 이들은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온전한 인간의 기준에 미달하는 오염된 하등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평화주의자이자 국경 너머의 삶을 용인하는 국제주의자들이다.(중략)
지난 수십년 동안 게이 남성들은 전통적 남성상을 희석시켰고 여성운동의 동지가 되기도 했다. 2016년 6월 11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17회 퀴어축제에 처음으로 무성애자가 부스를 설치했다. 이때 '쿼어 플라토닉' 무성애자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나는 나일 따름이다.'
어쨋든 성적 정체성은 성적 자유와 자율의 문제와 함께 21세기 인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공적 논제의 하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류는 개명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개명은 사람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 다름이 결코 오염된 징표가 아니라는 이해와 확신을 공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는 히틀러와 같은 인간이 지구를 유린하지 못할 것이다."(153~154)
'동성애자를 엄벌해야한다'는 정치적 지향을 지닌 사람과 '보수적'이지만, 성소수자와 차별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인식과 정치적 지향을 지닌 사람을 '마찬가지다'라고 환원하는 것은 페미니즘 정치를 너무 편협하고 협소하게 만든다.
다 떠나서,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증오정치와 혐오발화에 대항하는 일이 지난하고 더 다양한 연대와 지지의 장을 펼치는 게 중요한 시점에서, 과연 안경환도 홍준표도 마찬가지라는 식의 담론이 여성정치나 소수자 정치 이름으로 표명되고 반복 인용하면서 어떤 정치적 지향을 펼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여성정치와 소수자 정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다름과 차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누구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 "
안경환 사태는 '남성, 그들만의 리그'의 문제가 아니라,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의 안을 향해서도 돌려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누구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
적어도, 최소한, 홍준표와 안경환이 마찬가지다라는 선정적 동일화는 그만두자.
안경환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면, 그런 의심을 던지는 발화자의 진정성은 과연 어떻게 확인가능할까?
안경환의 한계와 진정성은 그가 해내 실천의 움직임과 나아감이 한계 속에서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홍준표가 걸어온 길과 안경환이 걸어온 길이 같다고 동일화할 수 있다면
모든 여성 엘리트가 걸어온 길도 결국 '거기서 거기'라며 강제적으로 동일화해버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과연, 누구와 함께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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