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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들

원혼과 증오와 국정화

alice11 2016. 10. 30. 23:2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3196.html


이 글을 쓸 때 중요했던 문제의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세월호 유족에 대한 혐오 선동에 저항하는 담론을 구성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칼럼이어서 바로 당시의 긴급한 사안과, 사실 거기 연계해서 담론화하고 싶은 의제를 글에 같이 배치해서 논의 구조를 만드는데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볼 수 있는 세상, 내가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안목이야, 정해져 있는 것이기에, 매번 마지막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몸을 다한다, 생각보다. 즉 자료를 많이 찾고 기존에 이와 관련해서 나온 논의를 거의 전부 다 찾아보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지 않고, 그래도 내가 이 사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지점을 고민해본다. 마지막까지. 그게 지식인, 제한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이랄까, 최선이 아닐까 고민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이 그저 한 방에 지껄인 글이나,  일상에 대한 소소한 기록들에 비해 사람들에게 전달되거나 감응되기 어렵다는 건, 어쩔 수 없달까. 신문사에는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일로 애초에 한정했다. 큰 호응을 주는 글을 쓰는 건 또 다른 문제고, 그런 글을 쓰게 되면 오히려 더 내가 무서울 것 같다. 


이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한 건, 내가 파시즘에 대해 당대적으로 논의하면서 주요하게 계속 제기했던


이른바 <출산거부>, <자살률>과 같은 <재생산의 종말>에 대한 문제다. <<역사적 파시즘>>,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등에서도 강조했지만, 그렇게 크게 의미화 된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출산거부>는 젠더 문제로, <자살> 문제는 병리적 문제로, <국정화>는 역사(학) 문제로, 애도는 심리학 문제로 이렇게, 분업화되어 각자, 자기 문제에 대해서만 주력하는 한국의 담론 구조와 실천에 대해서 사실 나는 계속 논의를 해왔는데, 그게 크게 와 닿지는 않는 모양이다. 


원래 이번 칼럼을 구상하면서도 <낙태 금지법>과 <구조조정>을 연계해서 쓰려했는데

두 문제가 각자 젠더 진영과 노동 진영으로 나눠져 논의하는 구조에서, 내가 계속 해온 담론과 실천 방식은 결국 이도 저도 아니고 다가가기 어려운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고, 뭐 이러저러해서. 다른 가닥으로 나아갔다. 


++JTBC 스포트라이트를 기다려 보았다. JTBC가 종편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다. 오늘, 언론은 상상을 초월하게 조용하다. 

흠...일요일이라서? 라면, 참 간단하고 우스운 일이다. '종편'으로 상징되는 세력이 자신들이 원하는 사냥에 어떻게 성공하는가, 정보를 던지고 받고, 그 안에 어떤 과정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디든, 소문이나, 연계 이른바 끈을 댈 곳을 잘라버린 내 한계이지만, 그래서, 그저 생각하고, 온 몸을 다해, 찾고 또 찾고 또 찾는다. 오늘 이 시간까지도.






[야! 한국사회] 원혼과 증오와 국정화 / 권명아

등록 :2015-12-23 18:46


올해 아이를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오다기리 조가 <과자의 집>으로 복귀했다. 드라마는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할머니의 염려 담긴 말로 시작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아깝게 죽은 또 다른 친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며, 할머니는 타로에게 ‘죽음이 들러붙지 않게’ 하기 위한 작은 의례를 하고 집으로 들여보낸다.



문명의 성격과 종교를 막론하고 인류는 ‘억울한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는 단지 전근대적 문화의 잔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혼을 달래 저세상으로 보내려는 여러 종류의 의례는 죽음에 대한 인류의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근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죽음을 대하는 인류의 오래된 의례(토템과 터부)를 이론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인류의 공통적인 두려움은 이 죽음이 산 자에게 들러붙을 가능성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집단적 의례로서 애도는 애초에 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훗날 역사가가 2015년을 기록할 때 세월호 청문회와 혐오 선동이라는 두 항목은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15년은 이런 역사 기록이 훗날에도 가능할지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이 재난이고 혐오 선동이 차별을 조장하는 증오 정치의 산물이기에 두 문제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도 없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볼 때 이 둘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억울한 죽음은 산 자 혹은 삶의 공간에 ‘들러붙는’ 힘이 있다. 들러붙는 힘에 있어서 증오보다 강한 정동은 거의 없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애도를 통해 상쇄되지 못하면 죄의식을 남긴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해소되지 못한 죄의식은 희생양을 찾아 그 대상에게 ‘죄’를 덮어씌우곤 했다. 이런 희생양을 찾는 제의의 근대적 버전이 파시즘의 증오 정치이다. 억울한 죽음과 증오는 모두 ‘들러붙는 힘’과 산 자를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함을 갖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직후,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모두’ 이 억울한 죽음 앞에 공통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느꼈다. 애도에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는 그 시간과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아니 시간과 절차를 앞질러, 희생양을 찾기에 분주했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자조차 희생양의 목록에 올랐다. 미친 듯이 희생양을 찾기 분주했던 거대 미디어와 정치집단의 행태는 애도의 회피가 증오의 강도를 높이는 전형적 사례를 제공했다. 세월호 사건과 증오 정치는 정동의 차원에서 관련이 깊다.


애도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 않다. 다만 죽음이 삶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풀어헤치는 것이 애도의 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는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산 자의 의례이다. 애도에 실패한 개인이 상실에 사로잡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면, 애도에 실패한 공동체는 지속가능성이 사라지고,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 사회가 이런 재생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출산 거부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자살률의 증가는 전형적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회피하는 정치집단이 출산 거부와 자살과 같은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국정화 정책이 교육을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이 아니라, 증오 정치의 기반으로 만드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 정치집단은 한결같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회피와 증오 정치와 국정화는 참으로 한결같은 문제이다. 2015년 한국은 총체적인 재생산 위기에 봉착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재생산의 정치가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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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3196.html#csidxedf823a9be87bc495ef5c91e95e8d5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