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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소녀상과 한국 소녀상 본문

혐오발화아카이브/혐오발화연구자료

월가소녀상과 한국 소녀상

alice11 2017. 3. 12. 15:51

얼마 전 한국 소녀상과 월가 소녀상을 비교하면서, 한국 소녀상이 피해자성과 수동성에 초점을 맞춘것을 비판하면서, 서있는 월가 소녀상과 앉아 있는 한국 소녀상을 비교한 글을 보았다. (그 글은 디퍼라는 매체에 실려있다. 허핑턴포스트에도 올라와 있다.)

다양한 소녀상을 만들자는 그 글의 취지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글은 앉아 있는 수동적 자세가 '성적 유린'을 유발하기 쉽다는 논지를 제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글에 대해 여러 지점에서 논의를 하려고 계속 생각중이었다. 굳이 반론을 하지 말자는 결론도 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기사가.

앉아 있는 소녀상이 피해자성과 수동성에 매몰된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앞서 그 디퍼의 글은 또 지적하는데.

그 논의를 보는 순간 제일 먼저, "서있는 아이돌 '소녀' 등신대상"을 훔쳐서 의사 강간 행위를 촬영해서 인증한 일베 인증이 떠올랐다.
이 상징물은 서있는데, 왜 이런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을까?

문제는 여성과 그 모든 여성 상징물을 성적 폭력의 대상으로 만드는 성폭력의 굳건한 구조와 주체와 의지와 무의식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 문제다.

한국 소녀상과 월가 소녀상을 비교한 논의에 대해 여러 논점이 많지만,

한국 소녀상의 수동성과 앉은 자세를 비판한 글은 사실

성폭력의 시스템과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않는 부정과 부인의 메카니즘, 희생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기 책임론이라는 혐오발화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상징물의 형상화나 재현 문제로 논의를 한정했다는 점에서 근본적 문제가 있다.

이런 식의 논의는 상징물의 재현과 형상화를 비판한다는 휼륭한 윤리적 자기표명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을 둘러싼 이런 전체적 논의를 재현의 문제로 한정해버리고, 역설적이지만, 결국 재현의 문제로 성폭력 구조를 가려버린다.

더나아가, 디퍼의 글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던데, 소녀상을 만든 제작자가 소녀상에 대한 성적 유린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식의 논의로 이어지는데.

이런 논의가 기묘한 형태로 성폭력 구조나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쪽, 즉 위안부 동원의 폭력성을 부정하는 입장과 그 폭력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기책임론(자발성 담론은 이것의 표현이다. 위안부 담론에서 '자발성'론은 그러니까 성노동에 대한 인정과 부정의 차원이 아니라 폭력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자기책임론 그 자체이다.)에 기울어지거나, 그 논의와 겹치는 교묘한 자기 책임론을 표명하는 것도 매우 문제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121307001&code=970100


소녀상 문제와 수동 능동에 대한 문제설정, 혹은 문제설정의 왜곡에 따른 문제에 대해, 페미니즘 진영의 잘못된 문제설정의 시정이 필요하다.

아래 글에도 보충해두었으나, 다시 올려둡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전시 동원 체제 하에서 자발성과 강압적 통제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 저 역시 <<역사적 파시즘>>에서 이에 대해 자세한 논의를 한 바 있습니다.

자발성을 능동성으로 강제 동원을 수동성으로 이해하는 통상적 논의는 잘못된 문제설정으로, 전시동원 체제가 이른바 자발적 노예화, 강압의 내면화 등의 기제로 이뤄지고, 여기서 황민화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대해 저 역시 논의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위안부 동원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피해자 담론을 넘어서 여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발성 논의는 위안부 피해자의 피해자성 자체를 침해하고 자기 책임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됩니다. 이를 간과하는 것은 위안부 담론을 둘러싼 담론의 복합성을 의도적, 혹은 무지에 의해 단순화하는 것이라 더욱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자발성을 능동성으로 강제 동원을 수동성으로 이분법화하고, 잘못된 대응을 반복해서 하는 점에 대해 시급한 시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또 이는 단지 일본의 식민 지배 뿐 아니라 주체화에 대한 논의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을 양분해서 논의하기 어렵다는 것은 페미니즘 논의에서 반복해서 지적되었습니다. 캐롤 페이트먼이 시민적 노예화라는 개념을 통해서, 주체화와 노예화의 이중성을 근대적 주체화 기제로 설명하고 이러한 노예화과정을 은폐하고 일방적으로 능동적 자기 주체화로 설정하는 것이 근대 주체가 젠더화된 방식으로 구축되는 기제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능동성을 주장한다고, 이런 주체화, 식민성, 파시즘 통제의 복합성을 건너뛰어, 여성의 투쟁적 활력을 주장하는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