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부산의 밀가루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철수와영희 제공
1948년 8월 서울 신발공장에서 노무화(노동할 때 신는 신발)를 만드는 여성노동자들. 철수와영희 제공
이임하 지음
철수와영희·2만2000원
거침없이 거리로 나섰던 여성들
노동현장 파업투쟁으로
가정과 정치의 혁신 요구로
일상과 생활, 정치를 바꾸려 했던
그 여자들의 뜨거운 이야기해방 이틀 만인 8월17일 서울 종로에서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된다. 넉 달 뒤인 1945년 12월22~24일엔 남북한 전체 194개 여성단체 대의원 500여명과 수천명의 방청객·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안국동 풍문고등여학교에서 전국부녀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린다. “여성 문맹 퇴치”, “경제 자주성 획득”, “부부는 일부일부(一夫一婦)”의 안건과 구호를 담은 현수막이 나부낀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주요 안건은 그밖에도 협동조합 만들기, 가정생활 간편화를 위한 육아·조리시설 신설이다. 위원장에 유영준, 부위원장 정칠성·허하백이 선출되고, 대회 2일차에는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이 “힘 합하여 남녀 동권의 진보적 민주 국가를 건설합시다. (…) 나는 남녀 동권을 부르짖는 탓으로 ‘넌 죽어야 한다’는 투서를 받았습니다만, 남녀 동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죽을 죄라면 죽어도 좋습니다”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 단체가 왼쪽이라면, 독립촉성애국부인회는 오른쪽이다. 이듬해인 46년 6월18~20일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전국대회가 전국 지방대표 730명과 방청인·내빈 다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두 대회는 해방공간 여성 거리정치의 주요 장면으로 한국여성운동사에 기록된다.1945년 12월 열린 생활문화 개선을 위한 여성 좌담회는 해방공간 지식층 여성들이 새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꿈꾸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좌담에서 여성 활동복으로 “양복”이 제안되는가 하면 “김장, 고추장 같은 연중 먹는 음식을 공장에서 제조해서 각 가정에 배급하자”(김영택 여자의전 소아과장)는 주장도 잇따랐다. 조선부녀총동맹 대표로 참석한 정칠성은 “우리의 당면한 일은 여성해방”이라며 여성의 직장 진출을 위한 방법으로 공동탁아소와 공동세탁소, 공립 산원(産院), 여성 문제 전담기구의 설치를 제안한다. “부엌도 누구든 쓸 수 있도록 개조하고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먼저 집에 돌아온 사람이 밥을 짓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만들고자 하는 것은 직장 가는 부인을 위한 탁아소입니다.”(정칠성)정칠성의 생활개선 방책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새로이 발흥하던 1980년대에도 여성운동권에서 제기됐던 담론일 뿐 아니라 지금을 사는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절박한 이슈라는 점에서 역사의 더딘 걸음을 절감하게 한다.이제 노동계로 돌아오자. 해방공간 공장에 아직 잔존하던 일제 자본의 규제와 규율을 뒤흔든 파업의 신호탄은 여성들이 쏘아올렸다. 여성노동자가 대다수인 화신백화점 쟁의는 1945년 10월부터 8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며 해방공간의 주요 뉴스가 됐다. 1946~48년 파업 포함 노동쟁의가 가장 많이 터져나온 곳이 방직공업 분야였고 그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었다.1946년 6월3일 동양방직 인천공장 여성노동자 400명의 상경투쟁은 서울을 발칵 뒤집었다. “1979년 와이에이치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박정희 정권을 긴장시켰던 것처럼 동양방직 노동자의 상경투쟁은 미군정뿐 아니라 맥아더사령부까지 긴장시켰다.” 이들은 8시간 노동제, 기본임금 인상, 노조 승인과 함께 ‘일과 뒤 외출과 기숙사 내 자유’를 요구했다. 해방공간 작업장의 여성노동자들은 ‘원족(소풍)을 가자!, 외출의 자유를 달라, 기숙사 내 자유행동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걸고 파업을 일으켰다. 이들의 행동은 노동의 일상에서 잠깐 휴식과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 동원과 감시의 대상으로서만 여성 노동력을 착취했던 기존 시스템에 맞서는 항거였다고 지은이는 쓴다.<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는 성공회대 인문한국 연구교수로 있는 역사학자 이임하가 십수년에 걸쳐 생각을 묵히고 자료를 모아 집필한 책이다. 그는 5일 짧은 전화 인터뷰에서 “해방공간은 한국 역사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절정을 이룬 시기가 아닌가 한다”며 “여성이 자기 주체로 나서서 제 이야기를 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각종 단체를 만들었다. 여성 주체들이 어떻게 적극 활동했는가를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듯이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해방공간 여성들은 신사상을 적극 수용하며 거침없이 정치공간에 뛰어들었으나, 현실의 차가운 벽 앞에서 좌절하고 갈등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해방공간 초기인 1945년과 46년에는 거의 모든 정치집단이 국가 건설을 위해 여성들이 부엌에서 나와야 한다며 그것이 애국이라 주장했다. “젊은 조선의 어머니는 모든 재질과 기능을 빼앗았던 오랜 가정의 문을 박차고 나와야 할 것이다.”(<자유신문> 45.11.9. 사설 ‘조선의 젊은 어머니들에게’) “실로 조선의 여성들은 조선과 결혼하는 심경과 의기로 일어서야 하겠다. 한 가정의 아내에 그치지 말고 미래를 모색하라. 아장아장 걷는 맵시도 좋지만 뚜벅뚜벅 걸어야 할 시대다.”(<동아일보> 46.3.16. 소오생 ‘조선의 노라는 누구?’)하지만 해방 이태 뒤인 47년부터 48년에는 여성들의 지나친 사회활동을 비난하면서 가정을 돌보라는 담론이 지배적일 만큼 상황이 급변했다. “밥도 할 줄 모르는 여성들이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며 여성 사회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 한다고 새롭게 생각하는 부인이 있으나 무턱대고 그래서는 안됩니다.”(<부인신보> 47.10.5. ‘양처가 되는 진실한 내조’)심지어 이른바 ‘국치랑’( 나라를 치욕스럽게 하는 여성) 담론이 불거져나와 여성들의 빨간 입술 화장, 퍼머, 종아리 노출, 굽 높은 구두 착용, 길에서 껌씹기 같은 행위도 “매국행위”로 매도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때에 체면을 더럽히고 서울거리를 더럽히고 있다”는 논리였다.해방공간 여성들은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삶과 일상을 요구받는 현실을 살았다. 사회 참여라는 요구와 과도한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압박이다. 정도 차이는 있으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말하긴 힘든 게 사실이다. 그 여자들의 절박한 투쟁의 성과는 한국전쟁과 그 뒤 몰아친 반동의 시기를 지나, 80·90년대 다시 타오른 용광로의 연대를 거쳐, 해방 70돌이 되는 해인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해방공간 여성들이 일군 열매와 곧이어 이어진 실패의 흔적을 곱씹으며 다시금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하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