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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적인 것에 대한 총체적 인식 vs 체화된 경험> 본문

대안적 지방담론과 정착민 식민주의

<정치사회적인 것에 대한 총체적 인식 vs 체화된 경험>

alice11 2024. 10. 11. 11:18

노벨상 편중에 대한 우려도 높고, 다들 환호를 보낼 때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강 작품에 대해 최근 발간된 고명철 선생님의 비판적 논의의 요약본 기사도 보았습니다. 페친 선생님들께서 "앞으로는 이런 비판도 어려울 수 있겠다"고 말씀해주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우려도 충분히 필요하고, 비판이야 비평과 연구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한강 작가가 해외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 어려워졌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맨부커상 수상 때 <<채식주의자>>가 10분에 한권씩 팔렸는데. 한국 문단에서 한강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페미니즘 문학 연구, 특히 어펙트와 관련한 연구에서 한강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누적되고 있습니다. 이 연구들이 비판없는 상찬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를 대하고 있지 않는데, 많은 지점에서는 문단 비평이나 기존 문학 연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연구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비판"이 무엇인가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명철 선생님 글에서 제기하신 문제제기는 충분히 의미있는 논의입니다만, 상당히 익숙한 비판 방식입니다.
 
아래에도 인용해두었으나, "이런 비판"에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정치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결여"입니다.
상세하게 여기서 논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비판 구도는 이른바 "총체성"이라는 규정 하에 19세기 리얼리즘 서사를 기준으로 소설의 '리얼리티'를 규정해온 전통의 산물이지요.
 
이런 규정에 의해 박완서를 비롯한 많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개인적', '시적', '경험적'이라고 비판되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작가 일반의 차원이 아니라, 전쟁 경험, 민간인 학살 경험, 국가 폭력 경험, 증오정치 경험에 대한 증언, 기록, 서사를 "항상, 언제나" "정치사회적인 현실의 총체적 인식에 미달하는" 자전적, 경험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적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런 서사로 추동되는 정치적인 것을 언제나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인 것의 차원에서 미달하고 결여되는 것으로 할당하고 폄하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한국 전쟁의 경험을 담은 많은 서사들이 '유령적인 신체성'(죽은 자와 함께 사는)을 반복해서 증언하지만, 이런 서사들은 총체적 인식이 결여된 것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정치사회적인 총체적 인식을 획득한 서사로 기준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작가의 미학적 성취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구조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이를 담보하는 것으로서 특정 작가의 작품이 기준점이 되어서 <신체화된 경험embodied experience>에 의해 추동되는 서사를 결여된 것으로 계속 평가절하해왔던 <문학적 지식 규범> 혹은 <총체적인 인식>이라는 지식 규범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체화된 경험의 서사는 증언이나 증언 서사라고 특정 장르로 할당되었으나, 페미니즘, 퀴어 연구에서 구축한 어펙트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해석 방법과 연구 방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래 제가 이런 연구를 고민했던 초기에 썼던 글 일부를 남겨둡니다. 물론 이때의 문제의식에 비해 지금은 조금더 연구 방법에서 나아간 지점이 많고, 또 여러 연구자분들에 의해 많은 연구 결과가 축적된 상태입니다.
 
권명아.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대안기념 정치 구상: 애도 주체와 현실의 증강, 그리고 ‘완서학’의 원천." 여성문학연구 40.- (2017): 183-208.
이 글은 권명아, <<여자떼 공포, 젠더어펙트>>( 갈무리)에도 재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논문은 이른바 인공지능, 증강현실 등을 '과학의 영역'으로 보면서 기술혁신을 강조하는 논의를 비판하면서, 기술이 이를 실현하기 이전에 오래 축적된 증강현실 기술의 서사적 실현의 역사를 소수자 서사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살펴본 연구이기도 합니다. 당시 위안부 기념 관련 논의나 여성사 박물관 등에 대한 논의 등에 복잡하게 개입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또 신체화된 경험의 서사를 폄훼하는 한국 학문장의 지식 규범이야말로 지식의 식민주의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기도 합니다.
노벨상 정도나 받아야, 겨우 인정받을 수 있는 게 한국의 현실 아닐까. 노벨상 식민주의와 한국 지식계의 식민주의와 차별주의가 그렇게 간단하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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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은 학살과 증언, 폭력의 경험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사유의 궤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프리모 레비나 카프카 주디스 버틀러나 지젝 아감벤 등의 사유는 학살과 증언에 대한 사유의 중요한 원천으로 자주 호출된다 물론 여기에는 홀로코스트의 경험이 그 한가운데 있다.
 
이차 세계 대전의 경험과 이어진 내전의 경험은 국제 질서와 동아시아의 역사를 송두리째 변화시켰지만 세계 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담은 비서구의 여러 기록과 사유는 우리 자신의 주체화를 성찰하는 상징적 철학적 준거로 여겨지지 않는다.
 
전쟁과 내전과 학살로 얼룩진 한반도에서 그 경험을 사유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경험과 테러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한국 전쟁과 한국 근대사의 과정에서 진행된 소수자에 대한 폭력의 경험을 담은 서사는 사유의 원천에서 자연스럽게 망각되고는 한다.
-----------중략
정동이 현실을 대체하면서 물질적 현실과 비물질적인 정동적 현실이 분열하고 생존자의 현실감각은 증강 현실처럼 구조화된다.
생존자의 현실은 이렇게 물질적 현실과 비물질적 현실이 혼재하고 겹치게 되고 이들은 항상 언제나 물질적 현실 속에서 환영을 마주한다.
 
그렇게 과거는 현재와 분리되지 않으며 경험은 시간성, 즉 과거와 현재의 형식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으로 변형되고 각인된다.
생존자에게 과거의 경험이 현재화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체적 변용을 통해서다.
 
중략...........................
폭력적 경험에 대한 증언에서 현실의 사실적 세부가 사라지고 특유의 정동이 대체되는 과정은 폭력을 경험한 생존자들에게서 빈번하게 반복된다.
또 폭력의 경험이 사라져도 경험이 신체를 변용시켜버려서 생존자들에게는 특이한 현실 감각이 나타난다. 
 
 
생존자들이 겪는 현실 감각의 복합성은 해석된 적이 없기에 이른바 정상적 현실 감각에서는 환영과 가상 때로는 유령과 망상의 형태로만 해석된다. 장 아메리 임레 케르테스 등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생존담을 치열하게 남기고 때로는 자살에 이른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바로 이런 현실 감각의 변용과 신체의 변용이 어떤 것인지를 언어화하려는 치열하고도 처절한 고통을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박완서의 <<나목>>, 한강의 <<소년이 온다>>, 김숨의 <<한명>>을 다루었습니다.
논문으로는 볼 수 없지만, 단행본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수록한 제 글 <사건 이후의 인간학:혼의 투쟁에 대하여>에서도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체화된 경험과 정동적 신체성의 차원에서 읽는 방법을 제시하고, 이른바 기존의 리얼리즘 문학 해석이 제시하는 '리얼리즘 문학의 정치성'이 어떻게 파산했는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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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 선생님 비평 서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고명철, “매혹적인 이야기만으로 제주4.3을 들려주기에는 부족하다”, 제주의 소리, 2024년 10월 9일(지구적 세계문학’(2024년 상반기호)에 발표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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