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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한강, 소년이 온다: 젠더 어펙트 연구로 읽기 본문

대안적 지방담론과 정착민 식민주의

광주, 한강, 소년이 온다: 젠더 어펙트 연구로 읽기

alice11 2024. 10. 11. 11:19
<<소년이 온다>>를 매년 수업에서 읽습니다. 소설과 함께 항상 김미정 선생의 논문,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와 문학적 항쟁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가 놓인 자리>-." 인문학연구 0.54 (2017): 249-278.를 함께 읽습니다. 한강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분들은 반드시 김미정 선생의 이 논문을 경유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출간 당시 국내 문단의 한강에 대한 '박한' 평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반박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라는 개인의 작가적 성취나 문학적 성취로 보기보다,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존엄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계속되어온 인류의 무수한 투쟁의 계보 속에서 읽혀야 할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는 제안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전해보고 싶습니다.
김미정,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와 문학적 항쟁> 인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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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의 서술자는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저건 광주잖아”라고 불쑥 중얼거린다.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가 주권자들을 향해 행하는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의 구조와 그 안의 권력자들은 달라진 바 없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용산에서의 국가폭력을 보며 그것이 국가라고 자연화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고, 그들은 다시 1980년 5월 광주의 폭력에 대해서 무감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 과시하는 국가기구와, 과거의 권력자들과,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세대를 거듭하는 구조 속에서, 언제든 기억은 현재의 맥락에서 조작,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역사수정주의의 홀로코스트 부정에 대해 증언하던 이들의 문
제는, 이렇게 다시 다른 방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증언대 앞에 서야하는 이는 여전히 당사자(생존자)이다. 그러나 몸과 정신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증언의 반복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렇다면 이 소설이 “가장 정확한 기록물”(조연정)이거나 “고립된 결벽”
(서영인)이어야했던 이유, 그리하여 이 소설을 (완료된)“문학적 진상 규명
작업”(김형중)의 재래처럼 읽게 되는 이유는 지금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작가 개인의 의지, 욕망에 전적으로 귀속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방위적 반동과 혐오의 정동이 서로를 추락시키고 야만을 경쟁할 때, 그들과 동시대를 사는 또 다른 우리는 그 야만을 돌파할 존엄에의 서사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
이것은 단지 한 작가의 창작동기, 욕망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표면적으로 통일되고, 한 작가의 개성이 응축된 듯 보이는 문학텍스트는 언제나 당대의 무의식과 교호한다.
어쩌면 ‘2014년의 소년이 온다’는 한 작가 ‘개인’의 ‘소설(작품)’이기 이전에,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존엄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계속되어온 인류의 무수한 투쟁의 계보 속에서 읽혀야 할 텍스트인 것이다.
인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