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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상 선정의 세 키워드 <시적인 것, 번역/불가능성, 연결성에 대한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 파시즘 비판에서 탈식민 페미니즘, 젠더어펙트 이론> 본문

대안적 지방담론과 정착민 식민주의

한강, 노벨상 선정의 세 키워드 <시적인 것, 번역/불가능성, 연결성에 대한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 파시즘 비판에서 탈식민 페미니즘, 젠더어펙트 이론>

alice11 2024. 10. 12. 12:44
<시적인 것, 번역/불가능성, 연결성에 대한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 파시즘 비판에서 탈식민 페미니즘, 젠더어펙트 이론>
1. 이 세 키워드는 노벨 위원회가 한강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아니고, 역으로 왜 2024년 이 세 키워드가 문제적이고 중요한 논점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구요.

 

모두 논문을 보시는 건 아니니까 연구자분들은 잘 아실 수도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계신 시점에서 지식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왜 중요한지도 생각해볼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2. 지식의 역사와 변화에 대한 간략한 요약
 
 
홀로코스트에서 '친구들'이 모두 학살당한 이후 미국에 망명했던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서정시는 더이상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이른바 "유럽과 서구가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전쟁(발리바르)"이 도래한 촉발점이 된 미국의 대 이슬람 반테러 작전의 강화에 즈음하여 버틀러는 "오히려 이 새로운 학살의 시대, 학살된 자들의 언어를 고민하는 일은 시적인 것에 있다."라고 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학살과 서정시의 불가능성을 파시즘 비판의 근간으로 삼았다면
 
 
주디스 버틀러는 '정의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증오정치 시대, 시적인 것의 정치성을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버틀러는 "슬퍼할만한 대상"이라는 어펙트와 학살의 정치를, 시적인 것과의 관련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찰했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탈식민주의의 언어와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고.
 
 
학살, 서정시라는 규정은 여러 역사적 변화를 거쳐 오늘날, "어펙트와 비재현적인 것"이라는 규정에까지 이르렀다.
 
 
이른바 '시적인 것'은 장르로서 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물론 버틀러도 관타나모 수용소 수용자가 남긴 시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긴 하다.)
 
 
이른바 재현될 수 없는/대표될 수 없는 것을 '시적인 것'으로 규정해온 근대 비판 이론의 긴 역사가, 오늘날에는 비재현 이론과 어펙트 이론이라는 '이론'의 형태로 체계화 된 것이다.
 
 
2. 이른바 한국문학 혹은 문학적인 것을 초과하는 시적인 것, 그러나 한국 문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시적인 것은?
 
 
1. 장르로서의 규정
 
2. 역사적 장르로서의 규정: 이는 헤겔의 역사인식과 장르관에서 비롯되었다. 즉 근대를 산문적 세계로 보고 시적인 것을 '동양적인 것'이나 근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는 역사적 장르 인식
 
 
이러한 인식은 한국 문학에서는 김윤식, 김현의 문학사로 구체화되었다.
이건 선생 스스로 하신 말. 개인적으로 김윤식 선생님의 아주 짧은 단평까지 싹다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언젠가 당신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던 시절, 선생이 절필을 선언하셨는데.
 
이유는 "나의 모든 글쓰기는 헤겔의 지적 패러다임에 의거하고 있으나, 이제 세계는 반헤겔주의로 이미 전도되었다. 더이상 내가 보는 세계로 이 세상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글은 없다" 같은 말씀이었다.(정확한 워딩은 확인하지 못함)
 
 
당시 "아니, 선생, 내게 머리를 자를 기회를 주지 않고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오시다니!!!비겁합니다"라고 아무도 듣는자 없는 연구실에서 절규를 했다.

*김윤식 선생은 황석영의 작품을 "황홀경의 사상"이라는 주제로 극찬했는데, 이는 헤겔적 역사관과 장르관이 결합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후 황석영이 민중적 리얼리즘으로 재해석되기도 했지만, 실상 그 작품 세계는 헤겔적 사유와 궤를 같이한다는 김윤식 선생의 평가가 역설적이지만, 황석영의 의미와 한계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스스로 헤겔적 세계관를 용도 폐기한 것까지 포함해서.

하여간 선생 스스로 철회한 헤겔주의적인 역사적 장르론은 선생을 비판하는 논자들에게도 역설적으로 여전히 '리얼리즘 미학'이라는 형태로 한국문학의 분석틀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3. 노벨 문학상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한국 문학 세계화라는 동일한 패러다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등장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다 모두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고 또 제 논의가 그 많은 논의를 비난하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논의는 한강이 '문학'을 통해 시도한 정치적인 것을 무화시키고, 한국보다 해외에서 한강이 다른 방식으로 더 폭넓게 감응되는 이유를 '세계화' 같은 탈정치적 사유로 환원합니다.
 
 
이는 번역/번역불가능성을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국가적 패러다임으로 환원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4. 번역불가능성: 항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
 
 
아주 오래 전 4.3 항쟁 생존자의 구술 아카이브 총서 발표를 기념하는 발표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 연관이 없는데 꼭 듣고 싶어서, 홀로 참석했던 자리.
 
 
생존자분들은 연세가 많아서, 이들이 사용하는 제주말은 당시의 젊은 제주 사람들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제주의 상대적으로 옛 세대의 말"이었습니다.
 
 
구술 채록자들과 연구자들은 증언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채록한 구술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모두 표준어로 수정해서 출판했고, 이로 인해 당시 발표장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분들과 표준어 '번역'의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분들 사이에 화해불가능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경과는 잘 모르지만, 이후 평화기념관 구술 아카이브에 일부 공개된 동영상 자료에는 구술 증언이 '표준어 번역'과 함께 공개되어 있습니다.

 

 
4.3을 부정하는 국가와 국민에게 항쟁의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표준어 번역'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대 논지는 제주말을 그대로 표기해서 전달불가능하더라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요?

 

이 '번역'을 둘러싼 딜레마는 단지 제주 지역어와 표준어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존자의 구술에는 '사실'과 관련해서 청자가 듣고 싶어하는 서사적 내용이 없고, "에고, 에고" 하며 가슴을 탁탁치는 '재현불가능한 어떤 것들만'이 가득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쟁상태적 신체와 관련한 논문에서 제가 상세하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생존자는 왜 '언어'를 갖을 수 없으며
 
 
소수자들은 왜 아직도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목놓아 외치고 있을까요.
 
 
한국어라서, 과연 광주의 학살과 항쟁과, 그 기억과 경험을 부여안고 '광주' '홍어', '전라디언'으로 살아야 하는 지방민들의 삶의 역사를 정말 잘 알 수 있나요?
(여기서 '광주'란, 국가에 포함되고 종속되는, 위계화되고 식민화된 지방을 뜻합니다. "한국어", "한국문학"과 세계화라는 두 축을 오가는 논의 구도속에서 광주항쟁과 그 경험은 부차화되거나 한국으로 수렴되고, 이를 자연화합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국가로 회수하고 회수했던 문제를, 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광주항쟁은 '세계사적 문제'이자, '보편적 문제'이지만, 항상 '광주 문제'로 가치 폄하되는 것도 이런 식의 '지방'의 위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
 
노벨 문학상, 번역 없이 한국어로 볼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이 지우고, 삭제하고 은폐하는 것은 바로, 이 번역불가능성, 언어를 둘러싼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어'라는 공통의 언어로 포함되지 못한, 않으려는 혹은 그것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을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우리 앞에 들이미는 일(시적인 것)이야말로, 재현/대표represent이라는 오래된 민주주의가 시민적 노예화(캐럴 페이트만)에 불과하다는 컴풀레인(버틀러)이며, 그런 의미에서, 재현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른 항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