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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행복의 약속 1 본문
*젠더어펙트 스쿨 세미나를 대면으로 진행한 지 2주가 되었습니다. 그간 온라인으로 참여해주신 분들께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대면으로 전환해서 아쉬운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자리를 열어서 함께 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3월에는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을 매주 4회에 걸쳐 읽고 있습니다. 사라 아메드의 글을 만난 게 제게는 정동 연구에 대한 정동적 계기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웰즐리 대학ellesley College 에서 초청해주셔서 강의를 위해 체류했던 2011년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들렸던 보스턴 서점에서 Affect Theory Reader를 만났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우연이었는지 2012년 파리에서 열린 Crossroad 학술회의에는 기조 강연자로 랑시에르와 사라 아메드가 참가했는데 두 사람의 낯선 언어를 듣는 게 재미있었고, 파리에서 굳이 모두 영어로 발표하는 학술행사에서 영어 원어민 학자들이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뭐라는 거야?"라며 무시는 못하고 당혹해하던 장면이 통쾌했다고 할까 저 혼자 그런 마음을 먹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되돌아보니 제가 몰두해온 어떤 글들은 소수자성을 다루더라도 언어에 대한 고민을 소수자성의 정서 지형의 원천으로 고민한 연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언어가 '나의 것'이라는 자명한 감각으로 체화되지 않는 몸, 혹은 그런 자명함에 속하지 않는 몸. 언어적 귀속의 불가능성, 내 말이 나의 것이라는 그런 귀속감, 자부심, 말의 원천으로서 '나'에 대한 확신이 성립하지 않는 자리, 언어의 소유권을 온몸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자리의 말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은 내용 뿐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모든 걸 한 줄로 정렬하는straight 질서이기도 하다는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Complaint이기도 하지요. 그런 맥락이 참으로 번역불가능한, 언어-와/의 불화를 '번역'으로 담아낸 번역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동 이론 번역 출간 과정에 대해 할 말이 태산 같지만 매번 참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번역 불가능성"이나 "증언 불가능성", '언어의 문턱"에 대한 고민은 그런 뜻이기도 하지요.
(최근 '위안부 연구' 관련 작은 발표 자리에서 참관했었는데요. 젊은 세대 연구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취지의 자리였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게 취지를 훼손한 자!!) 그 자리에서 토론자분이 '증언 불가능성' 같은 말은 그만좀 하라는 요지의 토론을 하셨는데, 그 자리에서는 모든 게 세대적 분리에 의해 갈라져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고생하던 '증언 불가능성'은 이론의 원천과 함의를 보자면 세대적 인정 투쟁을 위해 괜히 불려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아파 쉬면서, 아 제 몸이 보통은 항상 말을 길러내는 데 쓰이고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번에는 의식을 놓을 정도로 아픈 게 아니어서인지, 마음이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골짜기에 다다른 건 아니어서인지.
다만, 몸을 쉬고 나아지도록 살피는 시간 동안, 제 몸 안에서 말이 샘솟지 않고 있다는 걸, 오늘 아침 문득 깨달았습니다.
물론 강의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회의도 하고 말을 나누며 살고 있지만, 몸 안에서 샘솟는, 자아내는, 길러내는 말은 그런 말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오늘 아침, 그렇게 오랜만에 말이 샘 솟아주어서, 나누어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간 제가 페북에 글을 쓸 때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는데, 이제 그 순간의 주기 혹은 간격이 길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몸은, 그리고 마음도 나아졌어요.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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