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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판 <<엉클 톰스 캐빈>>: 이주자 인간 사냥(강제단속 집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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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판 <<엉클 톰스 캐빈>>: 이주자 인간 사냥(강제단속 집행)

alice11 2024. 2. 29. 14:09

https://www.dgworkhero.org/news/articleView.html?idxno=943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단속·추방 중단하라, 대경이주연대회의 투쟁 선포! - 대구 노동히어로

법무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동단속을 재개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대경이주연대회의가 투쟁을 선포했다. 참가자들은 여수보호소 화재참사 16주기를 추모하면서, 미등록이주노동자 강

www.dgworkhero.org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단속·추방 중단하라, 대경이주연대회의 투쟁 선포! - 대구 노동히어로

법무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동단속을 재개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대경이주연대회의가 투쟁을 선포했다. 참가자들은 여수보호소 화재참사 16주기를 추모하면서, 미등록이주노동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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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37

 

예배 중에 이주노동자 강제단속이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 에큐메니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경찰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연행해 가는 폭거가 대낮에 발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었다. 대구시 달성군에 소재한 필리핀...

www.ecumenian.com

 

https://www.newsmin.co.kr/news/87424/

 

대구출입국 앞에 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점심 먹다, 예배보다, 공연보다 추방돼” | 뉴스

네팔 출신 로미(가명, 40대) 씨는 2003년 피난 차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왕정 통치 시절 왕정에서 일했는데, 네팔 공산당이 세력을 키워가며 분쟁이 벌어

www.newsmin.co.kr

 

 

접견 시간은 10분, 동료시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뉴스민 (newsmin.co.kr)

 

접견 시간은 10분, 동료시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뉴스민 대구경북독립언론

대구교도소 12번 접견실. 투명 강화유리와 창살 너머로 한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올리브색 미결수 수용복을 입은 그의 어깨가 둥그렇게 말려 있다. 그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특수

www.newsmin.co.kr

 

 

글이 길지만, 댓글에 있는 기사를 공유하시기를 청하고자 써보았습니다.
"일하다가 예배 보다가 잡혀가는 이주 노동자들" 기사가 잘 보여주듯이, 또 한신대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이 일은 조만간 대학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장소만 대학이 아닐 뿐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
관련 기사를 따라가며 추이를 살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지만, 왠지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게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방학 중에 학교에 유학생 관련 프로그램 제안서를 냈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김민수씨가 아무 것도 못하고 동료 노동자가 끌려가는 걸 수수방관했던 트라우마가, 이번 일을 추동했듯이....
특히 지방의 여러 현장에서는 유사한 상황일 듯.

 

해리엇 비처 스토,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도망 노예제법(1793~1850)에 대한 비판의 산물이다. 

 

Fugitive Slave Acts, in U.S. history, statutes passed by Congress in 1793 and 1850 (and repealed in 1864) that provided for the seizure and return of runaway slaves who escaped from one state into another or into a federal territory.

 

도망 노예법은 도망하는 노예를 사냥해서 노획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도망 노예를 돕는 행위도 처벌하였다. 도망 노예를 보거나 알고도 고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도 법적으로 처벌되었다. 

 

해리엇 비처 스토는 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소설의 9장의 제목은 "인간적인 상원 의원" 등장인물은 도망 노예법을 만드는데 기여한 "선량한 상원 의원"과 그의 부인, 버드 상원의원과 버드 부인.

 

---일주일 내내 주의회에서 도망 노예들과 그들의 은닉자, 사주자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애국적인 상원의원으로서, 그것은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다.(중략)그는 도망자 단속에 아주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실제로 도망자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도망자라는 단어의 도자, 망자, 자 자 세글자뿐이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소규모 신문에 실린 막대기와 보따리를 든 도망자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 밑에 붙어 있는 '아래 서명자로부터 달아난 자'라는 설명 뿐이었다. 그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실제적인 고뇌가 어떤 마법을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도망자의 호소하는 눈, 갸냘프고 떨리는 손, 도움을 얻지 못할 때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애원 등을 직접 보지 못했다.(중략)

 

우리의 상원 의원은 목석이 아니라 사람이고 더구나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무턱대고 애국심만 강조하는 그런 위인이 아니었다. 남부의 여러 주에 사는 선량한 동포들은 상원 의원의 행동을 그리 이례적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유사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도 그에 못지않게 선량한 행동을 하리라는 걸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하기 때문이다. ( 해리엇 비처 스토, <<톰 아저씨의 오두막>> , 이종인 옮김, 164~165쪽)

 

버드 상원의원은 선량하지만, 도망 노예법을 만든 자로서 이 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버드 부인은 남편 몰래 도망 노예들을 돕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감정'에 호소해서 그 선량한 상원의원도 "인간적인" 면모로 도망노예를 도우라고 설득한다. 

 

"존, 마침내 당신의 가슴이 당신의 머리를 이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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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1850년대 도망노예법에 항의하기 위해 쓰여졌고, 당대에도 이후로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최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서도 관련 논쟁은 이어졌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었다. 논쟁에 대해서는 이명호 선생님도 최근 논문에서 정리해주심.

 

해리엇 비처 스토와 그녀의 분신인 버드 부인은 백인 중산층, 기독교 신자인 여성으로 흑인 노예에 대한 "동정"과 "공감" "연민"이라는 말로도 담을 수 없는 격정적인 정동을 통해서 도망노예법에 항의했다.

 

이른바 자유주의의 근간인 감상주의sentimentalism의 정치성과 한계 모두를 담고 있는 작품. 

 

한편으로는 백인 중산층이라는 지배적 지위와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에 예속된 자"로서 여성의 위치의 이율배반 속에서

 

흑인 노예 해방에 적극적이었던 해리엇 비처 스토의 공감적 자유주의는 한편으로는 백인성의 느낌의 생명정치를 반복한다는 비판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적 위계를 넘어선 예속된 자들의 새로운 연대,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던 실패한 연대의 역사를 상징하는 거점으로도 평가된다.

 

무엇보다 이른바 "동료 감정fellow feeling"(인종적 위계와 주인과 노예 관계를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동료 감정'을 요청한다는 의미에서)과 공감, 동료 시민/인간으로 흑인 노예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 자유주의 정치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기사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법치에서 동료 시민으로 형태를 바꾸어 등장하는 프레임은 이런 근대 자유주의의 감상주의와도 다르다.

 

무엇보다, "인간 사냥"을 피해 달아나는 이주 노동자를 도왔다는 것만으로, 3년이라는 이례적인 과도한 처벌을 받게 한 것은 우리 시대의 법치가, 도망노예법 시대의 법치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가지 중요한 건, 1850년대 노예제 미국에서 인종적 위계와 주인-노예의 실질적 신분 차이를 넘어 흑인 노예를 같은 인간으로 느껴 연민, 공감, 인간/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책무를 법의 한계를 넘어,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면의 명령에 이끌려 감행했던 이들이 여성이었다면

 

오늘날 "도망노예법"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도망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 느껴 연민, 공감, 인간/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책무를 법의 한계를 넘어,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면의 명령에 이끌려 감행했던 이들이 지방의 하청/비정규 노동자들이라는 점,

 

지방성과 비정규직 노동자성이 교차하는 어떤 지점에서 "인종적 위계"를 감지하면서 그 위계를 넘어서 오히려 연민과 공감을 느끼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들을 돕게 되는 어떤 정동적 힘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또 이 과정은 지방의 노동자들이 이주 노동자들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어떤 인종적 위계에 동참하고 실감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이는데. 이는 지방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수도권의 인구와 아주 이질적인, '인종적 위계의 하부에 할당되는' 과정과도 맞물리는 게 아닐까.

 

기사를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