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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 <진지한 학술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 본문

연결신체이론/alien affect

<사소한 일>, <진지한 학술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

alice11 2024. 2. 13. 12:46

1. 언어의 힘

내 판단에 대해 가늠하기 위해 심사서를 연휴 내내 여러번 살펴보았다. 화를 내거나 역으로 자기 연민이나 원한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다짐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냉정하게 살피려 노력했다.
모욕적인 언어는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여기 글을 올리는 건 상처를 전시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오히려 이 과정을 가늠해보려는 일.
2. 되돌아보지 않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뿐이다
"지난 일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나름 신념 삼아 살았다. 하물며 이전에 본 영화나 드라마, 이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다시 보거나 거기 머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걸 찾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힘든 일이 많았고, 시간이 지나서, 그 일들이 너무나 부당했다는 걸 더 또렷하게 알게 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부당함, 그 부당함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해 또렷하게 알아갈수록, 오히려 그걸 되새김 하면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그런 상태에 머물지 않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기를 택했다.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의 한 구절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뿐이다."
3. 기억의 틈새, 어떤 비행
모욕과 다투는 이 와중, 벌어진 틈새로 과거의 기억이 틈입한다.
같이 연구를 진행한 해외 학자들과 다 함께 학술행사를 하는 첫 모임에서 원로 학자는 내 발표문에 대해
"내가 이 글을 비행기에서 보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면 그건 쓰레기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처음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내가 웃은 이유를 거기 있던 사람들은 실은 모른다. 그 자리에서도 답변의 서두에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통역자가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하게 일본에 가기 전 보았던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너무나 똑같은 장면이 있었기 때문(지금은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중)
마르크스의 '위기' 관련 학회였던가, 이른바 '거장' '중진' 학자들이 모인 자리. '거장 학자'가 데리다 글에 대해서
"내가 여기 오는 비행기에서 네 글을 읽었는데, 하나도 이해가 안된다. 그건 네 글이 쓰레기이기 때문."
데리다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비행기에서 읽어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연구는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건 우매한 대중이나, 쓰레기 글을 양산하는 나 같은 학자들 때문이 아니라, 당신 같은 이들이 연구와 이론적 실천을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훑어보면서 쓰레기 운운하며 스스로를 거장 취급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건 바로 당신들의 비행 때문.
이렇게 요약해서 전할 수 있겠다.
비행이라는 말로 좀 농담을 하고 있다.
같은 원로께서 그 이전에는 내 연구에 대해 "침 뱉는 것도 저항이냐"고도 하셨던 터라.
4. 사소한 일
레오 칭의 <<안티 재팬: 후식민 아시아에서 감상주의 정치The Politics of Sentiment in Postcolonial East Asia>>가 나왔을 때 영문으로 먼저 한국과 수치심에 관한 부분을 보았다.
거기서 사례로 드는 "단지 퍼포먼스"를 레오칭은 대표성을 지니고 강한 강렬도를 지닌 것으로 다루는 데, 납득이 되지 않았다.
기사, 서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단지 퍼포먼스는 기사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그걸 타겟으로 한 저작이나 연구는 이른바 뉴라이트와 관련한 서적 뿐이었다. 이 저작도 문제제기를 받아서 절판되었다. 궁금한 건 이 사례가 대표성이 있는 사례라고 생각하게 된 레퍼런스가 무엇일까였다. 직접 찾은 게 아닐터라서.
사실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사례를 다룰 때 그것의 강렬도나 파장을 과장하거나 과도하게 대표성을 부여하는 걸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 투고글에서 원자력 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일본이 지구 우물에 독을 풀었다"라는 해시태그를 필두로 한 어떤 흐름에 대해서 "큰 반향을 얻은 사례는 아니다"라고 언급을 하면서 논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다.
심사자는 이 부분에 대해 "사소한 사례"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투고문에서는 일본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서 발견한 유일본 자료(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유일본 자료)를 처음으로 다루기도 했다.
1938년 오사카의 소년 교화위원이 자필로 작성해서 내각에 보낸 "풍기 숙청"관련 청원서이다. 여기서 풍기숙청의 근거로 관동대지진을 들고 있고, 풍속 통제 관련해서 관동대지진이 문서에 언급된 사례가 거의 없다. 즉 주의를 환기하는 사례로서가 아니라 풍속 통제와 관련한 이른바 '논리'를 담은 문서에 나와 있어서 중요한 연구자료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사자는 내 논의가 "진지한 학술활동"이나 "학술논문"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한다.
장난으로 자료 찾으러 다니는 거구나, 그 분이 보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