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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가이셍과 사까락지 투쟁 본문

여성주의역사학/여성주의대안기념

오징어가이셍과 사까락지 투쟁

alice11 2021. 10. 4. 15:13

<오징어게임> 글은 너무나 많지요? 저도 이러저러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 글을 보면서 흥미로운 건, 오징어가이셍 게임을 유년의 기억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유년기 기억 중 큰 부분에 오징어가이셍이 자리잡고 있고, 고등학교 진학 이후 오징어가이셍을 아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제가 살던 변두리나 당시 속칭 "똥통 학교 애들"이나 하던 놀이였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이들이 오징어가이셍을 알고 있다는 걸 <오징어 게임> 붐 속에서 알게 되어서 흥미로웠지만, 좀더 궁금한 건 그 많은 담론의 바다 속에서도 오징어가이셍과는 다른 사까락지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어서 또다른 흥미가 생겼습니다. (인터넷 검색에도 오징어가이셍에 대한 여러 자료가 있지만 사까락지 게임은 거의 없지요.)

 

저의 유년기 기억에서 오징어가이셍은 사까락지 투쟁으로 선연하게 물들어있거든요.

당시 학교 운동장은 과밀학급 문제로 인해 갈데 없는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고

점심 시간만 되면 운동장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과 몸싸움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오징어가이셍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아이들이 주변으로 더 큰 공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운동장의 거의 대부분을 잡아먹고 판을 벌립니다. 주로 남학생들이 오징어가이셍 땅을 차지했고, 다른 놀이를 하는 사람들, 특히 여학생들은 오징어가이셍에서 멀리 떨어져 조각난 땅을 겨우 차지했지요.

 

오징어가이셍 못지 않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게 사까락지게임입니다. 보통 고무줄 놀이는 '이미지'로 표상되기는 여자아이들이 깡총깡총 뛰면서 귀엽게 노는 게임으로 그려지지요. 그러나 고무줄 놀이 고수들은 대체로 사까락지 게임과 함께 놀이를 하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요. 덤블링, 덤블링으로 뛰어들고 나가기, 교차로 덤블링 하기 등 사까락지 게임은 꽤나 몸동작도 크고 위험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지 않기 위해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사까락지 고수들 역시 운동장에서 꽤 긴시간을 보낸터라, 오징어게임파와 운동장 선점하기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죠.

저를 포함 사까락지 고수들이 운동장을 먼저 차지하곤 했고, 분개한 오징어게임파 남학생들은 고무줄 끊기라는 꼼수로 작전을 전환했지요. 고무줄을 끊어버리면 운동장을 미리 차지했어도 주어진 시간에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운동장 먼저 차지하기도 힘과 몸싸움이 필요하여 신체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여자아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운동장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무줄을 끊어버리는 건, 게임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이라,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죠.

 

역시 그때도 결코 패배를 모르던 저는 고무줄을 끊는 남자아이들을 따라잡아서 끝없는 달리기와 몸싸움을 했지만, 멀리 달아나버리는 남자아이들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어느날인가 정말 작정을 하고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남자아이들을 잡으려고 운동장을 넘어, 학교 주변을 넘어서, 어딘가 꽤 먼 동네까지 달려서 추격을 했더랬습니다. 아마 점심 시간도 이미 지났을 것 같은 그런 아득한 시간이 지나고 남자 아이는 달리기를 멈추고 질린 얼굴로 제게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렇게 오징어가이셍과 사까락지 투쟁은 중단되었고, 제게는 '악바리',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는 꼴통'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어요.

그후 한동안 오징어가이셍에 여자 아이들도 같이 참여했고, 저 역시 다 늘어난 티셔츠와 땅강아지처럼 온통 흙범벅이 된 채 귀가하는 일이 이어졌지요.

그럼에도 오징어가이셍은 남자 아이들의 놀이였고 또 그렇게 기억되지요.

 

사까락지 놀이를 위해 오징어가이셍 놀이단과 자리 싸움, 몸싸움, 끈질긴 추격전을 이어가면서 운동장에 자리를 차지하려던 그 많은 여자아이들의 투쟁의 역사는 망각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게 온전히 망각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잠시 잊혀지고, 단절되었지만, 또다른 운동장을 달리는 여자들, 운동장 너머 자리를 잡기 위해 온몸으로 달리고 싸우는 여자들의 몸싸움으로 그렇게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오징어게임>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오징어게임과 사까락지 게임의 투쟁의 역사와 단절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사까락지 게임과의 투쟁의 역사는 말끔하게 지워진 채, 단절과 망각의 결조차 망각되었는데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특정 세대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집단성으로 회고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있지요.

 

그러니 <오징어게임>은 특정 세대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집단적 경험'(세대적, 한국적인 것이라는 이름으로)이라는 이름으로 그 집단적 경험이 어떻게 공간, 놀이, 유년, 장소, 기억, 서사, 소수자성에 대한 젠더화된 투쟁의 역사를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서사 표면에서 이른바 여성인물들이 놀이의 보조적 수단이 되고, 여성의 몸이 단지 게임의 승부를 위한 거래 도구가 되는 건 바로 이런 젠더화된 투쟁의 역사를 아예 지워버린 서사의 필연적 결과라 하겠습니다.

 

또 이 서사의 주인공이 쌍차 해고 노동자이고, 이들을 기억하게 하면서 소수자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 해고 노동자라는 정치적 주체의 기억과 경험이, 실패한 가부장 남성의 게임 서사로 그려져야 하는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쌍차 해고 노동자의 경험과 기억이 망각되고 있는 오늘날, 노동, 젠더, 인종적 소수자들이 수행한 정치적 투쟁이 이렇게 망각되는 길고도 긴 망각의 역사라는 의미로 게임 서사를 도입했다면 <오징어게임>은 단지 오징어게임의 서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