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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것들: 장기 투쟁 혹은 영혼의 파동에 대하여 본문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것들
:<<섬과 섬을 잇다>>, <<밀양을 살다>>, <<그의 슬픔과 기쁨>>
1. 물질과 상징: 저항과 시
밀양과 청도 주민들은 송전탑 대신 지중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전은 지중화가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전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14년 6월 12일 강행된 행정대집행에 소요된 예산이 100억 원에 육박하였고, 이 비용으로 왜 지중화를 하지 않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청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즉 10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는 밀양의 송전탑 투쟁은 이미 비용, 보상과 같은 물질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투쟁은 무엇을 위한 투쟁일까?
시작은 이해관계였다. 시작은 물질이었다. 그렇지만 그 나중은 이해관계가 아니라 감정이나 영혼으로 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감정, 어떤 영혼일까? 아니면 다시, 결국은 먹고사는 문제로 돌아가는 것일까.
(정혜윤, <<그의 슬픔과 기쁨>>, 후마니타스, 2014년, 52쪽.)
쌍용 자동차 선도투 중 하나인 최기민이 던지고 있는 이런 질문을 우리는 장기투쟁 중인 많은 이들의 기록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내 자존심이잖아. 투쟁 그만두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안 해. 이건 내 싸움이잖아. 그리고 내가 애를 잃으면서까지 이 싸움을 했는데, 어떻게 되든 깔끔하게 끝맺어야지. 잘 되든 잘 못 되든 끝을 맺어야지.” 2004년 해고되어 10년째 투쟁중인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 위원회’의 김혜란은 장기 투쟁을 계속하는 것을 ‘자존심’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너거는 우리의 고용 방패막이다.”라는 말로 압축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차별과 인격적 모욕, 인간적 수모, “인격을 차별받은 상처”가 “지금까지 싸우게 만드는 이유”라는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외침 속에서도 우리는 그 ‘영혼’에 대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밀양을 살다: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에서 만나는 밀양 주민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원래 살던 데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또 그 ‘단순한’ 바람이 국가에 의해 저버려졌을 때 주민들이 느낀 공통 감각은 ‘억울함’과 ‘원통함’이었다. 이 원통함과 억울함은 삶의 권리, 권리를 요구할 권리를 침해당한 데서 비롯된다.
밀양 주민들의 가장 큰 소원은 예전의 삶을 되찾는 것이다. 변한 것은 없다. 그러한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밀양 주민들은 말했다.
“법은 당신들의 손에서 놀아나지만, 그 법을 존재하게 하는 정신을 만드는 것은 우리입니다.”
이들은 싸움의 끝이 무엇인지 안다. 더 이상 도시가 주변부 지역의 자원에 기생하는 전력 공급 체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도시와 기업은 자가발전을 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전기 소비량에 제어를 걸어야 한다. 발전소를 늘리는 것으로 수요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핵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존하는 방도이며, 이 싸움의 끝이다.
시골 무지랭이라 스스로를 부르던 이들이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희정, 「우리 재미있게 우순도순 엎드려 사는데」, <<섬과 섬을 잇다>>, 83쪽.)
쌍용 자동차, 밀양, 재능교육 투쟁, 콜트 콜택, 제주 강정마을, 현대차 비정규직, 코오롱 등 이 세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장기 투쟁의 현장은 그 성격이 참으로 다양하다. 이 현장들은 모두 10년 가까운 장기 투쟁을 하고 있지만, 실상 이 현장이 굳이 다른 현장보다 더 긴 투쟁을 해야 할 어떤 ‘독특한’ 내적 요인은 없다. 또 이들이 유별나게 과격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단지 지켜야할 최소한의 것, 기본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기나긴 장기 투쟁을 지속해나가야 했다.
‘거리농성 2,267일째이던 2014년 3월 5일 <한겨례 21> 2000호 기념 특집 인터뷰를 하기 위해 유명자 지부장을 만났다. “이렇게 오랜 세월 싸우는 이유가 뭐냐?”고 상투적인 질문을 했다. “기본을 지킨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터넷 아이디들도 ‘답게살자(DOBGESALJA)예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기본을 지키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길바닥에서 7년을 싸워야 하는 세상이다.
하종강, 「학습지 교사도 노동자다: 재능 교육 이야기」 앞글, 122쪽.
물론 여기에 이름을 기록해두지 못한 너무나 많은 장기 투쟁의 현장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세권의 책을 보면서, 앞서 밀양의 송전탑 투쟁에 대해 했던 질문들이 여러 장기 투쟁 현장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물론 이 기나긴 투쟁의 현장의 의미를 단 몇 권의 책으로 알게 되었다는 표현은 참으로 부적절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 투쟁에 대해, 이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여기에 대한 답조차 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 세권의 책을 비교해서 보면서 이 장기 투쟁들이 갖고 있는 어떤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쌍용 자동차의 최기민이 명확하게 표현했듯이 물질이나 이해관계에서 시작했으나 궁극에서는 ‘영혼’의 문제가 되는 것, 그것이 이 투쟁의 공통점이다. 이는 단지 어떤 감정 양태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기나긴 투쟁에 대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구별법을 통해서 분석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이 투쟁을 통해서 어떤 주체가 형성되었는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기 투쟁의 현장은 이미 그런 질문 자체로 담을 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훌쩍 넘어간 것이 아닐까.
이들의 투쟁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것(자존, 존엄 등으로 표현되는)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문제만이 아니라, 상징적 투쟁의 함의를 내포한다고 보인다. 이때 상징적 투쟁이란 것은 실리보다는 ‘명분이 중요한’ 싸움이라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 상징적 투쟁이란 ‘영혼’의 문제라는 점과 상통하는 의미이며, 그런 의미에서 ‘혼의 투쟁’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으리라.
물론 이런 생각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이 투쟁의 현장을 지켜온 이들과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영혼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해온 기록자, 작가들의 노동 덕분이기도 하다.
이 세권의 책을 읽으며 우리는 최루탄을 폭탄처럼 쏟아내는 헬기의 난폭한 소음과, 폭언과 폭력이 난무하는 투쟁 현장의 폭력의 생생함을 전달받는 동시에, 마치 태풍 속에서 일순 맞이하는 정적처럼, 전쟁터에서 즐비한 죽음들 사이에서 맞이하는 어떤 형언하기 어려운 고요와 같은 그런 순간 또한 만나게 된다. 10여년을 넘게 투쟁을 지속해온 이들이 그 전장과 같은 삶 속에서 그들이 아주 잠깐, 마치 섬광처럼 마주친 ‘다른 순간’을 구술할 때 거기에 ‘단절’의 순간이 도래한다.
그 ‘단절’의 다른 순간을 체험하는 일은 책의 기록자들이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그 근본적 차원에서 시적이다. 사실 이 세권의 책은 투쟁 현장을 기록하고 구술 채록한 일종의 논픽션이라 할 수 있는데, 책의 곳곳에서 우리는 매우 ‘시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문학이라고 부르는 제도적 차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시적 체험은 이들이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부대낀 어떤 영혼의 파동, 그 울림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장기투쟁, 혹은 영혼의 파동
<<섬과 섬을 잇다>>, <<밀양을 살다: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그의 슬픔과 기쁨>> 세권의 책에서 구술자들이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왜 이렇게 계속 싸우느냐”, 혹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들의 투쟁을 영웅시하는 것도 일종의 낭만화이고, 이런 낭만화는 이들이 겪어온 고통을 단순화시켜버릴 것이다. 그런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세권의 책을 읽으며, 이들의 장기 투쟁은 일종의 ‘기적’, 그러나 너무나 잔인한 기적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의 투쟁이 ‘잔인한 기적’이라는 건 낭만적 수사는 아니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잔인한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 표현할 것인가.
처음엔 도망 다니고 처마 밑으로 숨기도 했는데, 나중엔 가만히 보니까 경찰들이 이 상황을 게임처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빈 공간에 최루액을 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조준해서 맟췄거든요. 쟤네들 즐기는구나 싶으니까 모멸감도 들고 분노도 생겼어요. 그래서 어떤 동지는 아예 우산 쓰고 다니면서 뿌리려면 뿌리라고 대응하기도 했고. 한번은 헬기가 쭉 저공비행 하면서 최루액을 뿌리는데도 한 동지가 도망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헬기가 날다가 그 조합원의 머리 위에 멈춰 서더라고요. 날아가면서 쭉 뿌리는 게 아니라 아예 정지해서 최루액을 목욕물 쏟듯이 그 조합원 위에 쏟아 부어 버렸어요. 저는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근데 얼굴도 모르는 조합원이었는데 이렇게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리고 가슴을 펴고 그걸 그냥 다 맞더라고요. 혹시 영화 <플래툰> 보셨어요?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어요. 테이저 건 탐침이 얼굴에 박혀 있는 동지도 있었고. 변기는 넘쳐흐르고, 에어컨 가동한 물로 세수하고, 그 물 섞어서 주먹밥 만들어 먹었어도 굽힐 수 없는 인간의 의지 같은 것을 그때 저는 봤어요.
<<그의 슬픔과 기쁨>>, 앞책, 52쪽.
장기 투쟁의 현장을 지켜온 이들이 기나긴 세월 겪어온 분노, 모멸감, 무력감, 혹은 짧은 환희와 서사시적 희열과 같은 영혼의 파동은 이 세권의 책이 전하는 중요한 울림이기도 하다. 이 영혼의 파동은 너무나 격렬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의 한계치를 넘나든다. 때로는 정말로 충만한 기적 같은 순간을 이 기록들은 전해주기도 한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목소리로 전해주던 그 여성 간부의 얼굴이 1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9명이 설립한 노동조합에 이날 800여 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이런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하종강, 「학습지 교사도 노동자다: 재능 교육 이야기」, <<섬과 섬을 잇다>>, 앞책, 109쪽.
십년이 넘은 투쟁을 해온 터라, 어떤 점에서 이들의 이름, 이들 현장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할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는 이들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너무 오래 들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 세권의 책은 그런 점에서 이렇게 이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이들의 이야기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인가라고 말이다. 세권의 책은 각각 기록의 초점과 목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이 세권의 책은 공통적으로 우리의 앎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물론 이런 질문이 앎과 감정 사이의 차이라던가, 이성과 영혼의 문제의 차이라던가 하는 식의 차원은 아니다. 세 권의 기록자들은 모두 상당히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기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기록 속에서 진동하는 장기 투쟁 현장의 구술자들의 영혼의 파동은 읽는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공감’의 한계를 묻는다. 물론 이것이 ‘당신들이 우리 고통을 알기나 하느냐’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는 점은 새삼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장기 투쟁 현장은 많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다시 계속해나간 경험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들에게 계속 싸워가는 일은 어떤 점에서는 ‘죽음 앞에 서는’ 일이자, 그 죽음을 넘어, 살아갈 권리를 찾고자 하는 ‘생의 투쟁’이다.
그래도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5년 동안 기다린 세월이 억울했고,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다시 또한번 해보자고 일어섰다. 콜텍 악기의 이인근 지회장은 “박영호 사장이 죽고 그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는다 해도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죽을힘으로 죽지 말고 즐겁게 싸우기로 했다. 콜트콜택의 해고노동자 밴드 ‘콜밴’은 이렇게 태어났다.
정리해고 된 것도 억울한데 8년이란 세월을 한을 가지고 살아왔고, 정리해고 된 날부터 세월이 흐를수록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그들이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어 힘들었던 때, 콜밴은 그래도 이들이 버틸 수 있는 작은 돌파구가 되었다.
이선옥, 「먼길: 콜트콜택 이야기」, <<섬과 섬을 잇다>>, 앞책, 161쪽.
이 세권의 책은 일종의 구술 기록인데, 독서 과정에서 의례 구술기록을 읽을 때면 부딪치게 되는 구술자와 기록자 사이의 딜레마라던가, 대신 말하기의 한계라던가 이런 점들을 표나게 느끼지는 못했다. 물론 이건 독서 경험의 차이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쩌면 이런 느낌은 이 세권의 책이 구술자와 기록자 사이에서 촉발된 텍스트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이의 관계에서 촉발된 텍스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술자도 기록자도 모두, 어떤 의미로든 ‘살아남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자기 진술을 곱씹는 자라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함께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와 유지하고 지키려 했던 가정과 삶에 대한 긍정과 가능성을 우리는 놓지 않고 있다. 함께 살고자 발버둥 쳤던 그때 그 느낌을 우리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복직 투쟁을 왜 포기하지 않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같은 고통에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대답 가운데 적어도 이것 하나는 같다. ‘혼자 살 순 없지 않느냐.’ 우리가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단호하게 버린 건 혼자만 잘사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혼자 살고자 동료를 버리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홀로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죽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방법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파업을 통해 체득했던 것이다. 다양한 이해가 교차하고 수도 없는 갈등과 반목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께 살려는 의지만큼은 우리 자신의 것임을 알았다. 운명 또한 선택의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이창근,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쌍용 자동차 이야기」, <<섬과 섬을 잇다>>, 앞책, 35쪽.
그렇게 우리는 참으로 오래된 질문, ‘살아남은 자’는 과연 죽음 앞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그 질문에 다시 사로잡혀 있다. 죽음 앞에서, 한 모금 물로 연명하며 한없이 가벼워지는, 저 육체적 물질성마저 휘발되어가는 어떤 또 다른 잔인한 기적 앞에서, 다시 이 질문을 해본다. 과연 우리가 그 ‘기적’에 대해 정말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해서, 혹은 고통 속에 죽어간 이들에 대해, 살아남은 자가 과연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인지 모른다. 아니 유한한 인간인 ‘우리’가 죽음에 대해 끝내 알 수 없듯이, 저 ‘잔인한 기적’에 대해, 그 고통에 대해 살아남은 자인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끝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정하는 것, 역설적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황해문화>>,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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