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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속도'가 문제의 근원인가: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 본문

여성주의역사학/여성주의대안기념

페미니즘의 '속도'가 문제의 근원인가: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

alice11 2017. 3. 19. 12:39

트윗을 보니 참고문헌 없음 지지가 다시 시작되었다. 19일이 마감이라 마감되어야 상황을 알겠다. 


모든 문제를 공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모든 문제가 토론되어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남는다는 생각. 


몇 차례 반복되는 상황에 대해 개인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거나, 페이스북에 의견을 밝히거나, 아니면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세대적 규정에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쨋든 '선생님' 연배로 혹은 위치에 있는 터라


비판이나 문제제기, 설득이나 의견 구하기 과정에 매사 조심스럽고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는데


막상 그런 과정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렇다보니, 의견 개진이나 의사소통 자체를 포기하기를 반복해왔다.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다. 


참고문헌 없음 지지 철회 논란 과정에서 내가 문제제기했던 부분은 여러 지점이지만 이 부분을 좀 정리하고 싶다. 


♣♣♣♣




 해시태그와 해시태그를 물질화하거나, '자원화'하는 과정의 구별


김주희 선생 글을 보고 사실 좀 충격을 받았었다, 그게 페미니즘 특집 글로, 해시태그 운동 당사자들 글과 같이 실린 건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기획자가 오래 신뢰하고 있는 후배라 더 그러했다. 


물론 속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논리를 좀더 잘 들여다보자. 


김주희 선생은 가해와 피해 이분법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비판 대상은 피해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해시태그 쪽이다. 


그럼 해시태그가 #...장 내 성폭력으로 지정한 그 구조, 혹은 제도편은 어찌 되나?


문제가 좀더 복잡한 것은 이 글은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가 문제화한 작가들이 가장 많이 시집을 내어 타겟이 되었던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간하는 문학과 사회에 실렸고, 이자혜 작가를 아이콘으로 해서 신세대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판을 새로 짜려던 문학과 사회 혁신호와 릿터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던 바로 그 후속 기획이라는 점이다. 



김주희 선생 글은 그런데 문학과 사회나 매체, (이는 단지 문단권력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거대 자본이나 자본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해시태그를 소비자본주의의 파괴적 향연이라고까지 매도하고 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하고 기묘한 전도가 발생한다.  




페미니스트 논자들에게조차 해시태그라는 다중의 힘은 너무 잘 보이고(과잉 가시화), 너무 빠른 제어할 수 없는 과잉된 힘으로 치부되고 있다. 반면 이런 비판을 싣고 전하는 매체의 힘은 전혀 보이지 않거나 보이지 않게 만들고(비가시화), 매체의 권력은 취약한 것으로 매번 의미화되고, 제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환원된다. 


이번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대한 '문단'의 대응은 시종일관


그런 문단의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문단의 실체는 도대체 어디인가였다.


해시태그의 속도를 비판하는 바로 그 문단 매체에 실린 글이 아무런 권력적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페미니즘 연구의 권력 논의 자체를 부정하는 일일 것이다. 



♣♣♣♣




이자혜 사태때도, SNS에서 벌어지는 일과 또 다른 맥락에서 문단 권력론과 페미니즘 관계에서 이 사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사적인 경로로 비판을 전한 바 있다. 


이자혜 사태의 교훈은 SNS 담론장에서는 아마도 해시태그의 속도전 문제가 더 중요했을 수 있으나, 그리고 페미니즘 내의 2차 가해자 삭제 논란 등


이 사태가 이토론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신세대 페미니즘 아이콘>을 전유하고 동원하려는 '매체권력'의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구나 담론의 편성 과정에서 이자혜 사건은 문단 권력론과 여기서 벗어나려는 매체의 혁신 전략에서 <신세대 페미니즘 아이콘의 전략적 전유과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서 이 사태에 대해 기존 매체 권력은 

문단 권력론 비판으로 인해 실추된 매체의 정치성을 회복하고, '권력'의 이미지를 벗고, '새판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페미니즘 운동이나 신세대 페미니즘의 아이콘을 전유하고 소비하고 동원하는 것 자체를 자기 성찰해야 한다는게 나의 지속적인 비판의 요지이다. 


그런데 이런 성찰 과정 자체가 삭제된 채, 전유하고 동원하고 소비했던 아이콘의 이미지가 실추되자, 매체의 이미지와 혁신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뺴르게 '가장 핫하다고 간주되었던 페미니즘 아이콘'을 버린 것은 바로 이 매체들이었다. 


참고문헌 없음과 관련한 일련의 지지 철회도 단지 해시태그의 속도전과 피해자중심주의의 도덕화 때문만은 아니다. 


참고문헌 없음 지지 철회 과정에서 나는 해시태그의 속도전의 반복이 아니라, 바로 이런 페미니즘 이슈의 재빠른 포섭과 삭제의 메카니즘을 보았고, 이자혜 사건과 문학 매체 혁신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를 반복적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이런 식의 삭제는 해시태그의 속도전적 요구 때문이 아니라, '문단'과 관련 주체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 때문이다. 


소비자본주의 문제는 오히려 바로 이런 기존의 권력적 매체나 상업 매체가 페미니즘 이슈를 전유하고 동원하고 때로는 핑크 워싱의 일환으로 소모해버리는 일이다.


많은 저자들이 집필 거부 운동을 하던 실천문학이 퀴어 특집을 동원한 예는 바로 전형적 사례이다. 



♣♣♣♣







그런데 김주희 선생 글은 동일한 사태를 두고 기존 매체와 매체 권력, 그리고 여러 상업적 매체들이 페미니즘 이슈를 소비하는 문제는 다 논외로 하고


해시태그 운동의 속도전, 도덕화, 검열화가 문제라고 한다.


또 이 논의를 


사실상 이질적이지만, 이어지는 맥락과 유사한 권력적 복합성이 있는 참고문헌 없음 사태에 대한 논의로 이어받아서


피해자중심주의 담론이나 2차 가해 담론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어,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담론의 편성에서 매우 위험한 담론 곡예로 전유될 수 있다는 비판적 거리를 갖게 되었다. 권김현영 선생의 이 글은 이자혜 사건 때도 잠시 페이스북에 올라왔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이슈와 관련해서 권김현영 선생이 할 수 있는 개입이라고 생각되지만, 해시태그의 속도전에 대한 논의와 피해자중심주의 담론의 한계를 논하는 담론 편성은

문단 내 성폭력과 해시태그, 문단 권력, 매체 자본과 각각에 개입되거나 바깥에 위치된 여러 주체들 사이의 복잡한 권력적 어긋남을 보지 못하거나, 잘 보이지 않게 하고 논의가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논의하고 싶었다.  


오혜진 선생 글 역시 참고문헌 없음 지지 철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고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나

지금 상황에서 해시태그를 도덕화라는 규정으로 연결하는 것은 이런 진행중인 담론 편성에서 문제라고 보았다. 



♣♣♣♣






페미니즘과 소비자본주의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은 대형 매체와 자본의 페미니즘 소비 문제이겠으나, 


이른바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관련해 중요한 사항은 해시태그 운동이라는 힘의 결집이 아니라. 


일종의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열풍'을 자원삼아 여러 형태의 사업과 기획, 상업화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이 작업에 어떤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운동이 국가 지원, 지자체 지원, 자본의 결합을 통해 여러 형태로 구축되는 것이 일방적으로 소비자본주의화라고 비판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진보 운동' 내에서도 협동조합 운동에 대해 여러 논의가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여러 형태의 진보 운동이 협동조합+시지원+국가 지원 등을 매개로 진행되는 것을 '규모의 경제'로 간주한다.

이른바 진보 운동은 정부, 지자체, 국가 기관에서 대학, 문화 제도 등 각계에 포진한 인적, 물적, 제도적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동원해서 규모를 키우고 세력화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그런 인프라가 적고, 새로 시작하는 이들 역시 도움을 구하고 기댈만한 인프라는 SNS의 자원 정도이다. SNS에서 발언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런 요구와 지원에 대한 요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개입과 거리두기의 문제도 고민거리이다.


그러나 같은 SNS에서 펼쳐지는 여타 운동, 문화운동만 해도 페미니즘 운동과는 비교도 안되는 넓은 인프라와 네트워크와 자본 속에서 움직인다. 해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도 더 결을 살필 문제이다.



♣♣♣♣





페미니즘이 흥했다가 절멸되어 온 역사를 볼 때 흥하기는 어렵지만, 절멸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담론의 맥락과 권력적 맥락에 대해 민감한 것은 너무 많은 절멸의 역사 속에 기입되어 있는 나의 한계인지 모른다. 






어떤 사안에 대해 논의를 펼치는 게 쉽지 않고 때로는 그저 소모전이다. 나도 그런 소모에 대해 이제 거의 바닥을 친 느낌이다. 더구나 페미니즘 동료들과의 비판적 토론이 쉽지 않고 그 과정에서 우정을 상실하고 감정소모와 앙금을 계속 안고 나아가는 것도 더 어려운 일이다.


매번, 이번에는 말 걸지 말고 비판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또 매번, 이번에는 그래도 말을 걸고 다르게 말을 해볼 수 있지 않나


이 매번의 반복과 실패 속에 다들 더 외롭고 더 앙금만 쌓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이제 이런 앙금도 더 쌓일 여지도 없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