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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 본문

살갗:가족 로망스/반려의 권리

최영미,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

alice11 2017. 9. 13. 12:57

*어제 포스팅에 대한 답글을 보면서, 아마 이 포스팅 내용이 "변하지 않는 부산"에 대한 토로처럼 받아들여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역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한다'는 오랜 자기 다짐, '환멸과 냉소'는 다들 하니까. 실천과 운동에는 정신승리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만, 비관해야할 순간, 정신승리로 낙관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시점에서는 정신승리보다, 단호한 포기, 포기를 선언하는 게 서로를 해방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짧은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의 축적.

*거리감에 대해, 아마 많은 부분은 이야기 하고 싶었다.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 자기분석이 될 수 있도록 경험을 연구자료로 만드는 과정의 하나랄까.

부산에 <정착>할수록, 서울이 정말로 멀게 느껴지는 기이한 거리감의 변화에 대해. 그 거리감에 비례해서 여기도 저기도 <친구>라는 형식의 관계성이 아득하게 사라지는 그런 관계성의 특이성에 대해서. 서울사람도 부산사람도 아닌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서울 출신도 부산출신도 아닌, 그런 삶의 자리의 특이성, 삶의 반경의 특이성을 사례로 만들고 이론으로 만드는 자기분석의 과정, 자기 삶을 재료로 만들어보는 과정.

*알 수 없는 이유지만, 최영미 시인에 대해, 그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에 대해, 말해야 할 완강한 책임감을 느끼지만, 말을 줄이고 입을 다물고, 창을 들여다보는 어떤 마음 상태에 대해.

다만, "가난 자랑은 있는 자의 사치"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최영미의 가난이 누군가에게 허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것만은 아닐터. 그녀가 아무리 가난을 입증해보아도, 누군가에게는 허영에 불과할 것이다. 가난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실은 가난한 자가 아니더라는 것. 가난한 자일수록 가난을 숨기고 있는 척, 혹은 더 있고 싶어하는 거, 그게 바로 가난이라는 것.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 깊이깊이 탐색했던 바로 그 가난과 허영이라는 굴레에 대해.

평생 공직에 있었으면서도 왜 노년에 이르러 가족도 없이 <맥도널드>를 떠도는 난민으로 사냐며, 조롱과 '걱정거리'로 우리 곁을 떠난 그녀에 대해.

왜 그렇게 될 때까지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했냐며, 홀로 병들어 생의 경계를 넘나들던 또다른 그녀/작가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해.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 계약을 해지하면, 여성이 어떻게 사회계약 관계에서도 추방되는가를 자기 몸과 살을 파헤쳐 말로 부려놓은 것이다. 이 작품을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에 대한 섣부르고 허영에 찬 후일담으로 소비한 것은, 그 시대의 '후일담 장사꾼'들이었고 소비자들이었다.

이 시대 한국에서의 <정치적 결사>(혁명)란 바로 이런 결혼 계약에 의해 근원적으로 구축된 사회계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성이 정치적 결사에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를 기입할 수 있었던 것이, 겨우 이러한 결혼계약과 사회계약의 인접성 밀착성으로만 가능한 시대.

그런데, 그녀는, 바로 이런 <정치적 결사>가 끝났다는 선언을 과감히 해버린 것이다. 너희들의 혁명 이런 것이 아니라.

결혼 계약에 근거한 사회적 계약 관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정치적 결사의 주체>로 그 일원(혁명의 동료)으로 나란히 나아갈 수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거부와 단절의 마니페스토.

그러나 그 마니페스토로 구성될 새로운 여성적/혁명적 주체화의 길은 멀고도 고단하고도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꼭 개인의 한계는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인 젠더 차별의 구조와 이미 성적 계약에 의해 노예적으로 구축된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결사의 모순은 개인의 한계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사유의 한계' 아니던가? 최영미의 허영을 논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표현의 용례를 따르자면 '부르주아적 사유의 한계인 것이다.'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최영미, <혼자라는 건>, <<서른, 잔치는 끝났다.>>

결혼 계약의 파기와 사회계약에서의 추방.
어렵게 들릴까?

만일, 당신이 대학 동아리 친구와 결혼을 했고, 그는 당신 일과 사회적 활동의 같은 장의 동료이고, 다른 동료적 관계 역시 이렇게 깊이 연결되었다면, 결혼 계약이 파기되었을 때 이 관계에서 추방되는 것은, 아마도 100퍼센트 여성이 된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문단과 출판계, 문화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타의 '꿘 동료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추방된 그녀에게 페이스북은 아마도, 생애 얼마되지 않는 관계망의 기능을 했다. 페이스북이 공론장이니 말조심하자는 그런 한가한 소리에 귀보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녀의 가난과 삶에 대해 누구도 말하고 소비하고, 근심할 권리도 없다.

그녀에 대해 더 말을 보태기를 주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