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에 아이들 미래 있는가”
문재인과 젠더정치 왜 어긋날까
과거 의장 걸치고 미래 선언 “기이”
2000년대 초반 ‘출산율 제로가 멀지 않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을 때 너무 극단적인 판단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출산율’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그러나 굳이 ‘출산율 제로가 멀지 않다’라는 제목을 쓴 것은 임신, 출산, 육아 등의 문제를 ‘출산율’이라는 인구 통계학적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한 결국 출산율 제로라는 귀결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출산율’ 저하는 일종의 출산 거부의 사회적 흐름이 나타난 통계적 결과에 불과하다. 출산 거부라는 사회적 흐름의 원인과 이를 촉발하고 지속시키는 복합적 측면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직 거의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2016년 행정자치부가 만든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비판하면서 인터넷상에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가임 거부 시위’를 조직했다. 가임 거부나 출산 거부가 의식적인 정치적 구호로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출산 거부는 그동안 출산율이라는 통계적 수치로 환산돼 사회의 표면에 잠시 나타났다. 여성뿐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 주체들이 지금까지 출산 거부를 의식적인 ‘거부’나 저항의 형태로 생각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의식적인 거부나 저항이 아니지만, 출산 거부는 한국사회 기저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아우성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출산 거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거치면서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출산 거부란 출산과 관련된 주체들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적 조건의 산물이다. 또 아이를 낳는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라진 후에 이 땅에 남아 살아갈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출산 거부는 아직 오지 않은 ‘도래할 주체’에 대한 앞선 책임감의 산물이며 그런 책임감을 이 사회에 묻는 말이기도 하다. ‘이 사회에 아이들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출산 거부란 그 자체로 미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집단적인 아우성이기도 하다. 나아가 출산 거부가 정치적인 결단이 될 때 거기에는 더욱 복잡한 요인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질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출산 거부는 이른바 자살률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출산 거부는 미래에 도래할 주체의 운명을 묻는 말이자 책임의 한 방식으로, 미래에 도래할 주체를 재생산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반면 자살은 ‘자기소멸’을 통해 미래와 주체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일이다.
이뿐 아니라 한국에 유독 빈번하게 나타나는 ‘가족 동반 자살’은 자신이 생을 마감한 이후 남겨질 가족의 미래에 대한 공포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출산 거부와 어떤 공통적 요인을 갖고 있다. 물론 출산 거부와 재생산 거부가 그 자체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정치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출산 거부와 재생산 거부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내라는, 사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절규이다. 오랜 세월 사회 기저에서 울려 퍼지던 이 아우성은 여전히 이 사회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계속 출산율과 자살률 같은 인구 통계학의 지표로만 파악될 뿐이다.
최근 대표적인 보수 언론은 ‘한국 인구 3대 재앙, 올해 한꺼번에 터진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인구 3대 재앙을 번호까지 매겨가며 “①신생아 처음으로 40만 명 붕괴”, “②노인 14% 넘어 고령사회 진입”, “③생산가능 인구 올해부터 줄어”라고 정리했다. 사회 구성원들은 미래를 달라고 외치는 데 이에 대한 응답은커녕 인구 3대 재앙이라는 인구통계학적인 리스크 관리 기술만 범람하는 전형적 장면이라 할 것이다. 인구 재앙이라는 이 담론에는 사람도 사회도, 미래에 대한 질문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보진영’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출산 거부와 재생산 거부가 미래를 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볼 때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상당수가 미래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라 할 것이다. 재생산 거부의 흐름이 사회 기저에 깊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지금 여기의 시간 흐름 속에서 가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대선 후보 중 현재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정책 제안이 젠더정치 차원에서 자꾸 어긋나는 한 이유를 이 지점에서 근원적으로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 전 대표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민주적이고 온화한 아버지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던”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 한계를 깨달은 현재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미래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진다. 이 미래에 대한 선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너무나 선형적이고, 미래를 상상하는 데 일말의 어려움도 없다. 과거를 계승한 ‘3기 민주정부’라는 미래의 선언, 4차 혁명이 도래하면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미래의 선언. 찬란한 과거를 계승하고 그 한계를 오늘에서 극복하고, 그렇게 미래는 자연스럽게 선언된다.
이런 미래를 선언하는 주체의 위치는 재생산 거부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현실 감각과는 아주 어긋나 있다. 이 양자 사이에는 미래를 상상하는 역사철학적 시간의 근원적인 어긋남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구통계학의 비인간적 리스크 관리도 문제지만, 미래를 달라는 데 미래는 이미 선언됐다고 응답하는 이런 방식은 어쩌면 더 근원적인 차이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미래가 사라진 세계에서 절망과 공포에 절규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과거의 의장(군복)을 걸치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미래를 선언하는 응답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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