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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민 식민자를 연구했지만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라고 보기는 어려운 본문

대안적 지방담론과 정착민 식민주의

정착민 식민자를 연구했지만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라고 보기는 어려운

alice11 2024. 8. 15. 11:25

우치다 준의 <<제국의 브로커들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은 기존 일제 강점기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지적했듯이. 한국에서는 아직 정착민 식민주의를 한국 사회 분석의 이론과 방법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거의 인식이 없는 상태여서 논의가 많이 비약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논문이 아니니까 다소 간략하게 문제의식을 정리해보자. 책 소개에 따르면 <<제국의 브로커들>>은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 출간한 것이라고 한다. 2011년 어름에 출단되었다.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가 '오늘의 미국 사회, 오늘날의 소수자 정치' 연구를 위한 새로운 방법론으로 도입된 중요한 촉발제 역할을 한 것이 미국 내의 소수자 정치, 특히 퀴어 역사학의 등장이었다. 무노스의 반사회적 전환과 관련한 논의가 이미 2010년대 제기되었기에 이 박사학위 논문을 이런 미국의 학문적 풍토에서 제출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혹은 그래서 매우 흥미로운 건 이 저작이 일제 강점기 역사 서술에서 거의 젠더를 비가시화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영어권 연구에서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를 하면서 젠더를 비가시화하는 연구를 찾아보는 게 사실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건 영어권 연구가 더 소수자 친화적이어서는 아니다.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 방법이 최근 중요하게 이론으로서 대두한 것은 정착민 식민주의가 '과거' 즉 노예제도 시대라는 특정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인종차별은 없다. 아, 옛날에는 있었지. 지금 미국 사회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시대라고" 같은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방식이 미국 사회의 지배적 정동이 된 시대.

학문장 역시 "인종차별, 이런 건 과거에 대한 연구로는 의미가 있지. 지금은 디지털 인문학이라던가, AI 미학 같은 걸 연구해야 하는 시대지"라거나, "미국에는 성차별은 없어, 그건 '이슬람 문제'거나 '가부장적인 유교권'과 같은 지역 문제이지. 에스노그라피 같은 걸 해야지, 이론으로서는 뭐 시효만료 아닌가?"

이런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단절적으로 재구성하는 집합적 흐름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를 학계의 정착민 식민주의이자 역사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이 정착민 식민주의, 소수자 연구, 비판적인 어펙트 이론을 제기하면서 대항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미국 학계에서 연구 수행을 한 학자의 저작이, 게다가 정착민 식민주의를 연구한 저작에서 젠더 비가시화가 이토록 철저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진진하다. 그건 '개인'의 문제도 있겠으나 이 저작의 연구대상과 연구 필드의 규정력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른바 일제 강점기 연구의 뜨거운 논점이건 지루한 논점이건 모두 민족과 계급, 혹은 민족과 계급을 탈젠더화된 것으로 보는 연구가 지배적이기에, 이 규정력이 정착민 식민주의 아니 정착민 식민자를 행위자로 도입한 연구에서도 전혀 부서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착민 식민자를 행위자로 도입해서 권력이 복잡해졌을지는 몰라도 탈젠더화된 민족과 계급만이 오로지 작동하는 학문장의 규정력을 더욱 강화했다. 

미국 학계의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의 주요 논점 혹은 출발점 중 하나는 인종과 젠더는 대립적인가 혹은 중요도에 차이를 정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백인 페미니즘과 흑인 페미니즘 사이의 격렬한 논쟁 역시 이 출발점에 있다. 비판적 인종주의 이론과 페미니즘은 대립적이거나 양립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사실 이런 식의 정착민 식민주의의 재생산의 결정판은 비판적 인종주의와 젠더 연구를 '정체성 정치'로 매도하면서 "얘들아 중요한 건 계급이란다"라고 말하는 학계의 리버럴이다. (미국 학계의 상황에 대한 진단)

이른바 비판적 인종주의를 흑인 남성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운동이라거나, 흑인 본질주의라고 비판하거나, 반대로 페미니즘은 백인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식의 주고받는 비판들은 그 비판 자체가 '틀렸다'기보다, 이런 방식이 오히려 소수자 운동 내부에서 인종과 젠더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오히려 정착민 식민주의의 지식과 인식구조를 정당화하고 강화한다는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이전에 소개한 데니스 다실바의 연구는 이런 고민의 지점을 섬세하게 정리하면서 이론을 구축한다. 젠더와 인종을 대립시키거나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구획할 수 있다는 사유 방식이야말로 "지식"으로 확고해진 정착민 식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분리할 수 있는 젠더와 인종은 없다는 것. 양자는 사유의 틀거리이지만, 실제적인 작동에 있어서 양자를 명확하게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게 계급과 또다른 젠더와 인종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치다 준도 논하고 있는 일본인 정착민들의 바라본 '조선'과 '조선적인 것'은 실은 표면적으로는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규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것이었다. 조선 민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이 일본 민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해 저급하고 열등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위계에 의해 구축되면서 동시에 그 위계를 비가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식민주의는 피식민자의 '민족 정체성'을 목표물로 설정하여, 요리조리 뜯어보고,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식민자들은 거의 대부분 아카이브 광이었다), 에스노그라피에 대한 열광에 사로잡혀서 자기 나름의 '학문'을 수행하여 피식민자 민족 정체성에 대한 방대한 아카이브와 지식을 쌓는다.

그러니까 '민족 정체성'이라는 게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위계에 '의해' 구축된다는 것(민족 정체성이 젠더와 인종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을 비가시화하는 게 바로 식민주의이다. 식민 사관이란 바로 민족을 젠더와 인종과 무관한 단지 '민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그래서 우치다 준의 <<제국의 브로커들: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은 '정착민 식민자' 연구를 일제 강점기에 도입한 흥미로운 연구이지만, 연구 방법에서는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의 이론과 정치적 논점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연구 대상으로 정착민 식민자를 추가하긴 했으나 "민족"을 젠더와 무관한 것으로 학문적으로 기술하는 역사서술 방식을 반복하고 강화한다. 최근의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는 정착민 식민주의가 경찰력, 군사력과 같은 강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전쟁, 학살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법, 제도, 지식, 과학, 문화, 예술, 문학을 통해서 재생산되는 방식을 파헤치고 비판한다. 

 

그런 맥락에서 <<제국의 브로커들: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은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의 레퍼런스라기보다, 특정한 학문장의 규정력 즉 민족을 젠더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하는 바로 그 방식이 실은 정착민 식민주의를 강화하고 재생산한다는 점을 고찰하도록 하는 사례라고 하겠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젠더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