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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그렇게 하지 않기'와 페미니즘 실천의 역사: 정동 레짐들의 이행과 새로운 주체성 본문
젠더어팩트 스쿨 프로그램을 보신 분은 눈치채셨을 지 모르겠으나, <<혼자살아가기>>가 1987년에서 1990년대
'민주화'에 '운동권'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2000년대 중반까지의 경험을 담고 있다면, 2회 프로그램은 주로 지금, 여기 2018년에 부상하는 혼자살아가기에 대한 정동과 삶의 양태를 비교하여 살펴봅니다.
영화 <소공녀>에 대해 페미니즘 비평 차원의 다양한 논의가 있었고 '안정된, 정규 노동'을 하지 않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주인공의 삶의 방식과 그 선택이 오늘날 페미니즘 실천의 새로운 함의와도 결부된다고 평가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새로운 것일까요?
한편으로 영화 <소공녀>에서 나타나는 삶의 방식은 1990년대 부상했던 삶의 양태나 정동과도 유사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소공녀>는 90년대의 어떤 반복일 뿐일까요?
<<혼자살아가기>>에서는 2006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를 사례로 1990년대말에서 2000년대 초 등장한 새로운 정동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주인공 여성은 결코 애써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다. 독서는 세상에 대한 노출을 피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자 삶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 경력개발에는 관심이 없고 필요할 때, 그러니까 기초적인 생계를 위협받을 때는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화자는 대학 졸업장을 사용하지 않는 데 대해 아무런 수치심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와 두 친구(채린과 유희)는 자기 중심성을 새로운 세대의 증표라며 분명하게 자랑스러워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채린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살 듯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을 할 뿐이다. 유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을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살 듯 자기 자신을 위해 소설을 쓸 뿐이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을 뿐이다.(백수생활백서)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이나 기업가적 주체에 포섭된 것이며, 1990년대 말 부상했던 <자유로운 삶>, <게으를 권리> 등 '향유' 주체로의 기울어짐이 "'결국' 신자유주의적인 기업가적 주체(자기 계발 등의)에 포섭된 것이다"라는 비판은 이른바 '진보 논자'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논의이다.
물론 <혼자살아가기>에서 송제숙도 이런 지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연구의 중요한 지점은 '결국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욕망에 포섭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선택과 힘겨루기의 지난한 과정을 볼 줄 알고,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주체들의 역사가, 정동의 이행들이 보인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연구에 참여한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여성들이 '비혼, 자유로운 삶,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나 NGO 등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 것은
1. 그녀들이 이른바 운동권의 남성적 권위주의와 대결하고 싸우면서, 그렇게 살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에 반하며 그렇게 살지 않기로 한 선택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름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2.'즐겁게 살고 싶다'는 향유 주체에로 기울어지는 것은 민주화 혁명기를 지배하던 상실감과 사명감(사회적 애도의 노역, 로랜 벌랜트)이 혁명 이후 시기에 향유에 대한 감각으로 넘어가게 된 정동 레짐들 간의 이행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송제숙은 로랜 벌랜트의 자기 유예 개념을 사용해서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중간 휴식 혹은 유예의 행위로서 즐거움의 정동으로 이행"한 것으로 분석한다. 또 이를 김혜순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김혜순은 민중문학의 맥락에서 자신의 시는 직접 저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죽음을 재료로 삼아 요리에 대한 글을 썼다.(중략) 나는 저항의 무거움을 즐겁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려고 했고, 그 결과 정치적이지 않은 듯해 보이는 유형의 시에 이르게 되었다.
3. 또한 송제숙은 자기 유예로서 즐거움의 정동은 단지 신자유주의 시대의 산물이 아니며, 후기 자본주의 담론이 된 향유와는 다른 종류의 쾌락 레짐의 역사적 원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민중문화와 운동권 문화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흥겨움'이나, 연구참여자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했던 '만화책에 대한 열광' 등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의 쾌락 추구 현상이며 그런 사례는 더욱 많다. 따라서 이런 쾌락 레짐을 모두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4. 그녀들이 '운동권'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대부분 비정규직의 불안정 노동을 하면서 그 영역에서 '친밀한 돌봄'을 맡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원천은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향유의 정동과 연결된 돌봄 영역은 부분적으로 과거의 영역에 이미 존재했다.
즉 비혼, 자유로운 삶, 불안정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을 하면서 친밀한 돌봄의 가치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그녀들의 선택과 삶의 양태는 그녀들이 살아낸 역사와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마주하고 싸우고 거부한 구체적인 그 무엇과의 대결의 결과였다. 즉 그녀들은 단지 자유롭고 즐겁게 살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더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즐거움에 대한 그녀들의 선택과 기울어짐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동일화하는 것은 매우 쉽고 피상적인 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어떤가?
<소공녀>에 나타나는 선택과 정동은 90년대의 반복인가?
탈코르셋 운동은 권위주의적 운동권 문화의 반복이며, 자유로운 선택'이 중요할 뿐일까?
탈코르셋을 선언하는 그녀들의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을 불편해하면서 결국 그것은 '이전 운동원의 권위주의 문화의 반복'이며 '자신을 위한 선택'이 본질이다라는 비판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현재의 탈코르셋 운동을 오히려 '과거', 즉 1990년대의 패러다임으로 회수하여 동일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페미니즘 내부의 분화는 격렬하다. 과연 우리는 저마다 싸우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서로가 서로의 싸움을 진부한 반복으로 치부하고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태도야말로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페미니즘에 가해졌던 조롱이 아니었던가?
그런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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