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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신체이론/젠더어펙트

'극단주의'의 추억:운동을 탈정치화해온 주체들이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

alice11 2021. 4. 21. 11:52

'극단주의'의 추억:

운동을 탈정치화해온 주체들이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

고독한 중재자라는 자기 규정이 증오선동을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과정과 역사

 

하루 한포 421, 2021

 

 

페미니즘을 극단주의로 몰고 소수자 운동은 '나중에' 해결하겠다는 정부와 지지 집단의 인식과 정동 구조에 대해서 계속 여러 발표문 초고와 논문을 통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 고민의 전체적 내용을 여기 다 담기는 불가능하고, 점점 더 글을 짧게 못쓰는 게 '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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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민노총 게임 대회 관련한 논란을 올렸습니다. 게임하기를 정치적 행위로서 부적절한 것으로 비판하는 방식과 그 효과들이 흥미롭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저도 이미 많은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어 굳이 다시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보다는 노동자 조직의 정치성과 현단계의 시급성을 논하는 사파기금과 또 여러 페친분들의 문장과 정동들과

민노총의 여러 행사 포스터들과

이에 대해 주로 이른바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는 기존 운동의 도식성에 대한 비판들에 대해서 좀 생각이 많아졌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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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노동운동의 전부가 아니지만, 지금은 거의 유일한 대표성을 지니게 되기도 했지요. 이 사태가 민주노총이 하는 일은 다 비판한다거나, 류호정 의원에 대한 앞뒤없는 조롱처럼 청년세대에 대한 운동권 내의 반감 등의 산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글이 길어졌어요.

오사카 외곽의 가마가사키를 오래 드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거기서 '새로운 민관협동 예술운동"의 사례를 보고 누군가는 거기서 새로운 꼬뮨의 가능성을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들이 여기서 '늙고 슬픈 이른바 홈리스'로 살게 된 길고 긴 역사를 살피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가마가사키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페친이신 김미례 감독님의 여러 작업 덕분이기도 합니다.

노동운동의 긴 역사 이른바 '극단주의'를 둘러싼 여러 정동들

----어제 민노총 게임대회와 이를 비판하는 말들과 정동들 속에서 문득 그런 연속성의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페미니즘을 '극단주의'라고 매도하는 일은 이번 보궐선거 이후 갑자기 나오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을 극단주의라고 매도하기 시작한 건 아주 일찍 '미투운동'이 막 시작된 2016년 전후입니다.

이선옥의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택적 정의와 진보의 가치---극단주의자들이 우리의 신념을 대표하게 해서는 안됩니다>(2016년 7월 25일)가 대표적이고 발화점입니다.

극단주의라고 규정한 페미니즘이 <페미니즘 굿즈 티셔츠를 입어서 해고당한 넥슨 사건>이라는 점을 다시 환기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때부터 성차별에 의한 해고와 이를 비판하고 문제제기하고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일을 "운동권 내 극단주의"로 규정해왔습니다.

즉 워마드나 인터넷 밈이 아니라, 정확하게 <성차별에 의한 해고에 저항하는 운동>을 운동권 내 극단주의로 규정했고 그런 방식이 이후 안희정, 박원순, 오거돈을 지나면서도 계속되었고, 선거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반페미니즘적 반동reaction 뿐 아니라, 이른바 노동운동에 대한 오래된 반동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원점은 이른바 노무현 정부 당시 이른바 "극렬운동권", 투쟁식 운동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합의)와 이에 동참하지 않는 운동권을 극단주의로 낙인 찍어온 역사 또한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흥미롭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문빠'를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광기에 가까운 흐름으로 비판함에도(저는 '문빠'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규정이 오히려 사태를 희화화 해서 문제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해서요.)

막상 제 페친들을 비롯한 당사자분들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중도적인,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노동 착취의 사회구조를 급진적으로 개혁하기보다, <이해관계 당사자인 노사정이 테이블에 앉아서 합의를 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을 제도화했고, 이런 합의에 동참하지 않는 세력을 극단주의로 몰아간 방식은 상당히 다른 국면에서 기이한 형태로 반복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차별적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한 가장 초보적인 제도적 과정이지만

현 정부는 이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소수자 운동 세력과 반성소수자 차별선동 세력 사이의 갈등의 문제이고, 정부는 이를 중재하는 즉 "사회적 합의 테이블"을 놓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규정하는 방식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근본적 개혁이 아니라,

반페미니즘적인 남성과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성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으로 보고

그런 페미니즘은 틀렸다는 사람들과 '다른 열혈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 충돌로 보고

자신들은 이 골치아픈 이해관계 충돌과 갈등에 대해서, 언제나 항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자기 규정들.

---자신들이 이 골치아픈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세력이라고 믿고 있고 계속 그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렇게 합리적 중재자로 인식하고 페미니즘을 극단주의로 매도하는 건, 90년대 이래 자신들 스스로가 진행해온 '운동의 탈정치화'와 제도화 과정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합리성과 중재자라는 자기 규정이 계속해서 차별선동을 부추기고, 그래도 된다는 적극적 신호를 사회적으로 전파하는 발화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들은 아마도 전혀 사태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고 보입니다.

오히려 본인들이 이 도저한 극단주의 물결 속에서 홀로 고민하는 성찰적 주체라는 규정이 더욱 강화되는 그런 자기규정의 악순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 운동이 제도화된 역사와 책임은 어쩌면 다른데 있는데, 서로 나뉘어 날을 세우고, 세대 갈등의 견고한 벽을 확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민노총 게임 논란은 어떤 장면에서 실은 그런 생각과 말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해서 여기 이 합리성과 중재자 역할을 사랑하는 탐라에서 나름으로 페미니즘 연구의 언어를 기입해서, 저 차별선동의 발화점을 저지해보려고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