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미스터트롯
- 2020 총선
- 송가인
- 해피엔딩
- 미스트롯
- 플렉스
- 조국
- 입신출세주의
- 안으며 업힌 #이정임 #곳간
- 대중정치
- 젠더비평
- 노인돌봄
- 류장하 감독
- 정만영 #사운드스케이프#안으며업힌#이정임#김비#박솔뫼#곳간
- 정도적 불평등
- 드라마 연인#여성 수난사 이야기#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초국가적 문화사
- 장애학
- 뷰티플 마인드
- Today
- Total
alicewonderland
<성차별적 의례는 무엇을 침해하는가: 기인한 친족의 유례 없는 폭력> 본문
<성차별적 의례는 무엇을 침해하는가: 기인한 친족의 유례 없는 폭력>
조문을 통해 이런 친족 공동체의 권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승인하는 건 바로 광역단체장 성폭력 사건의 핵심인 바로 그 친족적 결속의 문제와 위력을 무반성적으로 다시 상연하는 일이다.
"우리는 아무 문제없다." "그럼에도, 당신의 상실은 나의 슬픔의 대상이 된다."는 선언.
먼저 첫번째.
친족됨을 다시 확인하는 의례를 통해서, 이 친족됨의 권력이 모든 결속에서 추방한 존재의 자리는 다시금 승인된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언급에는 사실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례에서 '피해자'라는 말은 넘치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그는 단지 이 사건의 '피해'로 인해, 직장을 잃고, 얼굴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고, 공공연하게 발언할 자유도 잃고, 모든 관계에서 차단당하여 유배자처럼 고립되어 있다. 세상에 어떤 '피해'가 이렇게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례에서는 '피해'라는 규정보다 기존 사례에 유사한 건 '학살' 정도밖에 없다.
친족 공동체의 결속을 확인하는 '인간적 의례'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바로 그 요구를 통해 다른 한 인간의 인간으로서 살 결속, 소속됨, 존재 자체, 삶의 자리, 터전, 직장, 일, 얼굴, 목소리, 공공연하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를 빼앗는 그런 침해에 '이차 가해'라는 말은 부족하다. 이건 국가, 정치조직, 학연, 연고가 뭉친 기이한 친족에 의해 반복해서 수행되는, 전례가 없는 폭력이다.
국가에 의한 괴롭힘은 어디에서 해결해주나?
최근 시행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에 따르면 조직 내 위계나 실행자의 의도는 아무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해당자의 노동 조건을 현격하게 침해하는 행위를 '괴롭힘'이라고 규정한다.
이 사건 피해자는 단지 이 '피해'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그 이전에는 정치조직과 공공 기관에서 노동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가 다시 노동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정치조직과 공공 기관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이 정치조직의 친족됨과 위력을 재확인하면서, "우리는 문제없다."고 하는 건 노동권을 박탈당한 자에 대한 '괴롭힘'인데, 이런 형태의 괴롭힘도 사실 유례가 없다.
이 유례없는 폭력을 '이차가해'라고 부르는 건 부족하다.
2. 슬픔의 차별적 할당: 권력 상실의 비통과 산 자의 상실에 대한 조롱
앞서 <섞일 수 없는 부대낌, alien affect>에서도 논했듯이, 대선 이후 특정 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권력 상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을 토로했다. 그들은 진실로 비통해하고, 눈물을 삼키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슬픔을 비난하거나 앞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즈음 벌어지고 있는 어떤 슬픔과 비통의 의례와 상연에 대해 비교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특정 정치 조직의 권력 상실을 이처럼 애통해하는 건 사실 특이하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기 일처럼 애통해하는 데, 자신을 이 정치 조직과 특별한 친족관계로 인식하고 감각하기 때문이다. 정치 조직과 권력을 말 그대로 피붙이처럼 느낀다.
그래서 특정 정치 조직의 권력 상실을, 마치 애착관계의 대상을 상실한 것처럼, 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으로 느낀다.
이 슬픔은 피와 살이 된 권력과 친족성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친족들은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한 한 인간의 상실에 대해서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조롱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낀다.
피와살로 되어 있지 않은 '권력'에는 친족적 귀속감을 느끼고, 그 상실에는 온몸으로 비통해하는 이들이
피와살로 된 인간의 고통과 상실에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하며 그저 조롱하고 짓밟는다, 짖밟는다는 의식과 감각조차도 없다.
'애도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권력 상실을 비통해하는 이들은
피와 살을 지닌 한 인간의 처참한 박탈과 상실에 아무 감정을 느끼지도 슬퍼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오래 인문학을 연구해왔고, 근대 최고의 최악의 사례인 파시즘만 줄곧 연구해왔지만
사실 이 기이한 친족됨과 기이한 감각 구조와 이 기이한 폭력에는 비교할만한 사례가 별로 없다.
이 기이한 폭력에는 '이차 가해'라는 말이 부족하다. 왜 그 말로부터도 뒤로 물러서야 하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설득이라는 이름으로 물러서서는 안된다.
'혐오발화아카이브 > 2203 대선 이후 증오선동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고용 (0) | 2022.03.16 |
---|---|
<여성할당제 배제=지역안배 배제>, 지역안배 배제가 은폐되는 과정 0314 (0) | 2022.03.14 |
지역 안배, 여성 할당 배제 (0) | 2022.03.13 |
<대선 이후 젠더 갈등 프레임 정리 1: 증오 정치와 '일자리'> (0) | 2022.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