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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적 의례는 무엇을 침해하는가: 기인한 친족의 유례 없는 폭력> 본문

혐오발화아카이브/2203 대선 이후 증오선동 정리

<성차별적 의례는 무엇을 침해하는가: 기인한 친족의 유례 없는 폭력>

alice11 2022. 3. 14. 15:23

<성차별적 의례는 무엇을 침해하는가: 기인한 친족의 유례 없는 폭력>

 
앞의 글 <성차별적 상/장례 비판의 역사, 문제는 인간적인 게 아니다>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 결속(ties)과 친족됨(kinship), 귀속(beloing)의 의례와 침해
 
성차별적 의례는 차별을 정당화한다. 영정 사진을 누가 드느냐, 입관 절차에 상주와 같이 관을 드는 사람은 누구냐는 모두 이른바 "종중" 넓은 의미의 '가문'에서의 위계와 관계를 표시한다. 
 
이는 단지 가족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조문은 사돈의 팔촌보다는 사회적 관계에서의 결속과 가까움, 소속감을 표시하는 의례이다. 조문을 하는 행위로 상주와 조문자의 결속은 다시금 확인된다. 선배 상가에 반드시 조문을 가야한다는 압박은 이런 결속의 위계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상례는 단지 '가족'으로서나 인간으로서의 원초적 결속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족의 확대된 형태로서 사회적 결속을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의례이다. 
 
다들 지적하듯이 안희정 상가 조문은 이렇게 상주와 조문객 사이의 '결속', '가까움'을 공공연하게 널리 알리고 확인하고 강화한다. 이런 의례를 반복하면서 이들은 확장된 가족으로서 특이한 형태의 '친족'이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권력형 성폭력>, <광역단체장 성폭력 사건>의 특이성과 대응에 대해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계속 논의해온 이유다. 광역단체장 성폭력사건과 사건 이후 광범위하게 반복되는 '이차가해'는 사실상 이차 가해라는 기존의 범위로도 환원되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하고 이례적이다.(<성폭력 부정주의>에 대한 나의 논의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이는 지자체나 정당과 같은 정치조직과 공적 영역이 기이한 친족적 결속에 의해 권력을 만들고 재생산해온 특이한 위력 형성의 산물이다. 

 

조문을 통해 이런 친족 공동체의 권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승인하는 건 바로 광역단체장 성폭력 사건의 핵심인 바로 그 친족적 결속의 문제와 위력을 무반성적으로 다시 상연하는 일이다. 

 

"우리는 아무 문제없다." "그럼에도, 당신의 상실은 나의 슬픔의 대상이 된다."는 선언.

 

먼저 첫번째.

 

친족됨을 다시 확인하는 의례를 통해서, 이 친족됨의 권력이 모든 결속에서 추방한 존재의 자리는 다시금 승인된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언급에는 사실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례에서 '피해자'라는 말은 넘치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그는 단지 이 사건의 '피해'로 인해, 직장을 잃고, 얼굴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고, 공공연하게 발언할 자유도 잃고, 모든 관계에서 차단당하여 유배자처럼 고립되어 있다. 세상에 어떤 '피해'가 이렇게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례에서는 '피해'라는 규정보다 기존 사례에 유사한 건 '학살' 정도밖에 없다. 

 

친족 공동체의 결속을 확인하는 '인간적 의례'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바로 그 요구를 통해 다른 한 인간의 인간으로서 살 결속, 소속됨, 존재 자체, 삶의 자리, 터전, 직장, 일, 얼굴, 목소리, 공공연하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를 빼앗는 그런 침해에 '이차 가해'라는 말은 부족하다. 이건 국가, 정치조직, 학연, 연고가 뭉친 기이한 친족에 의해 반복해서 수행되는, 전례가 없는 폭력이다. 

 

국가에 의한 괴롭힘은 어디에서 해결해주나?

 

최근 시행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에 따르면 조직 내 위계나 실행자의 의도는 아무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해당자의 노동 조건을 현격하게 침해하는 행위를 '괴롭힘'이라고 규정한다. 

 

이 사건 피해자는 단지 이 '피해'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그 이전에는 정치조직과 공공 기관에서 노동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가 다시 노동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정치조직과 공공 기관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이 정치조직의 친족됨과 위력을 재확인하면서, "우리는 문제없다."고 하는 건 노동권을 박탈당한 자에 대한 '괴롭힘'인데, 이런 형태의 괴롭힘도 사실 유례가 없다. 

 

이 유례없는 폭력을 '이차가해'라고 부르는 건 부족하다.

 

 

2. 슬픔의 차별적 할당: 권력 상실의 비통과 산 자의 상실에 대한 조롱

 

앞서 <섞일 수 없는 부대낌, alien affect>에서도 논했듯이, 대선 이후 특정 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권력 상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을 토로했다. 그들은 진실로 비통해하고, 눈물을 삼키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슬픔을 비난하거나 앞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즈음 벌어지고 있는 어떤 슬픔과 비통의 의례와 상연에 대해 비교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특정 정치 조직의 권력 상실을 이처럼 애통해하는 건 사실 특이하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기 일처럼 애통해하는 데, 자신을 이 정치 조직과 특별한 친족관계로 인식하고 감각하기 때문이다. 정치 조직과 권력을 말 그대로 피붙이처럼 느낀다.

 

그래서 특정 정치 조직의 권력 상실을, 마치 애착관계의 대상을 상실한 것처럼, 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으로 느낀다.

 

이 슬픔은 피와 살이 된 권력과 친족성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친족들은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한 한 인간의 상실에 대해서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조롱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낀다. 

 

피와살로 되어 있지 않은 '권력'에는 친족적 귀속감을 느끼고, 그 상실에는 온몸으로 비통해하는 이들이

피와살로 된 인간의 고통과 상실에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하며 그저 조롱하고 짓밟는다, 짖밟는다는 의식과 감각조차도 없다. 

 

'애도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권력 상실을 비통해하는 이들은

피와 살을 지닌 한 인간의 처참한 박탈과 상실에 아무 감정을 느끼지도 슬퍼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오래 인문학을 연구해왔고, 근대 최고의 최악의 사례인 파시즘만 줄곧 연구해왔지만

사실 이 기이한 친족됨과 기이한 감각 구조와 이 기이한 폭력에는 비교할만한 사례가 별로 없다.

 

이 기이한 폭력에는 '이차 가해'라는 말이 부족하다. 왜 그 말로부터도 뒤로 물러서야 하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설득이라는 이름으로 물러서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