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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후기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를 읽는 방법 간략 메모> 본문

연결신체이론/젠더어펙트

<세미나 후기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를 읽는 방법 간략 메모>

alice11 2024. 1. 4. 14:17
 
발표문 최종 마감, 막바지라서 어깨가 끊어질 것 같지만, 기억이 따끈할 때 정리해두는 게 필요해서 남기는 간략 메모.
 
 
1. 사라 아메드는 왜 <정동적 전환>론을 비판했나?
 
아메드가 어펙트 연구와 감정 연구가 같다거나 구별이 필요없다고는 전혀 논하지 않음. 감정 개념과 어펙트 개념의 문제와 다른 지점.
 
(제가 여러 논문에서 이미 분석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자세한 사항은 논문을 참고해주시길)
아메드는 <정동적 전환론>을 학계의 신자유주의, 학문적 백래시로 봄.
 
2. 이론에서의 신자유주의와 정동적 국가라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상동성:
 
그 근거와 이유는 <정동적 전환론>자들이 이론과 이론 실천의 <역사>를 <과거>로 만들고 지금 여기와 동떨어진 것으로 구축,
**역사를 부정/삭제하고 <과거>로 만들면서 국가를 <과거와 화해하는 주체>로 설정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새로운 국가의 미래"를 제안.
지금 여기와 관계없는 <과거>를 만들어서 역사를 부정하고, 이에 입각해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라는 시간성을 신자유주의 국가 담론으로 발명
이는 2000년대부터 본격화된 영국, 호주 등 유럽과 미국 국가에서 <식민주의 역사><제국주의 역사><노예화의 역사>를 <과거>로 만들면서 과거와 구별되는 현재와 미래를 구축하는 흐름과 같은 선상. 이른바 <국가주도의 과거사 화해 담론>과 <다문화주의적 관용론>의 시대의 도래.
그러니까 사라 아메드는 <신자유주의의 감정의 문화정치>를 분석하거나 <신자유주의 분석에 특화된 현대 이론으로 정동 연구>를 정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 아메드는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단절적 새로움>을 강화하는 통치성을 국가 정책 뿐 아니라, 이론 내에서도 발견하고 비판하는 것(웬디 브라운과 너스바움에 대한 비판)
 
3. 신자유주의 국가는 어떻게 정동의 주체가 되었나: 과거와 화해하는 새로운 국가와 미래,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포용국가
이 책의 모든 장에 제시된 감정의 키워드는 신자유주의 분석의 주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정동이 어떻게 '국가'의 것이 되는가, 달리말하면 국가는 어떻게 정동의 주체가 되는가에 대한 분석
 
이 분석은 각 감정의 키워드를 둘러싼 정동 정치가 각 키워드의 일반적 구성원리를 따라서 개인들, 신체들에 누적된 역사의 지층과 정동(고통, 수치, 분노 등)을 '국가의 것'으로 환수하는가를 분석.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별 신체들의 고통은 '과거의 것'이 되며, 역사는 부정(삭제)되고, 국가는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개별 신체들의 정동을 자기 것으로(국가의 수치)로 만든다.
 
 
 
4. 페미니즘 정동이론이란: 정동의 역사, 감정의 역사, 이론의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 움직임으로서 페미니즘과 정동의 마주침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의 이론 실천은 "역사"를 기입하는 것
 
"역사를 넘어선 어떤 보편의 자리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해석하는 것
 
고통을 물신화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역사를 해석할 이론적 실천을 밀고 나아가는 것.
 
페미니즘의 정동 연구란 역사의 다른 이름인데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이 정동이자 동시에 페미니즘 이론에서 대상/이론의 원리이다.
 
페미니즘이 고통이나 취약한 존재를 물신화한다거나, 식민 지배 피해자나 그 피해의 고통을 물신화한다는 식의 비판이 신자유주의 국가 정책가들 뿐 아니라, 너스바움이나 웬디 브라운과 같은 논자들의 주장에서도 발견되는 문제라는 점.
 
너스바움은 버틀러를 "패러디 대마왕"이라고 조롱하면서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며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논해야 하는 시대라고 한다.
 
(흥미로운 개인 소회: 젠더어펙트 연구 논문을 투고했을 때 "이 연구가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심사평과 함께 게재 불가를 받은 적이 있다.)
 
신야오도 유사한 지적을 하는 데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 대해 '흑인이 노예가 되었던 그런 시대는 지났다", 백인들을 노예농장 주인 취급해서는 안돼, 평범한 백인들의 감정도 소중하다고, 그걸 분석하는 이론이 되어야지. 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지점.
 
사라 아메드가 신자유주의의 새로움을 인증해주는 이론가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