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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헌재 심판이 지연되면서 촉발되는 정동들> 본문
내일 오전에는 헌재가 한덕수에 대한 결정을 내릴터이고, 오늘과도 다른 정동들의 복잡하게 이어질 것 같아, 내일이 오기 전 남겨두는 비상계엄 100일 전후, 그리고 헌재 심판 지연이 촉발한 정동적 배열에 관한 기록.
혹은 이와 관련한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한 메모.
1. 버틀러 선생님의 안녕
이 배열들과 무관한 것 같지만,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또 최근 어떤 사례들을 보면서 다시 떠오른 사례.
존경하옵는 주디스 버틀러 선생이 한국 방문을 한차례 취소하고 다시 방문하여, 비밀리에 강의를 하고 가셨었다. 서울이라 어차피 갈 수 없었지만, 신변 위협으로 인한 비밀 강연 사례가 좀 흥미로웠다.
버틀러 선생은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다른 지역에서 상당히 심각한 신변 위협을 받았던 것은 유투브로도 보기도 했다.
신변의 위협을 이유로, 철통 보안 속에, 강의도 비공개로, 소수만 초청해서 하고, 언론도 소수만 접촉하고 귀국하신 이 과정이 개인적으로는 버틀러 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선생은 이 방식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당신이 해오시던 이야기와 관련해서 연구할 사례는 아닐까?
강연이나 사적인 방식으로 논의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공개된 자료로는 어떤 의견 표명은 없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말씀드리지만, 이 사례를 언급하는 건 버틀러 강연 주최측에 대한 때늦은 민원이 아니다.
이 사례를 통해서도 생각해볼 문제가 많기 때문에 또 버틀러의 논의를 생생하게 한국 현실과 접합하여 고민해볼 사례라는 점에서 이야기 드립니다. 관계자분들은 노여워마시길요.
2. 나를 죽이려드는 적을 서로 죽이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나: 정동적 대상의 분할과 폭력에 대한 감각의 분할
이게 다시 생각난 건, 버틀러가 9.11 이후 줄곧 논의해온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 절대적 위협을 예감하는 존재를 어떻게 죽어도 되는 존재로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 혹은 이러한 잠재적 위협에 대한 과잉 방어, 혹은 선제적 방어 태세의 강화가 어떻게 무수한 존재를 선제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선제적 타격 대상으로 만드는지
이와 관련해서도 이번 한국 방문의 형식은 연구할만한 사례가 아닐까 싶었다. 위협이 과장되었다거나 용감하게 맞서라는 영웅주의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신변 위협의 염려에 대해, 방문 취소, 철통 보안, 아무도 안만나기 같이 '모두가 잠재적 위험 요소'라는 식의 선제적 대응말고, 다른 방식을 고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문제는 바로 누군가의 죽음(혹은 죽임)은 슬퍼할만한 대상으로, 다른 누군가는 죽어도 좋을(죽어도 슬퍼할만한 대상이 아닌) 혹은 죽어야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는 선제적 타격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 즉 정동적 대상의 분할에 따른 폭력에 대한 감각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애니머시의 위계 또한 작동한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협을 주는 대상은, 죽어도 슬퍼할만한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죽어야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는 대상이 된다.
이라크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9.11 테러로 선제적 타격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테러 경보가 일상의 습관이 되어버린 미국 사회가 관타나모 수용소를 합법적으로 구축하고, 고문과 추방을 '취약성'과 '잠재적 위협'이라는 정동적 사실성 속에서 이어왔듯이 말이다.
여기서의 주요 개념은 '윤리'나 '공존' '친구'나 '이웃'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익숙한 '윤리' 개념을 빌자면, 레비나스가 친근한 이웃으로서 타자가 아니라, 절대적 적(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과의 마주침이 어떻게 서로를 죽이는 살상에 이르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빌어 논할 수도 있겠다고 버틀러는 정리하기도 한다.
3. 정동적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나?
친구란 전형적인 친밀성의 대상으로 애착의 대상이자 애착을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이다. 친구란 상호 정동성의 전형적 사례다. 신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웃 또한 정동의 강도는 다르지만, 개념상 환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정동적 대상이다.
이웃이 아닌,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타자나 생명체, 혹은 무생물의 상실을 인간은 슬퍼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슬퍼할만한greivability , 정동적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적은 그렇지 않다. 적의 죽음은 전혀 슬픔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어쩌면 환희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아니다, 한강도 적었듯이, 광주에서도 '적'앞에서, 적의 죽음 앞에서, 안전함이 아닌, 죄책감을 느낀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상실과 죽음/죽임에 대해 죄책이나, 슬픔 아니 그 어떤 이름붙일 수 없는 정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절대적인 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여도 좋은 존재로 누군가들 어떤 집단을 할당함으로써 적대는 구축된다.
즉 적대란, 무엇보다 정동의 조율, 즉 어떤 대상을 정동적 대상이라는 존재성에서 완전히 절멸하는 정동적 조율의 작동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이 방식에서 인간 역사상 가장 잔악한, 이미 효율이 증명된 방법이 바로 증오정치이다.
3. 이 메모는 칼럼에 대한 평은 아니다. 짧은 칼럼을 두고 이러저러 긴 논평을 이어갈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칼럼들을 통해 촉발된 정동은 비상계엄 이후 100일, 헌재의 탄핵선고 지연이 촉발한 정동의 배열을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사례이다. 단지 연구 사례가 아니라, 우리가 탄핵 이후,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숙고하려면 말이다.
물론 그것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대혼란 속에 있기에 모두가 한가한 소리가 될 뿐이지만.
그러나 그저 간단하게라도, 위의 논지의 맥락을 구체화하는 차원에서 간략한 언급을 하자면.
박권일 선생의 '친구되기'는 앞서 2에서 논한 것처럼 '적'이 아닌 '친구'나 이웃으로서의 타자를 말한다는 점에서, 증오정치와 테러 시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질문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 칼럼에도 인용하고 있듯이, 최근 회자된 "KKK단과 친구가 되었다"는 사례에서 촉발된 논의라 하겠다.
반면 정희진 선생은 내전, 그리고 절대적 타자(나를 위협하는 존재들)를 서로 죽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명확하게 풀어내기보다(그러려면 개념과 사유를 정확하게 풀어내야할터) 경험적 사례로 대신하고, '공존' 같은 개념을 사용해서 '내전'과 대쌍으로 놓고 이해가능한 언어로 풀어서 대체했다.
개념에 대해서 거의 무신경하거나, 정확하게 쓰지 않으신다는 걸 사실 많이 느끼고, 그걸 본인의 칼럼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해당 칼럼에서 정동을 상부구조라고도 하고, 정서라고도 하고 감정이라고도 하시고 정동을 굳이 한자로도 쓰고 영어로는 affection이라고 하셨는데, 일단 한국어 논문에서도 정동은 영어로 다들 affect로 쓴다. 영어 어펙션과 구별하기 위해서^^ 저희 연구소가 젠더어펙트 연구소이자나요? 선생님?(칼럼 보고 속으로 잠시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희진 샘 칼럼에서 촉발된 여러 반응이 다 정당성을 갖지는 않는다.
특히 성차별적인 반응들은 언제나 "정희진 칼럼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사라 아메드도 논한 바와 같이, 인종차별/성차별은 대상 존재(흑인이나 여성)안에 내재된 어떤 '원인'에 있지 않고, 그 대상과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적대적 경계를 구축함으로써, 안과 바깥을 만드는, 인종화 과정의 효과이다.
물론 정희진 선생 칼럼이 완전무결하다느니, 비판하면 다 성차별이니 하는 논의가 아니다.
이 '특별한 반응 체계', 이상반응 그 자체와 정희진 칼럼에 내재한 문제를 거의 구별불가능한 상태, 그것이 바로 인종화로서 성차별주의가 구성되는 역학이다.
이게 초점은 아닌데, 이야말로 칼럼에 대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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