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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2020사례연구글순서2 본문
‘토론’이 헤이트스피치의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앞에 글에 이은 2번째 반박문)
비판을 하면 입막음이라고 하고, 말을 안 하면 토론을 안 하는 거라고도 하시기에 제가 따로 말을 이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 토론을 하자고 하시지만, 과연 토론이 될까에 대해 저는 부정적인데, 그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리지요. 페북에 ***가 다시 글을 올리고 다른 분도 거기에 혐오발화 비판이 입막음이라고도 하시며 토론을 해야 한다고 하셔서 먼저 말씀드립니다.
1. 헤이트스피치는 토론의 대상인가?
헤이트스피치 연구가와 실천가들은 헤이트스피치가 토론의 대상이기보다 비판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물론 어떤 발화가 헤이트스피치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의 토론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발화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내가 원하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가 토론의 대상이 아니고, <성소수자를 찬성하냐 아니냐>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헤이트스피치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의 권리를 위해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배척되어야 한다>는 게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의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발상 자체가 헤이트스피치입니다.
2. 사상이 없는 ‘정치 운동’의 폭력성과 역사적 경험
저는 오래 터프, 즉 트랜스젠더를 배제하자고 주장하는 자칭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파시즘 운동이므로 페미니즘으로 인정해서도 안 되고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논의해왔습니다. 그 이유의 일부는 1에 밝혔습니다.
그럼 터프가 왜 페미니즘이 아닌지, 특히 *** 글에 나온 주장 몇 개를 살피며 논의해보겠습니다.
2-1. 페미니즘은 사상이지 ‘자기권리중심주의’ 같은 게 아니다.
페미니즘은 근대 체제에 시작되어 사상적 체계와 갈래를 형성한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래서 계보도 있고 분파도 있고 사상 투쟁도 있습니다. 어떤 정치적 운동이 사상에 기반을 둔다는 건, 자기 사상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사상과 운동, 이론과 현실의 관계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 활동가라고 모든 게 정당화되지 않으며, 제가 연구자라고 활동가의 논의에 개입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근대 체제 이래 정치 운동이란 사상을 근거로 만들어졌습니다. 근대 체제 이래 사상이 없이 ‘정치 운동’을 표방한 매우 이례적인 경우가 파시즘이었습니다.
또 사상은 일정한 역사와 이론적 바탕이 있기에 ‘내가 생각하는 게 페미니즘’ 같은 건 불가능합니다. 즉 여성이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있지만, 모든 여성의 생각의 총합이 페미니즘은 아닙니다. 이건 노동자가 모두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있지만, 모든 노동자의 생각의 총합이 사회주의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일단 너무 길어질 터라 조금 생략하겠습니다.
***가 윤김지영이나 쉴라 제프리스, 국지혜 같은 사람과 만나 페미니즘을 알게 된 건 우연인지 몰라도 매우 운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의 만남이 더 길었을 터인데 왜 저와 ***는 페미니즘으로 만나지 못했는지는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습니다.)그러나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그들의 주장을 판단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윤김지영 선생이 세상에 어떤 소수자 운동도 자신의 기반이 되는 범주를 확장한 적이 없다고 했다는 데, 그것 자체가 페미니즘 사상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차이와 평등’에 관한 페미니즘 논쟁이나, 페미니즘에서 젠더 스터디즈로 나아가게 된 역사적 맥락 역시 ‘여성’ 범주가 어떤 정해진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의 확대 과정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주장’을 어떻게 해도 뭐라 할 수 없겠지만, 그걸 페미니즘 사상이나 역사를 운운하며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페미니즘 이론으로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쉴라 제프리스 비판하려면 그 책 읽고 오라고 하셨는데, ****님도 쉴라 제프리스나 윤김지영, 국지혜, 열다북스 페북 말고 페미니즘 이론서를 좀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상이 없는 ‘정치적 운동’이 왜 폭력적이며 위험한지는 현재 터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도 하나의 사상이라서 오래된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라는 이념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지요. 한국에는 보수주의가 없고 극우파만 있다는 건 정당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상이 없는 ‘운동’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 체계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다 할 수 있고 그걸 정당화합니다. 터프의 주장이 페미니즘이 될 수 없다고 하면, 페미 감별사냐고 합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인간을 타고난 속성(성적 차이, 외모, 유전자 등)으로 분류해서 가치를 나누고 배제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을 아주 기본적인 사상 토태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속성에 따라 분류해서 배제하는 걸 ‘주장’하는 터프는 페미니즘이 아닐 뿐 아니라, 반페미니즘, 나아가 우생학에 근거한 파시즘입니다. 터프 역시 아무런 사상 기반 없이 자기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반지성주의를 반복하고, 타자에 대한 절멸과 배제를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옹호하고 운동 모토로 삼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증오정치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2-2. 페미니즘 대 휴머니즘
자꾸 이 이야기를 하시는데 솔직하게 조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을 대립시키는 방식은 처음에 반페미니즘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걸 소수자를 배격하기 위해 페미니즘 이름으로 들여온 게 터프이지요. 터프가 실은 반페미니즘 진영의 전술이라는 논의가 많았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휴머니즘을 대단한 사상 같은 것으로 여기는 건 앞서 언급한 극우 반페미니즘 집단과 터프뿐입니다. 물론 1990년대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같은 선언이 유행한 적도 있으나, 페미니즘 사상 내에서나 사상사의 흐름에서 ‘휴머니즘’ 같은 개념은 거의 사용하지도 않습니다.(한국 터프 주요 멤버가 1990년대에서 생각이 멈춘 사람들이라는 진단도 그래서 일리가 있습니다.) 휴머니즘이 한 때 의미 있는 사상으로 자리 잡았던 건 1930년대 정도이지만, 그것도 휴머니즘이 반공주의나 파시즘을 옹호하는 알리바이가 되면서 어떤 사상을 휴머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건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게 ‘이론’과 ‘사상’의 맥락입니다. 한국에서도 휴머니즘은 주로 반공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수자 인권을 강조하는 게 그런 의미에서 휴머니즘이라는 설정 자체도 터프가 만들어낸, 사상과 이론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허수아비 게임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대표가 자신은 휴머니즘이 아니고 페미니즘을 주장한다면, 토론을 위해 상대방이 휴머니즘을 옹호해야 하겠지만, 그런 논의 구조 자체가 설정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토론을 어디서부터 할 수 있을지도 난감하지만,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겁니다.
2-3. 젠더와 섹스
여기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도 많고, 제가 지난 30여년간 적어도 10권 정도의 책에 적어두었으니 성의가 있으시면 그 중 한권이라도 보시면 좋겠네요. 피곤과 일상의 붕괴를 감당하면서도 다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종은 실제로 존재하는 범주가 아니고 인종주의에서 만들어진 범주입니다. 예를 들어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 같은 범주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런 구별을 위해서 우생학은 피부색, 두개골 크기, 뼈대, 골격, 머리카락의 생김새 등을 측정해서 이 측정값으로 현실의 서로 다른 인간을 분류하고 그들의 특성을 정리했습니다. 흑인은 지성적이기보다 몸을 쓰는 일, 스포츠나 춤 등에 적합하다는 인종차별주의는 이런 분류와 측정술에 의해 마치 하나의 객관적 생각처럼 자리잡았지요. 한국에서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판단한다거나 하는 일이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회자되는데 이 역시 우생학의 유산입니다. 인종차별철폐주의 운동은 바로 이런 식의 인종 범주에 의한 차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철폐주의 운동은 ‘흑인’의 순수한 범주를 지키기 위해 비흑인이나 흑인으로 오인되는 집단(예를 들어 ‘혼혈’?)을 배제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나요? 미러링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Black is beautiful!"은 경멸과 모욕, 니그로라고 차별받던 ‘블랙’을 저항의 상징으로 전유한 것이지, 비블랙을 배제해서 블랙의 순수성을 지키는 운동이 아닙니다. 비블랙을 배제하는 인종차별철폐 운동을 들어보셨는지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종차별철폐운동을 이런 식으로 특정 인종의 순수성과 ‘권익’을 위해 “비”, “반” 등의 범주 즉 비아리안인종, 반아리안인종 등의 범주를 만들어서 그들을 낙인찍고, 배제하고 절멸시킨 운동을 발명한게 바로 파시즘입니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이 등장했을 때 스스로도 ‘약자의 해방의 정치’를 주장했고 당시 일부 지식인조차 파시즘에 열광한 건 그들이 내세운 ‘약자성’ 혹은 ‘약자의 해방의 정치’라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존의 약자의 해방의 정치를 전유하는 방식이 터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즉 약자의 해방의 정치였던 인종차별철폐주의를 특정 인종의 순수성과 권익을 위해 ‘비아리아인/반아리아인’을 계속 만들어서 낙인찍고 결국 절멸했던 걸 증오정치라고 합니다. 터프가 약자의 해방의 정치였던 젠더차별철폐주의를 특정 정체성 집단(‘여성’)의 순수성과 권익을 위해 ‘비여성/반여성’을 계속 만들어서 낙인찍고 배제하고 절멸하려는 바로 이 방식이 증오정치입니다.
젠더차별철폐운동 즉 gender abolitionism은 이렇게 인종차별철폐주의와 계급 차별 철폐주의를 그 어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터프들이 오해하듯이 젠더를 쳐부수는 게 아니고, 젠더 범주로 인한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입니다. 젠더와 섹스를 대립시켜서 섹스를 구원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젠더와 섹스를 이렇게 구별하는 건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세운 미국 극우파의 반동성애 담론이 원천입니다.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근대 사상 어디서도 젠더와 섹스를 완전히 대립적이거나 하나에 의해 다른 하나가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사상도 이론도 없습니다. 그건 근대 사상에서 이른바 ‘사회문화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범주로는 나눌 수 있고 상대적으로 구별해서 논할 수 있지만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자연’이 정복된 이래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과 대립되는 ‘자연적인 것’은 더 이상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최근의 것도 아니고 이미 19세기 헤겔의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 역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로서 젠더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쉴라제프리스, 윤김지영 이야기라며 자꾸 토론을 하자고 하시면 19세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도 아마 끝이 없을 터이고, 그런다고 아마 입장이 바뀌지는 않을 터니 그런 수고를 하기는 힘들고 누구에게도 그런 요구를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지혜나 윤김지영씨에게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공부 좀 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건 *** 대표에게도 예외가 아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답변을 하는 게 제가 가진 *** 대표에 대한 그간의 인간적인 존중의 최대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대표의 입막음이나 제 입장을 강화하려는 그런 소박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진심으로 너무 수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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