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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발화아카이브/혐오발화연구자료

202002글순서3

alice11 2020. 2. 11. 06:06

세번째 반박문

 

페미니즘이 멋진 이유:

 

202027

 

 

1. 친구, 21세기 소년, 헤테로토피아와 데자뷔

 

부모가 외출한 주말 오후 아직 온기가 남은 부모의 침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알 수 없는 희열 속에서 발을 구르며 놀던 어린 시절의 어떤 황홀경이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자의 황홀경과 이질적으로 접속되는 것, 유년의 침대와 식민지는 황홀경의 헤테로토피아라고 푸코는 말했습니다.

만화를 그다지 자주 보지 않는데 공부 말고 취미를 좀 가져보라는 지인의 권고로, 역시 지인 추천으로 길고 긴 21세기 소년이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를 맹세하던 소년들의 비밀 기지와 유토피아와도 같던 만국박람회에서의 황홀경이, 세계 재패를 꿈꾸며 친구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박멸하려는 친구조직의 황홀경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헤테로토피아의 서사를 보았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학살된소녀의 몸을 떠올리며,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탱탱한 자두의 과육과 같다는 비유를 소설로 쓴 작가에 대해 부산 지역 여성 단체들이 여성혐오발화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하고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취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던 때가 있었죠. (인용 시작 *** 선생님이 소수자를 음식에 비유하며 이렇게: “된장찌개 김치찌개 비빔밥 떡뽁이 돈까스 다돼, 다돼, 다해줄게 이런게 페미니즘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무슨 모두 다 사랑하는 종교도 아니고, 아무 메뉴나 다해주는 김밥천국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길고 긴 역사의 데자뷔를 보는 건 저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수자 인권, 특히 정확하게 트랜스젠더, 여성, 퀴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님은 지금 사람들을 메뉴판 항목으로 분류해서 이야기하고 계시군요.)그때 본인도 어떤 사과도 책임도지지 않았고, 점입가경으로 친구들이 나서서 변호를 하기 시작했지요. ‘그 작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부산 지역에 그 사람이 해온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이런 사소한 문제로 그 사람 전체를 매도하고 비난하느냐.’(그때도 역시 저는 그 작가를 두둔하는 친구, 교사인 작가와 **협회 회장의 글을 혐오발화 사례 연구로 비판해서 피디에프로 제 블로그에 올려두었습니다.)

고은에 대한 최영미 시인의 미투 고발이 있을 때도, 고은 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이 나서서 그를 적극 두둔했고, ‘한국 문학의 가장 귀한 벗을 이렇게 잃을 수 없다고 항변했고, 본인도, 본인이 몸담았던 작가회의. 실천문학,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그의 작품으로 부와 명성을 얻은 창작과비평 어디서도 사과도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친밀함익숙함학살과 정복과 같은 너무나 다른 지평과 만나고, 또 내적 동일성이나 논리적 인과 관계, 감정의 인과성이 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고민하고 그걸 이론화한 건 푸코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이라는 테제로 학살자들이 평균 이상으로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평범하고 선한 보통의 인간이며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버틀러는 가깝고 친근한 것에 대한 우정이 낯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의 친구에 대한 감각을 사례로 문제제기 했습니다.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보면 좋은 친구라는 건 매우 복잡하고 폭력과 학살의 냄새를 풍기는 명명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좋은 친구’, ‘선량한 사람이라는 분류와 지칭 역시 그러합니다. (󰡔음란과 혁명󰡕) 얼마 전에 음란 논의의 새로운 지평을 위한 TF'에 초청 강연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음란 개념은 일제 시기 만들어진 풍속 통제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풍속 통제는 선량한 풍속을 침해하는 행위를 법으로 통제한다는 이념으로 선량함을 침해하는 존재, 행위, 양태를 모두 처벌했습니다. 선량함에는 어떤 객관적, 법적 기준도 없이 단지 사회통념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런 사회통념으로 많은 여성들이 문란녀, 허영녀, 음란녀, 유한부인,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되고, 매장되기를 반복했습니다. (길어서 생략^^)

일본의 재특회의 해이트스피치는 초기에 우리는 좋은 조센징을 겨냥하지 않고 나쁜 조센징만 배척한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좋은 조선인이라는 분류는 바로 이런 일본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결합된 증오정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그냥 일본인은 될 수 없고 반드시 좋은 조선인이 되어야했고 불령선인이란 바로 좋은 조선인이 아닌 자나 집단을 지칭하는 분류였습니다. ‘좋은 조선인의 분류 근거나 경계는 정해져 있지 않고, 대신 좋지 않은 조선인’, ‘가짜 조선인’, ‘나쁜 조선인을 색출하고 배제하면서 매일매일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이런 걸 수행성이라고 하죠. 이 과정에서 파시즘의 증오정치와 제국주의는 피식민자인 조선인들의 몸에 각인됩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좋지 않은 적’, ‘불량한 침범자’, ‘좋은 친구의 경계를 문란하게 만드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절멸하려는 정치를 매번 작동시키는 수행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인의 정치적 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젠더 연구는 자연화된 가치규정이 어떻게 젠더 규범에 의해 구성되었는지를 규명하는(젠더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좋은 친구란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가치나 상태가 아니라, 파시즘의 젠더 정치의 직접적 산물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운동이 우정이 아닌 사회적 연대와 연결의 형식을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고, 파시즘의 의미가 묶음이라는 뜻으로, ‘정과 연고-피와 대지를 바탕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어떤 결속을 지향하고 만들어가야 할까요? 페미니즘은 좋은 여성 친구들의 돈독한 우정을 위해 매번 좋지 않은 여성, 침범자, 불순물을 발명해서 제거해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인가요? 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 대표의 확신이 진심으로 문제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 운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헤이트스피치는 여러 경우가 있어서 우발적인 것, 실수, 깨닫지 못한 결과, 생각 없는 인용 등 다양합니다. 이런 경우 교육과 주고받음의 과정을 통한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확신에 의한 행동의 경우 그것은 아주 다른 문제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의 확신을 여러 차례 확인하고 있습니다.

 

2. 페미니즘이 멋진 이유

영화 1987을 보고 감동받은 건 주로 586 남성이라고 하지요. 운동권 시절의 크고 작은 수난의 경험으로 현재의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기연민과 나르시시즘이 오늘날 한국 사회 기성세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합니다. 87년 세대들은 그때, 문제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오늘, 그때를 알리바이로 삼는 게 가장 큰 문제이지요. 그들이 말하는 정치개혁진보도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도 않고 그저 집단 이기주의로 치부되는 건 과거를 알리바이로 변화하지 않고, 자기들만 옳다고 목소리 높이는 그 아집과 독선 때문이지요.

페미니즘이 무슨 종교냐고 물으셨고, ‘여성인권만 챙기기도 바쁘다고 *대표도 *** 선생도 자꾸 강조하시고, 이걸 비판하는 게 모다구리라고 입을 모으시고 한탄하시니 저도 되묻고 싶네요. ‘자기 인권만 챙기기내 앞가림이나 하는 일은 자본주의 시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죠. 그게 왜 페미니즘입니까? 그건 그냥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일 뿐이죠. 그런 건 운동도 정치도 무엇도 아닌 그저 자본주의적 욕망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걸 굳이 페미니즘이라고 우기면서 운동과 이론이 다르다고 강변하시니 안타깝습니다.

 

저는 오래 페미니스트로 살아왔고 제가 하는 페미니즘 실천이 단지 현실 운동과 상관없는 이론이나 연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반페미니즘, 페미니즘을 사칭하는(, 터프가 트랜스젠더를 여성을 사칭하는 거라고 하는 표현을 미러링하고 있지요.) 파시즘을 비판하고 그런 흐름, 조직, 개인과 싸워나가면서 오늘 여기의 페미니즘을 이어가고 있는 게 저의 운동이고 실천입니다. 저는 **대표나 이 모임의 우정을 위해 여기서 이렇게 길고 긴 싸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의 페미니즘,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반페미니즘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충실하게 지키고, ‘좋은 친구들의 경계를 불침번처럼 지키는 그런 형편없는 일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여러분이 부정하는 바로 그것,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한 그런 일, 아니 더나아가 인간의 통상적 감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 즉 위협으로 다가오는 불가해한 타자를 죽이거나 학살하거나 배제하는 그런 보통의 감각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위험과 위협과 공포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기를 꿈꾸고 실행하고 만들어가는, 그런 의미에서 해방과 저항의 정치인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멋진 건 바로 이 불가능을 넘어서려는 길고 긴 저항의 역사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욕망, 국가와 정상성, 보통이라는 기준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보초처럼 지키는 일이 페미니즘이 될 수 없는 이유이지요.

 

 

(인용 시작, **씨 글)

그런데 퀴어 이론은 하나의 사상인가요? 젠더론은 사상인가요? 페미니즘은 사상이지만 퀴어 이론이나 젠더론은 이론일 뿐이지 사상은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만큼 책을 많이 읽은 건 전혀 아니지만 시대의 진리를 의심하라는 것이 푸코의 명제라고 알고 있고 그것에 동의합니다. 젠더는 분석의 도구로서는 너무 탁월하지만 그것으로 인간에게 살아가라고 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는 젠더가 없습니다. 젠더리스가 아니라, 그냥 젠더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제가 정말 어설픈 생각이지만 이 사회에서 젠더 정체성이 이토록 목숨 걸고 중요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다만 퀴어 운동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지나치게 포르노그래피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뻘말이지만 성관계 없어도 얼마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용 마침)

 

제가 *대표가 쉴라 제프리스말고는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판단하는 여러 증거가 있지만 위 인용문 역시 그러합니다. 긴 설명은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하던가 해보죠. 다만 한가지, 변 대표는 여기서 젠더를 부정하면서 젠더 정체성에 목숨거는이 사회가 포르노그래피화되어 있어서라고 하면서 부연하면서 매사 성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서다라고 하고 있지요. 매우 징후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퀴어퍼레이드에서 헤이트스피치를 조사해서 분석해왔습니다. 부산 지역 헤이트스피치 특성이나 일본, 대만, 홍콩 유럽과 한국의 헤이트스피치를 비교 조사 분석하기도 했지요. 한국의 반동성애 헤이트스피치의 특성 중 하나가 성소수자를 똥꼬충이라고 멸칭으로 부르면서 성소수자를 성도착이나 변태성행위자포르노그래피화하는 방식을 반복합니다. ***대표가 젠더 정체성에 목숨거는풍토를 한탄하고 젠더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데 그 이유라고 제시하는 부분은 정확하게 반동성애 헤이트스피치가 성소수자를 더러운 변태성욕자로 환원하는 발상, 서사 구성, 이데올로기와 일치합니다. 더구나 이런 반동성애 헤이트스피치를 아주 여러 차례 확신을 갖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성애 기반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당신을 보면 성관계가 연상된다, 당신 부모는 너무 성관계에 목숨걸고 산 결과 당신을 낳았다. 성관계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하니, 당신 삶이 너무 포르노그래피화 되어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표가 젠더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성소수자를 변태성욕자이고 항문섹스에 미친 오염덩어리로 보는 논리와 정확하게 같은 일치하고 이를 확신에 차서 반복하고 계신 것이지요.

 

3. 자리를 바꾸어 보면 왜 폭력인지 안다고 하는데, 전혀 되지 않는 이유

영화나 매체에서 남녀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을 바꿔보면 특정한 묘사, 형상화, 가치부여 등이 왜 성차별적인지 알게 된다고 하지요. 표현에서도 기본적으로 남교수는 없는데 여교수라고 사용하는 게 차별표현이듯이 말이죠. 그럼 간단한 실험을 해보지요.

 

1. 당신의 아이 세 명이 있는 데 학교에서 교사가 당신 아이 셋을 김치찌개, 청국장, 비빔밥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청국장은 더럽고 냄새나고 부적절하고 교실에서 청국장까지 다 받아들일 수 없으니 학교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며, 학생들에게 찬반 논쟁을 시킨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당신은 이성애 기반 부부관계를 맺고 있고 아이가 있다. 사람들이 당신 아이를 볼 때마다 성기 결합으로 얼룩진 결실이고,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부적절한 존재이며, 성관계 없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 수 있으니, 부적절한 부부관계에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찬반 토론에 부치겠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2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12는 있을 수 없는 데 왜 누군가는 똑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듣고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야 하는가요? 누가 누구를 모다구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