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alicewonderland

덕력을 채워야 하는 삶 본문

몰운대 일기/여기가 아니었더라면

덕력을 채워야 하는 삶

alice11 2020. 11. 19. 09:20

*문득 '나 원래 덕후 체질이었나' 할 때가 있다. 

취직 투쟁하던 시절에는 연예인 이야기 하는 후배한테 '연구자가 그딴 헛소리나 해서 되겠냐'는 꼰대담을 하던 삶이었으니, 기억나는 한 이건 부산에 취직 한 이후 생긴 증상이다. 이번까지 한 세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뭔가 알 수 없는 위기랄까, 뭔가 설명하기 힘든 상태였던 것 같다. 

 

눈을 뜨고 감을 때 넋을 놓듯이 그저 뭔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번에는 '아, 그래서 사람들이 덕력 보충이라고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홀로 여행 영상을 그렇게 반복재생하며 몰두하다보니 나의 모든 sns가 관련 정보로 타임라인을 조절하고 있다.^^

 

** 시스템과 싸우는 일은...뭐랄까 몸과 마음을 다 고갈시켜버리고, 특이한 절망과 외로움에 사람을 처박아버린다. 세상과 엄청나게 단절되어버린 것 같은 상태, 다들 우아하게 차려입고 평온한 일상을 영유하는 한 가운데서 홀로 발광하며 추태를 부리는 것 같은, 내가 부끄러울 일이 전혀 없는데도 결국 그런 수치심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유가 뭘까, 오래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런 문장도 기록하고 발설해보았다. 

 

"싸움도 뭔가 명분이 있거나, 그럴듯한 문제로 싸워야, 싸우면서 사는 삶도 품격이 생기는데, 정말 너무 한심하고 찌질한 일들, 남들에게 설명하기도 정말 부끄럽다고 할 그럴 어처구니 없는 일로 싸우며 살다보면, 내 삶 자체가 파괴되고 피폐해지기만 한다."

 

그래서, 그런 싸움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도 생각해보니, 두어달 전이다. 

 

그만두려는 내 결심을 비웃듯이 또 '그런 일'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어떻게든 그래도 싸워서 뭔가를 바꿔보려, 발악을 했다. '그런 싸움'이, 그렇게 싸우는 삶이 나를 파괴했던 건, 무엇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되돌아오는 침묵의 회신들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싸우면서 무기력하게 파괴되기를 반복하는 그런 싸움.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함께 해주기를 사력을 다해 이야기하고, 같은 말을 수십번 되풀이하며 버텼다.

 

침묵을 넘어, 그래도 작은 변화를 얻어내기는 했다. 정말 작은.

 

그래서 한숨을 돌리고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너무 견디기 힘든 그런 고립감을 반복하고 있다. 왜일까. 

 

이 부끄러움, 수치심,

 

수업 중 다룬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 논의에 대해 한 학생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며 이야기를 이어주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히려 잘못된 시스템을 변화시키려 싸우고 있는데

누구에게도 이 싸움에 대해서 말하기도 싫고, 말을 꺼내려면 수치스럽기까지 한 그런 반복에 대해.

고립감에 대해

 

적어본다. 

 

그래도 작은 변화를 얻어냈는데도, 여전히 싸운 나 자신이 발악하며 대로에서 울고 있는 사람처럼 부끄럽고

모두에게서 벗어나버리고 싶은 그런 상태를.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