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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비장소와 난민, 몸둘 바의 정치와 페미니즘 본문
A railway Nocturn, Martha Zamarska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마르크 오제, 비장소
젠더 어팩스 스쿨 마지막 주제는 비장소와 난민, 페미니즘 공간 정치였습니다.
페미니즘과 난민의 관계는 단지 여성, 인종의 교차로에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교차로가 문제이겠습니다.
교차로란 사실 특정한 장소의 물질성을 갖지 않은 이름, 장소와 장소가 서로 지나친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개념이지만, 어떤 곳이기도 하지요. 바로 이런 곳이 비장소입니다.
여성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언제나 수많은 이름을 지니고 뽐내는 장소를 만나고 거기 있지만, 그 장소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던 존재이지요. 집에서도 여성의 공간은 없었고, 버지니아 울프이 소원이 <나만의 방>이었던 이유지요. 집에 없는 공간을 찾아 거리로 나서면 죽음 혹은 린치가 기다립니다. 그래도 왜 그렇게 어딘가로 나섰을까요? 그렇게 도처로 나서도 왜 그 발걸음, 그녀들이 만난 장소는 <여성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장소가 없는 존재에게 정체성도 없다, 는 것이 오래된 명제인 이유이죠.
여성은 그래서 언제나 젠더화된 이 세계에 몸둘 바를 갖지 못한 거처 없고 정처없는 존재였습니다. 여성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난민이었다면, 국적을 갖고, 국적을 박탈당하고 모든 곳에 국가의 이름이 새겨진 이 땅을 떠도는 난민은 좀더 최근의 존재이겠지요. 여성과 난민의 관계는 이처럼 오랜 페미니즘 그 자체의 역사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페미니즘이 난민에 '무지'하다거나 하는 말도 경솔하고, '여성'과 '안전' 혹은 '페미니즘'을 도구로 앞세워 난민 반대를 내세우는 집단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앞세운다고 모두 페미니즘은 아니지요. '자유'와 '민주', 인권'을 앞세운 모든 이들이 민주주의 정치나 인권 정치의 한 부분이라고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장소와 페미니즘, 몸둘 바의 정치와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 이전에 발표한 자료의 일부를 요약해서 정리하면서 긴 일정의 일단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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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해방적 여성을 ‘서구에 대한 동경’에 빠진 허영녀라 규정했다면, 백년이 지난 도래한 ‘된장녀’의 ‘서식지’가 스타벅스라는 전형적 비장소인 것은 우연은 아니다.
이른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라는 전형적 분리가 보여주듯이 몸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특정한 몸둘 바들이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으로 구별되었다.
이미 젠더적으로 규정된 공간들이 아닌 다른 공간이 부재한 상태에서 페미니즘의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유토피아와 비장소 사이에서 분열되거나 맴돌곤 했다.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의 주요 기반이 되는 비 물질적 공간, virtual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의 분리와 분열은 근대 초기 나혜석에게 나타났던 파리와 경성의 분열과는 어떻게 다를까?
전혜린의 슈바빙과 나혜석의 파리는 단지 ‘서구문물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탈정치화된 유토피아일까?
근대 초기 이래 이곳의 페미니즘은 왜 항상 저곳의 삶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축되고 재동기화되는 것일까?
나혜석과 전혜린과 최승자와 배수아를 비롯한 한국의 페미니즘은 번역의 공간 속에서 매번 다시 태어나곤 했다. 이는 근대가 번역의 과정이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오히려 번역의 공간은 페미니즘에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번역하는 행위 속에서만 구축될 수 있었던 페미니즘 정치의 독특한 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소는 때로 낭만적 유토피아로 때로는 글로벌 소비자본에 포섭된 ‘비장소non-place'로 현현한다.
나혜석이 그린 조선의 고향집과 파리
조선옷을 입은 나혜석과, 그곳으로 자리를 바꾸고, 복장을 바꾼 나혜석
와이파이 아트
샤를르 푸리에의 비장소에 대한 상상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들에게 낭만적 공상주의의 전형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곳도 저곳도 아닌 다른 자리에 대한 꿈은 비장소의 상상으로 표상되곤 했다. 아니 비장소란 그런 다른 자리에 대한 상상의 총체일수 있다. 물론 마르크 오제가 논하는 비장소와 기존의 공간place. 자리lieu(자크 랑시에르, 뤽 낭시)에 대한 논의는 동일하지 않고 때로는 대립한다.
역시 미완의 기획으로 끝난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장소성placeness 분석과 일상 정치(르페브르)를 결합하려는 시도로서 장소성을 박탈하는 비장소화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리듬 분석의 필요성을 제창한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원작, 올란도
이미 젠더적으로 규정된 공간들이 아닌 다른 공간이 부재한 상태에서 페미니즘의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유토피아와 비장소 사이에서 분열되거나 맴돌곤 했다. 이제는 그 장소들에 이름을 부여할 때이다. 젠더 어팩트 스쿨 페미니즘의 공간을 오래 다뤄온 이유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도래하지 않은 이름을 부르는 정치이자, 도래하지 않은 몸들, 그리고 몸들의 거처인 몸둘 바의 새로운 정치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긴 시간 감사했고, 감사합니다. 이제 또, 자주, 만나요.
<9주차 세미나 안내>
* 세미나 자료
마르크 오제,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아카넷, 2017.
문경란, <우리 곁의 난민: 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 서울연구원, 2017.
* 세미나 발제
권영빈 : <비장소>
하지우, 주선우 : <우리 곁의 난민> 1부/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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