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alicewonderland

어떤 '가난한' 마음들, 이정임 작가의 <오르내리>, <<안으며 업힌>>,곳간 2022 본문

몰운대 일기/여기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가난한' 마음들, 이정임 작가의 <오르내리>, <<안으며 업힌>>,곳간 2022

alice11 2022. 6. 12. 23:06

 
<어떤 '가파른' 마음들>
이정임 작가의 <오르내리>, <<안으며 업힌>>,곳간 2022
이정임 작가 작품에 대해 언젠가 꼭 글을 쓰고 싶었는데.
미루다 미루다 못쓸 것 같아.
새 작품이 나온 김에 몇 자 메모를 남겨봅니다.
나는 지역출신이 아니여서 지역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더많이 갖게된다.
이미 내가 소유한 상징자본이 그 기회 지분에 물론 얹힌다.
그렇지만 이 기회는 또 내가 이주자여도 부산에 대해 말할 권리를 소리높여 외치며 싸워온 결과 쟁취한 것이다.
이주자의 말할 권리를 싸우며 여기 살 권리 여기 사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싸운 여정이기도 했다.
일터의 관계는 처음이나 십여년이 지난 지금이나 한국 어디나 매일반일 대학과 그 언저리 관계일 뿐이다. 여기서 지역성은 "우리가 남이가"의 평균 이상과 이하를 넘나든다. 그 '우리' 역시 대학의 노예적 서열로 뚜렷하게 나뉜거라 결국 "주인들의 노예부릴 권력"을 위해 동원된다. 원래 그 말의 출처가 그랬듯.
비정규직 시절 그러했듯
대학 바깥으로 나아가 여기저기 이곳저곳 생면부지 사람들, 장소들을 만나러 진심을 다해 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 중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대단한 분투에 대단한 실패의 시간들이었다.
그 대단한 분투와 실패는, (주어가 아닌 자리를 바꾼다는 의미로) 아니 실패를 같이 한 사람들이 있어 아마 지금 내가 여기 있다고 하겠다.
거듭된 실패와 분투가
부산말로 "애살많다"의 의미인지 여직도 다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 긴 실패와 분투를 함께하고 지켜보며 또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가파른 고비와 마주할 때마다
"다 가난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말건네던 어떤 선생님의 말도 아직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다.
이정임 작가의 <오르내리>를 읽으며
"다 가난해서 그렇습니다. "라던 그 선생의 속뜻을
알지는 못하겠으나 분명 헤아릴 수 있었다.
평생 청소 노동 돌봄 노동을 하며 누구에게도 절대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자존을 지키며 살아온 엄마와 이모.
나이듦과 병듦 반려의 상실.
의지로도 마음으로도 극복할수 없는 한계상황.
이모의 상실에 어리둥절한 엄마를 돌보기 위해
나는 여기 초량 산복도로
이모와 엄마가 서로 반려가 되어 의지하며 살던 집에 머문다.
역시 이모의 상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노랑이의 가르릉거림을 듣는게
이곳 아무도 없는 임시 거처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
학원 강사일을 쉬며 엄마를 돌보기 위해 머문 초량 살림은
코로나로 엄마의 면회가 금지되면서 기약없이 유예중이다.
이제 더는 이모가 없는 집
돌아갈 수 없는 생활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도래할 미래에 대한
막연하다고 믿고 싶지만 명료한 불안 혹은 공포.
외롭고 무섭고 막막하고 숨가쁜
생활이라고 부르기엔 생활적이지 않고
삶이라 부르기엔 상실로 가득하고
일상이라기엔 가벼울 수 없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벗어나고 싶다거나
달라지고 싶다거나
그런 상황과 욕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팍팍한 날들의 마음자리
그게 아마
"가난해서"
"그리할 수밖에 없는"
"그렇습니다."라며
이유없이 본인이 미안해하고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어했던
그 "가난해서 그렇습니다."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마음 자리라 하겠다.
<오르내리>의 나가
내 주위를 이유 없이 맴돌며 예고 없이 끼어들어오는
흰머리 할매를
맞기에
너무나 가파르듯이.
가만히 누워 있어도
가파른 고비를 넘나드는
내게서인지 노랑이에게서인지 지나는 이들에게서인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가파른 숨소리 속에 사는 게 초량의 삶이듯 말이다.
너무나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느라
'내'가 빗길을 울며 소리치며 걸어가는
흰머리 할매를
창 밖으로 그저 내다볼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오르내리느라.
가파른 숨을 오르내리느라.
내 손길을 기다릴 지도 모르는
끝집 여자의 숨찬 오르내림을
알면서도
오느내리느라
먼 데만 보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가난해서 그러는'
오르내리느라
가파른 고비고비에서
자꾸 마주치고
자꾸 끼어드는
흰머리 할매, 노랑이, 물소리, 바람소리
끝집 여자의 기척이 신경이 쓰여서.
그 기척 때문에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깻잎, 상추, 가지, 고추 화분을" 흰머리 할매 집에서 옮겨다 놓고
'나'는 그렇게 초량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더이상 머무는 게 아니라.
살기로 한 건
자기들은 내려가면서
"올라 가입시다"라고 인사를 건네던
엄마와 이모와 할매들의 인사말의 뜻을
비로소 헤아리게 된 덕이다.
평생 온몸으로 부대낀 노동의 자취 하나
기억되지도 불려지지도 않는
이 "대공장 남성 노동자의 도시"의 하늘 밑에서
그녀들이 평생을 길어 올린
"올라 가입시다"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이정임 작가의 <오르내리>는 너무나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한국 최대의 산업단지
2대 도시 부산의 길고 긴 역사 속에
산업 역군의 역사와 이름은 오롯하고
여전히 미래 혁신 신산업이라는 이름은
산업 역군의 도시를 이어간다.
대공장 남성 노동자의 이름만 기억하고
그 노동만 노동으로 인정되는 산업단지에서
그녀들의 노동은 기억되지도 불려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의미도 가치도 없는 생계 수단으로만 간주된다.
한국 최대 산업단지의 길고 긴 역사는
돌봄이 불가능한 도시, 한국 최대의 고독사 1위 도시라는 현재로 남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들의 돌봄 노동은 밑바닥일 뿐이고.
그녀들의 돌봄의 말들 역시
의미를 알 수 없이
허공에 흩어진다.
"솨아아,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바람이 분다. 느티나무 이파리가 손을 크게 흔들자 매미가 운다.
할매가 준 화분의 깻잎이 흔들리고 내 등도 순간 선득하다.
이 바람은 곧 계단과 골목을 따라 구석구석 웅크린 집들을 방문할 것이다.
올라 가입시다,
사람들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가다가 엄마가 있는 병원 창문에 잠시 기대겠지.
그리고 곧 바다에 닿는다.
올라가자는 인사를 바다에 남기며.
그러면 바다는 오래 기다린 것처럼 바람을 보낼 것이다.
산을 향해 오르는 축축한 짠 바람을,
올라 가입시다.
모두의 인사에 대한 대답처럼."
이정임, <오르내리>, 31쪽. 곳간. 2022.
--학기말이라 너무 일이 많은 중.
그래도 읽자마자 글을 쓰고 싶어서, 이동하며 차속에서도 조금씩 적어서 올려둠.
기회가 되면 조금 더 수정해볼 예정.
이정임 작가는 책 소개에도 작가 사진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