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alicewonderland

락그룹 부활의 재결합, 2002 본문

에세이들

락그룹 부활의 재결합, 2002

alice11 2018. 10. 29. 20:44
문화비평 : 락그룹 ‘부활’의 재결합
  •  권명아 연세대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2002-12-07 10:00:26
권명아 
연세대 강사 
국문학

락그룹 부활이 14년 만에 재결합했다.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도 부활의 싱어였던 이승철이나 그들의 최대 히트곡 ‘마지막 콘서트’는 잘 알 것이다. 이제 굳이 세월의 흔적을 가리지 않는 이승철이나 노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김태원. 부활의 재결합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필자만의 사정일까. 아마도 80년대 ‘암울한’ 시절을 부활과 함께, 아니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락 그룹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은 TV 스피커를 울리는 부활의 노래를 들으며 지난 시절의 감회에 잠깐쯤은 젖어들지 않았을까.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던 대학가, 운동권에도 모범생에도 들지 못했던 그 많은 대학생들은 무엇으로 살았을까. 필자 역시, 이도 저도 아닌 대학생들 중 하나였다.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공장으로 나서던 그 시절을 자격지심과 죄책감 없이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복잡한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시절의 또 다른 얼굴들도 있다.
지금은 그저 시끄러운 락 음악이 나오고 춤이나 추는 그런 장소가 되어버린 락카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설 수 있는 대학생도 아니고, 착실한 모범생도 아니어서 공장이든 회사든 취직도 못했던 어정쩡한 젊음들이 80년대 락카페의 단골 손님들이었다. 어디에도 젊음을 ‘바칠 수’ 없던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공허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락 음악은 그저 공허하고 무기력한 젊음의 갈증을 채워주는 뭔지 모르지만 절실한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단지 락 음악을 듣기 위해 커피 한 잔 값만을 달랑 들고 하루 종일 락카페에서 죽치고 있던 그들의 ‘나른한’ 모습은 아마도 80년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또 다른 하위 그룹들의 표정일지 모른다. 
락을 저항 음악이라고 칭송하는 시대의 찬미도, 매니아의 열화와 같은 지지나 문화 비평가들의 뜨거운 찬사도 받지 못한 채 술과 약물에 절어 외롭게 생을 마감한 김현식은 그런 점에서 한국 락 음악, 혹은 뭐라 이름붙일 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절실했던 ‘하위 문화’의 리얼리티를 좀더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락이 저항이라는 1990년대식 유행어가 왠지 조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2002년의 그룹 부활에 대해서 하위 문화 운운 하는 것은 이제 어불성설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음악은 ‘매끈하고’ 부활보다는 이승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부활의 음반 판매 실적도 꽤 괜찮았다고 하니 386세대의 추억도 그 판매고에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활이 성공적인 재기를 하게 된 데에는 음반 시장의 ‘악재’가 부활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몇 개의 가요로 ‘도배’를 하던 이전과 뭔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체리 필터, 자우림, 불독 맨션, 부활 등 이전 같으면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락 그룹들이 심심치 않게 방송 화면을 장식한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로비 파문으로 대형 기획사들의 ‘작업’이 조금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야 그래도 조금은 정상적인 방송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세대론으로 설명하는 문법에는 개개인들의 삶을 획일화하는 동일화의 폭력이 내재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의 문법을 잠시 차용하자면 386세대는 자신들이 젊은 시절 향유했던 문화와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는 드문 행운을 가진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장발,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었던 1970년대의 ‘청년’ 문화는 청년 문화로만 존재했을 뿐 나이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포크 문화의 ‘부활’에 힘입어 1970년대 청년 문화의 기수들도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양희은이나 김민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현재형의 문화 생산에 참여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386세대들은 문화 향유 방식, 삶의 방식 등 자신들의 나름의 정체성을 젊은 시절 한때의 존재 방식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통하는 양식으로서 실험해 볼 수 있는 드문 세대이기도 하다. 물론 심청이 운운하면서 기성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변신’의 천재적 면모를 과시한 ‘청년 정치인’의 경우처럼 이런 실험은 기이한 존재 양식이 되기도 한다. 
부활한 ‘부활’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도 특정 세대의 정체성의 특징이라 할지 모르겠다. 특히 386세대의 정체성은 ‘복고적’인 시선에 그 특징이 있다. 그들의 시선과 가치관은 80년대에 고정되어 있거나 적어도 그것에 비추어 모든 것을 재단하는 특징이 있다. ‘박하사탕’에서 ‘와이키키 브러더스’에 이르기까지 386세대적 정체성에 기반한 서사들은 과거로 회귀하고 거기에서 존재의 시원성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386세대의 정체성은 퇴영적이다. 필자가 ‘부활’ 속에서 고집스럽게 우울했던 80년대 락카페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퇴영적 특성의 반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