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14 12:02:07
올해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평균 출산율이 1인당 1.3명이라고 한다. 굳이 통계 수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아이 셋이 부의 상징이라는 반 농담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낮은 출산율의 가장 큰 요인은 육아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다. 한국 사회처럼 모성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도 흔하지 않지만 모성과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이토록 무관심한 사회 또한 드물다. 한국 사회는 여성을 모성과 육아의 테두리에 가두기 위한 감시체제를 정교하게 가동하고 있지만 모성과 육아를 위한 사회적 시스템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혹자는 한국이 여성 인권 사각지대가 된 것은 뿌리 깊은 봉건적 ‘전통’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진단은 일면 타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전통’의 기원을 탐색하는 작업은 단지 ‘봉건적 시스템’에 대해 성찰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1960년대 이후 모성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줄곧 ‘가족계획’으로 대변되는 생산성 제고에 집중돼왔다. 가족계획은 애초부터 여성의 복지나 인권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후진국의 생산성 저하’의 주된 요인인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 문제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근원적으로 제거됐다. 분단 체제 아래 한국의 정통성은 주로 ‘전통의 옹호’라는 측면으로 이미지화됐고 가족의 ‘신성함’은 민족 전통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 내세워졌다. 이를 위해 탁아제도는 북한의 비인간적 집단주의와 반 전통성, 반 정통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상으로 제시됐다. 문제는 이러한 ‘위로부터 부과된 이데올로기’의 강제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서사적 요인들은 오히려 더 강한 강제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모성과 육아의 문제는 성장 제일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관리돼 온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 능력과 가족 구성원의 ‘헌신도’를 시험하는 위험한 시도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육아는 전적으로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달린 것이 되거나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는 가족 구성원의 헌신에 의존하게 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육아를 맡겨야 하는 경우든,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고 육아 비용을 댈 수 있는 경우든 육아의 ‘주체’로 간주되는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죄의식, 타인의 암묵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실상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첫 출발은 국영·공영 탁아 시설의 대대적인 확충이지만, 현재 탁아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직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들은 대학 안에 탁아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출산율 저하를 보도하는 언론의 초점은 육아를 위한 사회적 책임의 문제보다 육아의 책임을 회피하는 여성을 윤리적으로 단죄하려는 시선에 더 가깝다. 육아는 전적으로 엄마의 몫이며 아이를 엄마의 품이 아닌 다른 ‘품’으로 떠맡기는 여성은 비윤리적이라는 감시와 처벌의 시선은 모성과 육아에 대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생산해낸, 전통이라는 이름의 효율적인 지배 체제이다. 직장, 자방 자치 단체, 학교에서 탁아 시설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지 않은’ 혹은 덜 시급한 문제로 간주되는 것 역시 이러한 지배 체제의 논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사회와 국가가 담당할 것은 감시와 처벌이지 ‘책임’은 아니라는 논리, 이는 모성과 육아 뿐 아니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국가의 여성 복지 정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여성들은 가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려면 아무도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한다. 출산율 제로가 되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에도 변화가 생길까. 강력한 국가주의에 대한 향수가 드세지는 요즘, 여성들은 점점 더 불안하다(물론 모든 여성이 이러한 입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강한’ 정부일수록 여성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감시와 처벌의 체계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