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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wonderland
얼굴과 죽은 몸의 팔들 혹은 등:오늘날 페미니즘은 누구를 대표하는 운동일까? 본문
얼굴과 죽은 몸의 팔들 혹은 등
오늘날 페미니즘은 누구를 대표하는 운동일까?
1. 신지예씨와의 연루 혹은 애도의 거리는 이 질문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어제 한겨레나 미디어 오늘 기사는 신지예씨가 국힘으로 합류하면서 "여성계"와 "여성운동"에 타격이 예상된다는 굉장히 유사한 논조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일 수도. 근데 여기서 타격을 입는 여성계는 어디고 여성운동은 또 어떤 집단인지 알 수 없는데 다들 그렇게 받아들임. 담론화의 힘
신지예씨가 어떤 여성계 어떤 여성운동을 대표하나?
답: 녹색당과 팀서울
녹색당과 팀서울이 여성계나 여성운동을 대표하나?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지요.
일단 이런 질문과 대답은 페미니즘 정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2. 대표성의 정치를 넘어서 나아간 페미니즘 정치의 위대한 역사
페미니즘이 누구에 의해 대표되거나 역으로 페미니즘이 누군가를 대표하는 운동인가?
정당 정치 내에서의 "여성정치"를 말하는 사람들은 줄곧 페미니즘을 이렇게 전유해왔다. (청년 정치 역시)
"젠더정치"를 역시 정당 정치 내에 젠더를 기입하는 것으로 잘못 전유해버린 신지예씨의 젠더정치 연구소도 할 말이 많았지만 사실 참아옴.
페미니즘은 운동의 시작점에서부터 근대 대표성의 정치의 근본적 한계를 비판함. 그래서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표성 체제에 대한 비판을 '참여'를 통해서 하는 방식(평등)과 체제와의 단절을 통해서 이루는 방식이(차이) 한때 어쩔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지처럼 혹은 딜레마처럼 인식되기도 함.
그러나 이미 이런 선택지가 강요된 딜레마일 뿐 페미니즘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 딜레마 자체를 넘어서는 그래서 '위대한 역설'을 만든 운동이자 이론이라는 게 적어도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인식이다. (조안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한국어로는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로 번역)
즉 페미니즘은 현실에서 사용되는 어휘로 '대표성'을 말할 때조차 대표성이 페미니즘 정치와 어긋난다는, 그 불일치와 모순을 더욱 가시화하고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3. 상징자본의 구축과 전유: 애도인가 비판인가
경향 칼럼에서 신지예씨 사태를 "상징자본의 사유화"로 논한 점은 좀 흥미롭다. 즉 여성운동이나 여성계 일반을 대표하는 사례가 아니라, 신지예라는 청년/페미니즘 정치를 표방한 특정 사례에 적합한 분석의 어휘가 무엇인가, 김민아 논설위원은 그걸 '상징자본의 구축과 전유, 사유화'로 설정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 신지예의 '운동'이 운동이나 정치적인 것보다 상징자본 구축 과정으로 분석되는 게 뼈를 때릴 수 있다. 이 칼럼은 그런 뼈 때리는 칼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부분 신지예의 사례를 여성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의 대표성으로 갑자기 부상시켜서 비판하는 담론 흐름과 구별하려는 해석틀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전략적 개입.
어제 오늘, 신지예씨 사태를 어떤 운동, 특히 페미니즘 운동의 끝이라며 애도하는 흐름을 보고 있다. "함께 해온 사람으로서의 배신감과 충격과 책임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 감정들로 신지예씨와 자신들이 연루되어온 운동에 '대표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가현 님께서 긴 애도와 책임을 표명하면서 이 사태가 "신지예를 대표 얼굴로 한 어떤 페미니즘 정치 흐름의 끝은 맞습니다."라고 표명하셨다. 또 거기에 여성 소수자 인권 기후위기까지 다 포함한 대표성을 논하고 있다.
신지예가 이 모든 정치의 대표가 될 수도 없고 그런 적도 없지만, 페미니즘을 이렇게 '대표성'으로 환원하는 데 어떤 불일치나 낙차가 없는 것이, 실은 바로 신지예를 포함한 어떤 그룹이 걸어온 길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니 신지예를 "대표 얼굴"로 설정해온 그 흐름에 대해,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역으로 그 대표 얼굴의 몰락을 페미니즘 정치의 끝이라고 선언하고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흐름은 페미니즘 정치의 역사와 이론에 비추어보자면 페미니즘 정치가 비판해온 '대표성'의 정치에 함몰된 것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또 그런 의미에서 얼굴로 자신을 표상해온 근대적 주체의 '주체성'을 비판하고 신체들의 연결성을 처음부터 정치적 표상이자 힘으로 제시했다. 그런 맥락에서 신지예는 어떤 흐름의 '대표얼굴'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흐름을 페미니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하는 점은 자명한 것이 아니고 많은 비판과 논쟁을 통해서만 겨우 성립 가능할, 혹은 불가능할 그런 논제이다.
4. 얼굴과 죽은 몸의 팔 혹은 등에 대해서는 여력이 된다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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